일혈만걸(잇치반케츠) 스쿠나히코x독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일은 썩 유쾌한 감각은 아니었다. 이름난 영걸들의 피를 제물로 바쳐 저를 현실로 불러낸 이가 정답게 웃고 있는 장면의 주인공이 저가 아니라는 사실에 자존심이 높디높은 검은 영걸의 눈이 새초롬하게 접혔다.


독신이라는 존재는 혼자이되 결코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이 야오로즈계를 구성하는 어떤 종족에도 속하지 않았다. 주야장천 늘 홀로 지내는 존재이되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악령과 혼자 힘으로는 맞서지 못하나 그가 없이는 영걸들이 결코 싸울 수 없었다. 독신들에게 영걸이란 세상에 오로지 하나뿐인 존재였고, 영걸에게도 독신이란 특별한 존재였다. 저마다의 애칭을 만들어 독신을 부르기도 하고, 독신 역시 그에 화답하듯 수십 명- 족히 백 명은 되어 보이는 영걸들의 기호에 맞추어 손수 선물을 준비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역시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독신은 줄곧 영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감사를 전하기 위해 단것을 주는 날이라고 했던가. 한 명 한 명의 영걸에게 각자가 좋아하는 달콤한 선물을 주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독신이 이상하리만치 야속해지는 하루였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곡식 줄기를 뱉어버렸다. 창세신의 하나이며 주조의 신이자 약제의 신이며 온천의 신이라는 다소 과중한 업무를 안고 있는 중요한 신이면 무얼 하는가. 저 스스로도 이해가지 않을 만큼 치밀어 오르는 질투심에 가슴 한 구석이 콕콕 쓰렸다.


평소에는 잘도 곁에 당번으로 두더니, 오늘만큼은 눈에도 안 보이나보네, 두목.


치졸하게 굴고 싶지 않은 동시에 가슴이 좁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독신을 향해 진득한 눈빛을 보내는 데 혈안이 된 다른 영걸들에 비해 작은 체구도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독신 앞에서만 그랬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부터가 달갑지 않았지만 저의 체구에 대한 이야기가 독신 앞에서 언급된다면, 그는 화자의 면상을 갈겨버리고 싶어했다. 병이라면 병이고, 들끓는 감정이라면 감정이었다.


야아, 봇치쨩, 고마워.


들으라는 것인지, 일부러 이쪽을 의식하는 듯 더욱 커다랗게 귓전을 때리는 목소리가 묘하게 짜증을 돋운다. 독신과 다른 녀석들을 가로막고 싶다, 내게 바쳐진 신사에 잡아두곤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저 몸을 움직이게 하고 싶다-. 온갖 생각이 술을 타고 가슴 속으로 삼켜졌다. 본전에 선 그에게 떠오르는 생각들은 땅거미가 내려앉아 깊은 밤이 되도록 가라앉을 줄 몰랐다. 그래, 야오로즈계를 어지럽히는 악령들만 영영 사라진다면, 눈앞의 독신을 영원히 붙잡아서.


히코.

스쿠나히코.

그의 의장처럼 검은 피가 뿜어져 나올 때쯤에야 독신은 어느 날 한 번 보고는 다시는 잊을 수 없는 하늘을 닮은 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얼굴빛을 꾸미곤 왁, 큰소리를 내며 상대를 놀렸다. 아하하하, 유쾌하게 한바탕 웃고 나서야 그는 마음을 풀었다.


무슨 일이야, 두목. 한 잔 할까?

그건 아니야.

그럼, 한 병은 어때?

술 마시러 온 거 아냐.

피곤해서 놀 기분이 아닌가? 그럼, 따뜻하게 온천에라도 들어갈까.

그만하고 이거 받아.


영걸의 눈에는 더이상 장난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종일 당신을 기다려온 내게 간식만으로 끝낼 수 있을 것 같냐는 눈빛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영걸은 상대방이 제 손에 쥐어준 초콜릿의 포장지를 이로 물어뜯고는 독신의 입에 밀어넣었다. 저에게 가장 늦게 찾아온 독신의 입 안에 퍼지는 술과 초콜릿의 향연은 주조를 담당하는 신인 그에게도 퍽 향기로웠다. 하나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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