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오면 꺼질 리 없는 촛불을 입으로 불어 끄고, 새벽이 오면 쏟아지는 햇볕 아래에서 눈을 뜬다. 만약을 대비해 야경꾼들이 돌아다니는 밤 사이, 그는 큰 손으로 작은 아이의 눈을 가렸다.
눈을 뜬 곳은, 그래. 그렇게 좋아하던 것들을 잔뜩 늘어놓은 듯한 대저택.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작은 아이를 위한 단 하나뿐인 세상.
하지만 아이는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왜일까.
수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채워놓은 저택에서 무엇이 부족하기에 저 작은 아이는 기뻐하지 않는 걸까. 이 커다란 새장 안에 부족함이라곤 없을 터인데. 기뻐해 마지않아야 할 시나리오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똑, 똑, 똑.
들어오도록.
차도는?
아직 없더군.
그래?
시리도록 푸른 눈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봉황의 눈과 푸른 용의 눈이 맞닿았다 떨어졌다.
직접 보는 건 여전히 허락하지 않겠지?
당연한 이야기를.
아쉽게 됐군 그래.
네가 아쉬울 것이 무엇이 있느냐며 그는 상대방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상대방은 그야말로 일에 있어서는 프로였다. 그에게 맡기면 작은 아이의 마음도 열 수 있겠지만, 그 마음을 온전하게 혼자만 갖고 싶다면 역시 욕심이었을까.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면, 차선책도 있겠지만, 그건 당신이 선호할 것 같진 않군.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하는 상대의 눈빛은 여전히 읽기 어려웠다. 그는 조심스럽게 선글라스를 고쳐썼다. 이글거리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는 짙은 색의 안경이 무엇보다 제격이었다.
차선책이라 함은?
글쎄. 맞춰 보겠나?
실없이 농담하지 말고.
으하하, 글쎄. 무엇이 좋을까.
마치 카드놀이에서 버릴 카드를 고르듯, 체스를 두며 다음 수를 생각하듯 상대방은 재미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면에서는 참 악동 같기도 한 자였다. 그 의중을 읽기란 생각보다 어렵기도 했고.
작은 고기가 도망치려고 한다면, 헤엄치는 방향을 이쪽으로 돌리면 될 일이 아닌가.
잘해 보라고. 짧은 방문을 마친 손님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작은 고기보다는 작은 새가 어울리지 않나, 생각하던 그는 시계를 보았다. 곧 작은 새의 식사 시간이군. 모이를 준비해야 했다.
*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방문 너머를 향해 그는 가볍게 노크하고 들어갔다. 문을 열고, 스튜를 올린 쟁반을 한 손에 들고 저벅저벅 침상 옆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셋, 둘, 하나. 여전히 인형처럼 침상에 누운 채 미동도 않은 얼굴을 본다. 처음 데려올 때와 다를 바 없는 백옥같은 얼굴에 내려앉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잘 잤니.
처음 이 새장에 작은 새를 데려왔을 때처럼 그는 조심스럽게 눈꺼풀 위로 입을 맞춘다. 그야말로 고요하다. 벽면의 투명한 창으로 햇살이 총총 발걸음을 흩뿌리고, 먼지 한 톨마저 춤추지 않는 파장의 공기는 숨막힐 듯 조용했다. 눈꺼풀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한 방울 눈물 소리마저도 들릴 것처럼.
조심스럽게 눈을 뜬 은빛 홍채가 투명하게 느껴졌다. 어디에도 시선을 두지 않는 듯한 모습이 더욱 그의 속을 달게 했다. 갖고 싶어 했던 모든 것을 새장 안에 두었는데 날개가 꺾인 듯한 표정은 그의 속을 타게 했다.
‘방향을 이쪽으로 돌리면 될 일이 아닌가?’
왜 저 투명하고 푸르게까지 보일 은빛을 보면서 퍼뜩 그의 말이 떠오른 걸까. 찾아올 때마다 매번 작은 새의 안부부터 묻는 그는, 역시 그답지 않았다. 어째선지 그가 추구하는 비즈니스의 방향에서 조타가 약간은 벗어난 느낌이었다.
차도를 묻는 표정에서 미세한 낌새를 발견했어야 했나? 퍼뜩 드는 생각이었다. 혹시, 그 역시 공평한 조건에서였다면 이 아이를 낚아챌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상념이 끝도 없이 이어지려는 것을 그는 고개를 흔들고 끊어냈다.
지금에 있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 자그마한 새장 속에 작은 새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도 손을 뻗지 못하게 만들어둔 이 작은 새장 속에 작은 새가 들어있기에 그는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자, 코토리.
인자한 목소리가 작은 새의 귀를 간질였다.
잠깐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란다.
갓 조리한 스튜의 먹음직스러운 향기가 코를 스쳤지만 작은 새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마치 그렇게 하면 언젠가처럼 모두가 함께했던 날로 되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듯이.
한 올 한 올 씨실과 날실이 엮이듯 겹친 시간이 사람에게는 꽤 길어졌을 테다. 어떤 의미로는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물건에 깃든 그들에게 이번 대의 주인의 존재란 무엇인가? 묻는다면 단연코 사랑이라고 말할 것이다. 자신이 깃들 수 있게 해준 존재에 대한 사랑. 사랑이란 감정이 얼마나 넓고 깊은 줄 안다면, 단순한 애정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옷도 마찬가지다. 무늬 없이 단순하게 짜는 경우에도 한 필 너비에 꼬박 사흘 밤낮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옷에 깃든 나날은 꼬박 며칠일까? 글쎄. ‘너’를 생각하며 짜낸 날을 생각하면, 못해도 나흘의 어려운 발걸음을 떼었던 그때부터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그래. 세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으니 그만두는 것이 옳을지도.
어쨌든, 한 필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 옷 짓기였다. ‘너’를 위한 치맛단만 하더라도 이미 꼬박 열 필이 대수일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를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이후로 오직 여기에만 매달렸으니 이미 간 시간, 이미 들은 품은 어지간한 인간의 인내심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순백의 원단 위로 잔무늬를 수놓은 레이스를 얹어 본다. 이 레이스를 올릴지, 저 레이스를 올릴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명색이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날의 의상이거늘 뭐 하나 빠지고 싶지 않은 것이 그의 마음이었다.
고개를 젓는다.
또 다른 레이스 원단을 한 마씩 끊어 와서는 대어 본다.
다시 고개를 젓는다.
어떤 원단이 가장 어울릴까, 수없이 고민하고 요구사항을 원단 시장에 나간 다른 남사에게 전달한다.
시중에 만들어진 레이스란 레이스는 다 덧대어 보고 날 지경이 되어서야 하나를 골라낸다.
하얗게 드리운 드레스 자락 위로 조심스럽게 레이스를 덧대어 본다. 품위있고 묵직하게 떨어지는 모습이 이 본성을 호령하는 ‘너’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야 그는 바늘을 들었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청록빛의 눈동자가 꼼꼼하게 레이스를 덧대어 바느질한다.
조금의 질투도, 조금의 자만도 섞여서는 안 되는 바느질. 자칫 딴생각에 손이 흔들려서 손이라도 찌르면 핏방울이 남을 것이오, 자칫 딴생각에 손이 미끄러지면 바느질 땀을 다시 짜야 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특기임에도 어떤 상념도 섞지 않고 눈앞의 편물에만 온전히 집중했다. 자신의 손으로 피워낸 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한 땀이 열 땀이 되고, 열 땀이 백 땀이 되었다. 천의무봉이라고 했던가? 선녀가 만든 옷에는 꿰맨 자국도 없다지. 이 옷이 완전무결하여 흠이 없다―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만큼의 공력을 온전히 가져다 쏟아놓았다고 할 수는 있었다.
완성된 드레스는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올 정도였다. 드디어 하나를 맺었구나. 그는 조수를 불러 주인의 내방을 청했다. 한 시진 정도 지나서 작업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발걸음. 이 향기. 그리고 이 무게감. 본성의 주인이었다.
무슨 일이야, ―? 이 시간에 나를 다 부르고?
인생의 모든 고민을 날려버린 듯한 탁 트인 표정을 하고 ‘너’가 들어온다. 고민이 있으면 안 되지. 이렇게 사랑스러운,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의 주인공이 될 너인데. 그런 표정을 짓게 했더라면, 내가 제일 먼저 나서서 저 자를 용서하지 않았을 거였단다, 같은 말은 한 숨에 삼켜 버리곤 자신조차 들뜬 듯한,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한 번 입어보지 않겠니?
그는 자신의 몸으로 가리고 있던 의상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조수였던 코테기리 외에는 그 누구도 보여주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맑은 우윳빛의 부드러운 옷감 위로 한 치의 틀어짐도 없는 레이스가 촘촘하게 덮여 있었다. 짜내기 기법을 사용한 등 뒤의 모습도, ‘그’의 의상과 맞춘 붉은 안감도,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우아하고 단정했다.
정말 입어봐도 돼?
그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를 위한 의상인데, 입어봐야지?
고도의 집중을 쏟아내어 옷을 만들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그는 말했다.
옷시중은 제가 들게요.
아니, 내가 직접 드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바꾸어야 할 요소가 있을 지도 모르니.
그러면 분부대로.
코테기리 고우를 ‘그 자’와 함께 내보내놓고, 그는 옆방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는 데 자기가 보고 있으면 불편할 것이 걸려서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옷자락의 사락거리는 소리도 멎었다. 그리고, 주인이 그를 불렀다.
―. 이렇게 입는 거 맞지?
수줍게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우아한 걸음으로 나왔다. 그가 생각했던 모습 그대로의 신부를 보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지, 이것은 ‘그 자’조차도 가질 수 없는 온전한, 첫 검이기에 가질 수 있는 특권일 게 분명했다.
움직이는 데 불편함은 없니?
음…. 없는 것 같아.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새신부가 될 주인의 머리카락을 틀어올렸다. 그리고 등 부분의 끈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겨 매듭을 묶었다. 손길 하나하나, 섬세하지 않은 구석은 없었다.
그의 시선이 조심스레 어깨선을 훑었다. 어떻게 보면, 이 조그마한 어깨에 진 책임이 참으로 무겁게 느껴졌을 텐데.
― 상념은 거기까지 하지.
마음의 소리가 울렸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는 것은 금물이었다. 알고 있었다.
* * *
하객들의 박수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피로연이 시작되고, 신랑과 신부는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짧은 여행을 떠났다. 간만의 휴가, 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또다른 시작과도 같은 봄의 끝자락이었다.
5월의 신부.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인가. 그는 그보다 더 환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그 자’와 팔짱을 끼던 자신의 주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주인이 기념이라며 제작해준 명패를 보았다. ‘사니와 직무대행 겸 가장 명예로운 초기도’.
하하하, 이거야 원….
갑작스럽게 조회 시간에 결혼을 발표할 때만 하더라도 펄펄 뛰고 싶은 심정이었건만, 깔끔하게 모든 집무 환경까지 조성해 주고 여행을 떠나던 주인의 햇살 같은 미소를 생각하니 그것도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 차라리 그 얼굴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런 갈등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행복한 까닭은, 네 탓이겠지.
카센 카네사다는 집무실에 마련된 주인의 자리를 비워놓고 옆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도, 마지막에 돌아올 곳은 자신이라는 생각으로.
버석버석한 모래알이 입안을 구른다면 이런 느낌일까? 까끌한 모래를 한 숟갈 가득 퍼서 먹은 것처럼 입맛이 썼다. 쌉싸름한 초콜릿의 맛이라면 일말의 달콤함이 찝찝함을 눌러주련만, 모래알을 가득 머금은 것처럼 굴러다니는 돌조각의 맛은 껄끄럽게 쌉싸름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오늘도인가.
도요 이치몬지는 까무룩 잠들었다가 깃털의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는 옆자리를 살짝 쓸어보며 일어났다. 잠들러 들어갈 때는 함께였음이 분명했는데 지금은 바람 한 자락만이 자리에 있었다. 그는 정신이 들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시간에 주인이 가 있을 만한 곳은 딱 한 군데였으니 그리로 가면 주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주인의 집무실 앞에는 너른 공터가 있다. 그곳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도요 이치몬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이렇게 모두가 잠든 시간의 적막함을 안은 하늘이라면, 모든 은총을 흩뿌려놓은 하늘이라면 반려의 시선이 잠시 옮겨가 있을 만도 했다.
그는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집무실의 툇마루를 찾아갔다. 밤의 공기는 서늘했다. 아직은 바람마저 뜨겁지 않아서인가, 콧대 위를 흐르는 공기에 은은한 반려의 향기가 녹아 있었다.
이쪽이군.
그는 방향을 올곧게 잡고 점차 빨라지는 걸음으로 반려의 곁에 섰다. 조용히 곁을 빠져나간 주인의 양어깨에는 싸늘한 새벽별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깔끔한 손길로 가져온 담요를 덮어 주곤 옆자리에 앉았다.
그의 어깨에 깃털의 무게가 실렸다. 자연스레 그는 팔을 뻗어 주인을 감쌌다. 작은 새의 무게가 폭신하게 품으로 들어왔다. 짧은 새벽은 두 개의 그림자를 하나로 묶어놓았다.
어라….
혼마루의 주인이 눈을 떴다. 분명히 툇마루의 별이 총총 뜬 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익숙한 향이 코끝에 가득 퍼지며 따뜻한 실내였다.
일어났나, 허니.
잠에서 깬 지 오래된 것만 같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어쩌면 새벽 별밭의 아름다움은 그가 선사해준 것일지도.
생의 반려가 있는 자만이 아는 것. 깊은 밤에 함께 잠에 들어 있다가 깨었을 때 상대방에게서만 느껴지는 달콤한 향기. 어쩌면 그렇기에 사람은, 사람의 형체를 한 것은 매일같이 사랑하는 상대와 함께 잠에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잠들어버린 깊은 고요의 시간 속에서 나른하게 눈을 뜨고 사랑을 속삭이다가 까무룩 잠드는 상대방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는 것은 서로의 영원을 약속한 사이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도 그는 전장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필요한 소독 과정을 거치고 혼마루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별채에 들었다. 미궁과 같은 이 혼마루의 심장부, 생의 반려가 있는 곳이었다. 화려한 의장과 머리카락에 튄 시간역행군의 흔적은 떨어냈다. 보고를 겸하는 자리기에 말쑥한 모습으로 제 주인을 대하고 싶었던 그는 외적인 모습에도 신경을 쓰곤 했다. 오죽하면 자신의 모습을 ‘화려함과 실용성의 절충안’이라고 하겠는가.
혼마루의 주인은 오늘의 임무와 전공에 대한 보고를 듣고, 원정을 나갔던 도검남사들의 보고서와 획득한 자원 수량을 일일이 대조하고 있었다. 시재는 정확해야지. 암. 굳이 ‘보고서의 확인은 끝까지’라는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주인과 다른 도검남사들은 늘 획득량은 정확하게 보고하고 정확하게 자원을 관리해 왔었다. 해이해질 때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 지루함을 견디고 우직하게 자신이 갈 길을 가고 있는 주인을 그는 기꺼이 여겼다.
돌아왔다.
잘 보관되고 있는 도장의 수와 새로 만들 도장의 수를 어림하는 것이 끝나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는 기척을 내었다. 일에 얼마나 집중했는지 또로록 땀방울이 한 방울 떨어지는 주인의 얼굴을 보며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일에 열심인 것, 자신을 볼 때의 표정이 다른 남사들을 대할 때와는 다른 것, 방긋 웃을 때 앞니가 살짝 드러나게 웃는 것, 그 모든 것이 도요 이치몬지라는 개인에게 얼마나 큰 파문을 가져다 주는지, 주인으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셋, 둘, 하나, 그리고 ― 와락.
우아하고 귀여운 종달새 한 마리가 미뉴엣을 추듯 팔랑팔랑 다가와선 폭 그의 품에 안긴다. 당신의 판단을 믿지만, 역시 전장에 나가는 건 걱정이 앞서. 살그머니 사랑스러운 고백을 하곤 그의 손에 뺨을 비비는 것이 영락없는 종달새다. 이 사랑스러움에 홀딱 반해 연서를 남기고 달빛 환히 비추는 밤에 불러내어 주인을 유혹했었다. 지금은 이제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이 생의 주인이고, 이 생의 반려인 나의 주인. 그런 주인과 남은 하루는 나태하게 보내도 좋을 성싶었다.
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는 동안 그의 아내는 피곤했는지 무릎 위에 앉아 그에게 몸을 온전히 기대고 있었다. 오늘의 야경은 경험치가 쌓일 대로 쌓인 단도 남사들이었으니 가벼운 전투 정도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도 문제가 없을 정도, 까지 생각이 뻗치자 조금은 나른해진 그는 읽던 책을 옆으로 밀어두곤 제 반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귀 끝이 붉어졌다. 아직 신혼은 신혼인가 보군. 그는 양팔로 아내를 익숙하게 받쳐 안았다. 한 팔로도 충분하지만, 역시 소중하게 대한다는 모습은 양팔로 받쳐 안는 것이 어울렸다.
흰색의 실크 가운과 회색의 와플무늬 가운이 겹쳐지고 둘은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으면서도, 누구보다도 더욱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담은 꿈을 꾸며.
― 으음.
오늘도인가. 품 안의 반려가 뒤척이는 느낌에 그는 기민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제 주인이 깊이 잠들지 못하는 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로 별채의 온도를 서늘하게 유지하고,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꼭꼭 막아두고, 침대 매트리스를 바꾸어도 보고, 이불도 이것저것 바꾸어 보았었다. 하지만 특정 시간만 되면 뒤척이는 잠버릇은 쉬이 바뀌지 않았다. 아마도, 먼 옛날에 있었던 일 때문이겠거니―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제 반려를 토닥였다. 당신이 잃은 것조차 잃었다는 사실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행복하게 해주겠노라고 다짐하며.
사랑스러운 아내가 뒤척이다 보면 옷매무새가 흐트러지는 일도 잦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손끝이 아내의 앞섶을 여며주다가 맨가슴에 닿았다.
―.
한순간 그의 가슴이 철렁했다.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보드랍고 말캉한 것에 닿자 순간 이성에 전기가 오른 듯 짜릿했다. 붙어버린 듯이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잠자리를 안 가진 것도 아닌데 이 정도에 자극받다니, 내가 제정신인가? 때 아닌 밤중에 그는 가슴 속으로 경을 외기 시작했다. 이 뜨겁고 저릿한 감정을 평온하게 잡아내려 줄 것이라면 무엇이든 괜찮았다.
이거야 원….
홧홧하니 낯익지만은 않은 감정이 속에서부터 치밀어올랐다. 사실 더 말할 것도 없이 이 뜨거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알았다. 풀어내기가 곤란한 것일 뿐이었다. 명색이 신위에 선 자가 이런 욕정 하나 다스리지 못해서야 실격이 따로 없을 일이었다. 아내를 대하는 좋은 자세도 아니었다.
그는 괜스레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가 그러하듯 아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보드라운 가운 뒤에서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향은, 오로지 그이기에 맡을 수 있는 향내음이었다. 굳이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반려에게서 나는 그만의 향기. 어떻게 보아도 자신의 머리보다 그렇게 크지 않은 품에 그는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 무엇보다도 자신을 살아있게 만드는, 도생 전부를 걸고 싶게 한 향이 코를 타고, 온 감각을 적셨다.
…뭐…해?
너무나도 강렬한 뜨거움이어서였을까. 어느새 그의 반려는 반쯤 졸린 눈을 뜨고 그의 머리를 마주안고 토닥이고 있었다. 그 짧은 한마디의 파괴력은 너무나도 강했다. 그는 반려의 품에서 얼굴을 떼지 않았다. 그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곤 옷깃을 살짝 헤쳤다. 이 숨결의 행방에 주인이 있다면, 그 주인은 언제까지고 자신의 아내일 터였다.
심해와 구분할 수 없는 하늘에 총총 뜬 별이 박혀 있다. 오늘도 이렇게 저무는구나, 발길을 내딛어 일터의 밖으로 나오니 낯익은 번호판을 단 차가 한 대 섰다. ―의 얼굴이 환해진다. 종일 기대해 마지않던 귀가 시간, 그 귀가의 끝을 담당하는 사랑스러운 나의 남편, 사랑스러운 나의 달링,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그이가 직접 데리러 온 날.
매끈하게 빠진 유선형의 작지 않은 세단 앞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그이가 내려와 빠르게 걸어온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그리고 제로. 넓고 시원한 보폭으로 다섯 걸음만에 다가온 그이의 품에 냅다 안겨버린다. 오늘도 수고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저 꼭 마주안아주는 것이 그이의 인사이다. 힘이 들어간 손이 날이 갈수록 더욱 믿음직하다.
그럼, 돌아가 볼까.
출장을 가더라도 어떻게든 내 퇴근 시간에는 맞춰 기다리는 그가 놀랍고 고마워서 어떤 답례가 좋을까, 고민도 했지만 그이는 늘 자신이 좋아서 그렇게 하는 일이라고만 한다.
크고 투박해보이지만 잘 관리받은 손이 차 문을 잡아당겨 연다. 부드럽게 열린 차의 조수석은 늘 내 차지다. 피곤할 테니 따끈따끈하게 데워놓은 좌석 위로 앉으면 그의 손이 딱 알맞게 안전벨트를 매어 주고는 무릎담요를 덮어 준다. 부스러기 떨어지지 않는 가벼운 사탕들도 손닿는 데 자리하고 있다.
쪽.
높은 자리에 있다 보면 자기도 여러 일에 시달릴 텐데 오로지 사랑만으로 데리러 오는 그이의 모습에 고마움을 느낀 것은 오늘 하루만이 아니다. 그렇기에 서슴지 않고 애정표현을 할 수 있는 걸지도.
뺨에 연하게 립스틱 자국이 남자 그는 훗, 하고 웃었다. 살짝 눈을 내리감은 모습에 한 번 더, 반대쪽에도 하고 싶었지만 일단 도로를 점거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집에 돌아가야 하겠지.
속 썩이는 클라이언트는 없는지, 여전히 ‘그 일’에 생각은 있는지, 나오고 나서는 어떤 생각이 있는지, 그는 제 아내에게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물었다. 작은 새처럼 지저귀던 아내가 어느샌가 조용했다. 차를 멈춘 틈을 타 옆을 보니 살풋 잠든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꽤 피곤했나 보군, 그는 에어 컨디셔너를 조작해 편히 잠드는 데 최적의 온도를 맞추고 미끄러지듯이 운전했다.
* * *
차고에 차를 세울 때까지 아내는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보통 피곤했던 날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아침에 나가서 밤에 돌아오는 날이면 피로가 쌓이고도 남지. 그는 조심스럽게 차 문을 닫고 반대편으로 돌아가 문을 열고, 안전벨트를 풀고, 양팔로 아내를 안아들었다. 어디 부딪히기라고 할까, 조심스럽게 안아들고 현관을 열고 들어가 복도를 지나 침실의 문을 열었다. 고풍스럽기보다는 단정하게 꾸며 놓은 단순한 구조의 침실에 조심스럽게 제 사랑을 눕혀놓았다.
그는 문득 거울을 보았다. 차에 탔을 때 살포시 뺨에 남긴 키스가 수줍은 사과의 뺨처럼 물들어 있었다. 자각하고 나니 빙그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아내의 화장품들 사이에서 클렌징 워터와 화장솜을 몇 장 골라냈다. 화장솜에 클렌징 워터를 두어 번 펌프질해 적시곤 조심스럽게 눕힌 아내에게 다가가 화장을 지워주었다. 화려하게 꾸미고 일을 가는 모습도 사랑스럽지만, 화장이 지워진 모습도 이목구비가 또렷하니 아름다웠다. 잘 관리해 윤기 나는 머리카락도 다시 한번 쓸어보고, 예쁘게 관리한 손 끝에 입도 맞추어 보았다.
…달링?
단잠에서 깬 아내의 잠긴 목소리는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는 활짝 웃으며 눈을 맞추었다.
그럼, 허니. 집에 왔으니 오늘은 무엇부터 할 텐가?
목욕, 티 타임, 아니면 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입모양을 보던 아내는 일어나 앉아 그의 품에 기댔다.
* 사니와 설정 등등을 빌려주신 솜님@uni_s_aria, 요지경님@abcd07m26d 타카@tkkn_kr 하리님@harisenbon9 아키라님 @D4WN_4_U 을 비롯해 청첩장을 받아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마지막의 가사는 Blackstar~theater Starless~의 곡 Beloved에서 인용했습니다.
*
Amazing! 역시 내 피앙세로군.
익살맞은 억양의 감탄사와 함께 귀에 꽃피는 말은 그의 감탄사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를 보아도 단 한 치의 모자람도 없이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누구의 눈에도 아름답고 당당해 보였다. 물살을 가르고 하늘로 오르는 한 마리 당당한 용이라도 될 것 같은 영물 비단잉어의 색을 꼭 빼닮은 머리칼을 살짝 묶어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두상까지도 심미적라는 말이 어울린다면 할 말을 다 하지 않았겠는가.
자, 자, 신부 감상은 여기까지. 신랑은 들어오면 안 돼.
깜찍하게 하얀 리본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한 미다레 토시로가 신랑을 밀어냈다.
아직 꾸미는 중이니까 본식 때나 보라고.
여기서 더 Beautiful해지면-.
아침까지도 함께 계시지 않으셨나요.
아니, 알았다. 알았다고.
아무래도 수행을 다녀온 단도의 진심을 다한 밀어내기를 이기는 어려웠는지 문 밖으로 그가 사라졌다. 하여간 팔불출이라니까. 신부 메이크업을 맡은 카슈 키요미츠가 가볍게 눈을 흘기고는 다시 하던 일로 돌아왔다.
주인, 주인 눈에서 눈물 나게 할 것 같은 놈은 아니겠지만, 정말 괜찮겠어?
주인이라고 불린 신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그렇게 신중하던 주인이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가는 건 말이지, 역시, 좀….
더 하실 말씀이시라도?
카슈 키요미츠의 투정 섞인 말은 주인의 깔끔한 손톱을 화려하게 꾸미던 쿄고쿠 마사무네에 의해 막혔다. 카슈 키요미츠는 한 번 으쓱하고는 주인을 꾸미는 데 다시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
혼마루는 새벽부터 소란스러웠다. 주인의 취임 10주년도 곧이었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큰 경사를 준비하고 있어서일지도 몰랐다. 도검남사들은 시간정부로부터 미리 배정받은 부지에 원탁을 놓는다거나 의자를 배치하고 붉은 융단을 길게 깔고 손님 명단을 다시 확인하고 분주하게 보내고 있었다. 흰 장미와 백합을 필두로 축복과 행복의 의미를 지닌 꽃들은 후쿠시마 미츠타다의 손에 의해 곳곳에 장식되어 자태를 뽐내고, 각자의 역할을 맞춰보는 도검남사들도 여럿 있었다.
다른 도검남사들이 바삐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던 그림자 하나가 슥 빠져나가서는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등 뒤로 희고 검은 머리칼이 휘날렸다.
*
똑똑똑.
네에, 신랑이 아니시면 들어와도 된답니다~. 주인님 준비 끝났어.
신랑 아니야. 그럼 실례―.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벙찐 표정으로 신부를 보았다. 마치 몇백 년 일생에서도 그보다 심미적인 것은 본 적 없었다는 듯이.
…히메츠루?
자신의 이름이 불린 그의 낯이 다시 평소처럼 돌아왔다. 푸른 빙하가 굳어 만들어진 듯한 눈이 슬쩍 감겼다가 떠졌다.
잠깐 할 말이 있는데에.
평소처럼 말을 살짝 늘이며 그가 말했다. 카슈 키요미츠와 쿄고쿠 마사무네, 그리고 미다레 토시로의 시선도 신부에게 향했다. 신부는 엷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없어. 잠깐 바깥 공기라도 쐬고 올래?
문가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응응. 히메츠루, 5분이면 충분하지?
남을지도 모르고오.
신부 곁을 지키던 세 도검남사가 자리를 비우자 신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단둘이 하고 싶은 말이라면…역시 그거야?
히메츠루 이치몬지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역시 난 이 결혼은 마음에 들지 않아.
신부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지금이라도 멈출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건 주인인 네가 행복해진다고 생각해서야.
정말이지….
조금이라도 마음이 바뀌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널 데리고 나갈 수도 있어.
그럴 리 없다는 것 알고 있어서 하는 말이지?
여전하구나아.
히메츠루 이치몬지는 몸을 신부 쪽으로 숙였다.
아프지 마.
신부는 정말 그를 무리라고 생각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렇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신경써줘서 고마워.
그럼, 이만. …오늘 참 예쁘네에.
히메츠루 이치몬지가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나갔다. 이윽고 밖에서 기다리던 세 도검남사가 들어왔다.
주인님, 별일 없으셨나요?
별일이라고 할 게 뭐 있을 리가. 그는 언제나의 히메츠루 이치몬지인걸.
그렇군요….
*
주인.
식장의 장식을 마쳤는지 후쿠시마 미츠타다가 대기실에 들어왔다. 잘 빗어넘겨 하나로 묶은 끝이 붉은 푸른 머리카락이 찰랑였다. 꽃을 돌보는 취미를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며 너스레를 떠는 훤칠한 키의 남자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것을 꺼넀다.
와아.
그가 가져온 것은 신부의 부케였다. 가장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들만 골라서 다듬고 다듬어 만든 부케는 천상에서 갓 내려와 축복을 전하는 아기천사의 날개처럼 보드랍고 사랑스러운 자태를 갖고 있었다.
우리 아름다운 신부님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치지만 말야.
겸손을 떠는 그에게 신부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부케라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주인님~ 한 번 일어나 봐.
어느새 미다레 토시로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후쿠시마 미츠타다는 신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거들었다. 에스코트는 익숙하다는 듯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신부의 치맛자락 등을 손쉽게 정리해 주곤 온전히 카메라에 신부만 담길 수 있게 자리를 옮겼다.
미다레 토시로의 셔터 소리가 여러 차례 울렸다. 평소에 사진을 찍는 건 내켜하지 않던 신부도 오늘만큼은 이 포즈 저 포즈를 즐겁게 취했다.
*
들어오세요.
카슈 키요미츠의 목소리가 들리고, 방문객들이 하나둘씩 신부 대기실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스스럼없이 신부를 언니라고 칭하는 이웃 사니와도 있었고, 이렇게 먼저 결혼해버리면 나는 외로워서 어떡하냐며 거짓 울음을 울며 장난치는 이웃 사니와도 있었다.
*
밖에서도 손님맞이가 한창이었다. 취임한 이래로 10년 가까이 혼마루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시간정부 직원부터 종종 만나곤 하는 이웃 사니와들과 그들이 호위로 대동한 도검남사까지 상당한 숫자의 사람, 혹은 사람 모습을 한 하객들이 모여 있었다.
신부 대기실에서 나온 이웃 사니와와 호위 역의 도검남사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앉았다. 신부 측, 신랑 측을 따로 두지 않고 6인석 원탁을 배치해 놓은 자리가 모자람 없이 들어찼다. 신부 측에게는 낯선 이들도 여럿 있었다. 아마도 신랑 측 손님인 듯해 보였다. 아마도 평소 외출해서 만나는 비즈니스 파트너겠거니 싶었다.
아, 아.
훤칠하게 차려입은 카센 카네사다가 사회자 자리에 서선 마이크를 잡았다. 여느 때보다 더욱 온화해진 표정의 카센 카네사다는 유려한 목소리로 하객들 모두에게 자리에 착석하길 바란다는 말을 했다. 하객석이 분주했다. 본성의 도검남사들도 각자의 자리에 착석하고, 신부 대기실에 다녀온 하객들도 각자의 명패가 자리한 곳에 앉았다.
*
도요 이치몬지는 신랑 입장 대기줄보다 조금 더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본성에 몸을 의탁하게 된 순가부터 지금까지의 시시각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일과의 시작과 끝에 언제나 내가 있기를 바란다고 다소 침착하지 못하게 고백했던 날도, 나의 마지막이 당신이기를 바란다는 말로 프로포즈했던 날까지도 선명하게 기억 속에서 피어났다.
산들산들 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향긋한 장미와 백합 향이 자연 속의 라일락과 아카시아와 섞여 들어왔다.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신부를 꼭 빼닮은 아름다운 날이었다. 아름다운 꽃향기, 선명한 물빛의 하늘, 솜털 보송한 토끼 같은 공기까지 무엇 하나 ‘여생의 주인’을 닮지 않은 것이 없는 하루였다.
결혼. 일생의 언약. 나의 남은 생을 너의 남은 생과 하나 되어 살아가겠다는 약속을 나누는 일. 그런 일에 시큰둥했던 과거의 자신은 과거의 유산으로 죽어 없어지는 날. 그런 날이 성큼성큼 다가와 문을 열었다.
신랑 입장이 있겠습니다.
카센 카네사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꽃문을 지나 신부의 손을 잡으면, 반지를 나누면, 하객들 앞에서 충실히 당신과 미래를 함께하겠다고 약속하면, 서약은 성립된다. 무엇으로도 깨질 수 없게 이 약속을 단단하게 묶어버리기 위해 그는 자신 앞에 꽃으로 장식되어 있는 아치문을 건너 성큼성큼 걸었다. 특별한 관계가 되고 나서도 그러했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너무나도 당연히 모든 것은 이 생의 주인을 위해 써서 마땅한 시간이 오고 있었다.
세 걸음, 두 걸음, 한 걸음, 그리고 제로. 그는 늠름하게 주례석 앞에 섰다. 등 뒤로 싸늘한 눈빛이 여럿 느껴졌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신부는 누가 보아도 얼마든지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자신감 있게 섰다. 사회자석에서 카센 카네사다가 무어라 말하는 소리와 함께 발랄한 비트의 음악이 깔렸다. 반대편의 쭉 뻗은 카펫 위로 한 발 한 발, 신부의 드레스가 나타났다. 오, 이런. 자동으로 감탄사가 나올 만큼 햇살을 받은 신부의 모습은 눈부셨다. 언제라도 신부를 아름답지 않다 생각해본 적은 없었건만, 그의 눈에 비친 오늘의 신부는 그야말로 태양을 한 조각 강림시켜놓은 것만큼 눈부셨다. 영원히 나의 여왕님이 되어 달라며 반지 대신 선물했던 티아라에서 반사된 빛이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고, 분명히 작은 체구의 신부임에도 그 어떤 여신보다도 위엄있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당장 무릎을 꿇고 다이아몬드로 촘촘히 장식한 신발을 바치고 싶을 만큼.
꽃이 뿌려진 카펫 위로 신부가 걸어와 그의 앞에 섰다. 마법에라도 걸린 듯이 청명한 하늘 아래 오늘의 광경은 천 년이 더 지나 썩어 문드러진 칼이 되더라도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사랑스러운 신부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서 있는 완벽한 비즈니스맨을 떠올려본 적 없다면 지금에라도 떠올려보기를 바란다. 그런 그의 찰나를 끊은 것은 카센 카네사다의 목소리였다. 신랑과 신부는 나란히 미소로 눈인사를 나누고는 그의 말에 따라 주례를 향해 섰다. 한 줄기로 곱게 머리를 땋아내린 시치세이켄이 주례석에 서 있었다.
* * *
이왕이면 스몰웨딩이 좋겠는데….
피앙세가 원한다면 스몰 웨딩도 좋겠지만, 적어도 본성의 도검남사들과 피앙세의 지인들까지 더한다면 스몰 웨딩으론 끝나지 않을 것 같다만.
역시 어쩔 수 없나. 근교의 작은 교회라도 빌릴까 했거든.
평범한 인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군 그래.
그는 훗, 하고 웃었다. 본성의 식구만 백 명이 넘어가는데 스몰 웨딩은 불가능한 소리였다. 누가 하객으로 올지 다툼이라도 나면 곤란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두에게 자신의 신부임을 땅땅 못박아두고 싶은 그의 계산도 어느 정도는 섞여 있었다. 어쨌거나 본성에서 주인을 주인으로만 모시는 도검남사도 적지 않지만, 그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는 동료 겸 경쟁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동생이 스몰웨딩을 했다지?
남쪽 섬에서. 정말 작은 교회였는데…아마 당신이 들어가면 우리 둘만 하는 결혼식이 될지도 몰라.
…이 일은 나에게 맡겨 두면 안 되겠나, 피앙세.
당신 얼굴 보니까 스몰웨딩은 불가능한 것 같네. 응,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맡길게.
그의 무릎에 기대 누워서는 손을 뻗는 피앙세는 무척이나 고왔다.
* * *
…신랑은, 녹이 슬고 떨어진다 해도 신부를 사랑하겠는가?
네.
신부는?
당연한 말씀을요.
그러면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은 이들의 약속을 잘 들었는가? 이의 있는 자는 앞으로…. 그건 집어넣게.
새신랑이 된 도요 이치몬지는 ‘이의 있는 자는 앞으로’라는 시치세이켄의 말에 품에서 리볼버를 꺼내는 시늉을 했다. 하객석에 호위로 따라온 고케 카네미츠와 히메츠루 이치몬지가 자기 주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흠, 흠. 어쨌든…반지를 교환해야겠지.
목소리를 가다듬은 시치세이켄과 하객들이 보는 앞에서 둘은 서로의 왼손 약지에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를 끼워주었다.
이로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신들의 축복을 받은 두 사람의 결혼이 성사되었음을 선포한다는 말을 남기고 시치세이켄은 주례석을 떠났다. 이제는 신랑과 신부로 하나가 된 둘은 사회자의 말에 따라 하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
마지막은 결혼식 촬영이었다. 자리를 메우고 있던 이들은 각자 신부와 신랑의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새신랑인 도요 이치몬지의 키가 너무 커서, 자리를 배치하는 데 조금은 애먹었지만.
사진 촬영을 마치고 화려하게 꽃핀 부케가 신부의 손을 떠났다. 부케는 놀랍게도 다른 혼마루의 도검남사에게 떨어졌다. 보랏빛 긴 머리카락이 찰랑이는 그의 손에 부케가 잡혔다. 모두의 환호가 이어 터졌고, 부케를 잡은 하치스카 코테츠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
하객들은 하객용 원탁으로 돌아갔다. 신랑과 신부는 그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융단 위로 퇴장할 순서였다.
허니.
왜요, 달링?
도요 이치몬지는 너무나도 쉽게 신부를 양팔로 들어안았다. 이 순간을 놓치기 싫었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자신의 태양을 눈에 새기고 싶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싱그러운 향기를 품고 나부꼈다. 떠들썩한 하객석의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멀어졌다. 하루라도 모닝키스가 빠지면 서운한 사이지. 그는 마치 처음인 것처럼 입을 맞추곤 떨어졌다. 세상 어디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날은 없을 터였다.
퇴근하려고 나오는 길에 서 있는 차가 작게 경적을 울렸다. ―는 처음 보는 차이기도 해서 자신을 불렀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차를 지나쳤다.
삡.삡.
경적이 두 번 울리더니 차가 근거리까지 쫓아왔다. 말로만 듣던 납치인가? ―의 걸음이 빨라졌다. 커다란 차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지만 탁, 문 닫히는 소리에 이어 ―는 낯설지 않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얼굴 보기 힘들군.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
네가 부르지 않았나.
그야 부르긴 불렀지만. 그냥 SNS에 적은 푸념이었을 뿐인데 당신이 진짜로 등장하면 놀라지 않겠냐는 말은 삼켰다. 차에서 내린 남자 쪽에서도 할 말은 있었다. 네가 불렀으니 오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고.
늦은 시간이니 빨리 타라.
기다린다면서 본인은 안 오고?
일단 타라.
채근하듯이 그는 ―를 이끌어 차에 태웠다. 안전벨트를 채우는 것까지 돕지는 않았지만 차 문을 닫아주곤 반대편으로 돌아가 운전석에 소리없이 앉았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된 일이지, ―는 긴장감에 꿀꺽, 침을 삼키곤 곁눈질로 백미러를 들여다보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여기까지 다 오고.
….
그는 답하지 않았다. 운전할 때는 운전에 집중하는 것이 미덕이었으니까. 차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지나 쫙 뻗은 십자대로에 들어섰다. 교차로에서 그는 방향등을 오른쪽으로 켰다. 깜박깜박. 꾸벅 졸았던 ―는 방향등의 방향을 보고 잠이 확 깬 느낌을 받았다.
방향이 다르지 않아?
잠시 갈 곳이 있다.
뭐…. 당신 말대로 늦었지만, 당신이 있으니까 걱정할 일은 없겠지.
…. 피곤하다면 잠시 눈을 붙이도록.
거리, 멀어?
그렇게까지 걸리진 않을 거다.
닛코 이치몬지가 퇴근길의 ―를 데리러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른 남사의 차를 얻어 타 본 적은 있지만, 그가 직접 나왔다는 예상치 못한 사태에 이 늦은 시간-보통 퇴근 시간은 열 시가 넘었다-에 갈 곳이 있다고까지 하는 닛코 이치몬지의 말에 ―가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는 눈을 감았다. 승차감이 편안한 것도 있지만 시간을 맞춰서 틀어놓은 것처럼 등받이가 따뜻해서 사르르 졸음이 몰려오기도 했다. 꾸벅. 고개가 까딱거리는 것을 본 닛코 이치몬지는 차의 속력을 줄였다. 조금 늦게 가도 목적지까지의 시간은 삼십 분 이내였으니 거기서 조금 더 시간이 든다고 해도 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오늘 밤은 한참 남았으니.
다 왔다.
일부러 고속도로를 피해 삼십 분가량을 저속으로 운행한 닛코 이치몬지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는 느릿하니 눈을 떴다. 낯선 풍경이 눈가에 들어왔다. 차의 전조등도, 실내등도 끈 채로 어둠 속에서 눈을 뜨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어둠 속에서 더 짙게 내려앉은 그의 그림자였다.
닛코…? 여기가 어디야?
잠시 내리도록 하지.
아니, 자기 할 말만 하지 말고….
―는 눈을 끔벅이며 어둠에 익숙해져 갔다. 그림자가 가벼워졌다. 그는 차에서 내려 반대편으로 걸어왔다. 바닥에 깔린 자갈들로부터 다각다각 발소리가 전달되어 왔다. 그리고 이쪽의 문이 열렸다. 탈 때와는 다르게 그는 몸을 굽히더니 안전벨트를 직접 풀어 주었다.
순간, 뺨이 스치는 것만 같았다면 착각이었을까.
가깝게 느껴지는 향기에 순간 ―의 숨이 멈췄다. 무슨 일이지? 닛코 이치몬지의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는 언제 몸을 굽혔냐는 듯이 반듯하게 서 있었다.
―는 그를 더 기다리게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저이가 나를 데리고 꽤나 먼 곳까지 온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니 머리는 금세 맑아졌다. ―에게 지금 닥친 문제는 하나뿐이었다. 자갈 위를 로퍼힐을 신고 걸으려니 안 그래도 느릿한 걸음이 배로 느려졌다. 앞서 걸어가던 그는 이윽고 돌아와선 팔을 내밀었다. 잡아도 되는 거였구나. 단단한 그의 손목을 잡은 ―는 조심조심 중심을 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자갈밭을 지나, 나선계단을 여러 층 오르니 탁 트인 옥상이었다. 그들은 산 정상에 지어진 건물 옥상에 올라가 있었다.
……. 예쁘네.
하늘을 가리키는 닛코 이치몬지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새카만 밤하늘에 휘영청 큰 달이 떠 있었다. 저 달이 이렇게 아름답게 보일 일이던가. 큰 달의 배경처럼 아름답게 보석 박힌 밤하늘이 펼쳐진 밤은 얼마나 꿈꾸어 온 것이었던가. 저 별 중엔 아마도. 아마도.
하늘을 꿈꾸어 온 인간에게 별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고독한 존재였던가. 이 우주에서, 나와 눈이 마주친 너라는 별과 나는 언제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에게 오늘의 밤은 어릴 적 천문대에 방문해 보았던 밤하늘과 다른 바가 없었다.
고마워….
휘황찬란하게 펼쳐진 저 별빛을 보니 왜 눈물이 날까. 선연하게 펼쳐진 밤하늘이 물기로 번져갈 때쯤, 달그림자는 그로부터 ― 쪽으로 져 왔다. 저 하늘의 별빛을 다 잡아먹을 것만 같은 신도시의 밤만을 십 년 가까이 보다가 어깨를 펴고 보는 하늘의 별빛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두목께서 기다리고 계시다만.
―는 그답지 않게 말이 길다고 생각하면서 별빛이 총총대는 밤하늘 아래에 그의 얼굴에 지는 그림자로 눈길을 돌렸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기에 먼저 실례했다.
그의 안경 렌즈에 반사되는 눈빛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면, 이 또한 착각이었을까.
…한다.
앞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입모양만 달싹였다. ―가 분명하게 들은 것은 뒷말뿐이었다. ―는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이 낯설었다.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도 이렇게 따뜻하게 느껴질 일이었을까.
―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별들 때문이어서도 아니고, 달싹이는 그의 입술 탓도 아니었다. 그저, 이 밤이 가져온 어떤 낭만적인 파도가 잠시 가슴을 휩쓴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