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적인 함유가 다분합니다. 열람 주의. 

 

집무실에서는 오늘도 듣기 싫은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지난 몇 년간 그랬듯이 1월이면 주인의 혼을 쏙 빼놓는 소리가 작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주인은 그 리듬에 맞춰서 딸깍딸깍 서류를 결재했다. 그 소리 좀 어떻게 꺼줄 수 없어? 이 혼마루에 인간 남성의 목소리를 가진 것만 백여 입인데 그걸로 모자라서 그걸 굳이 스테레오로 들어야겠어? 금발의 청년은 볼멘소리로 툴툴거렸다.

 

사건의 전모야 별것 아니었다. 평소 같으면 단 이틀 라이브 행사를 하고, 일주일만 녹화 아카이브를 공개하던 게임이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2주 간격으로 다섯 날씩이나 라이브를 하고 아카이브를 열흘이나 풀어줬다는 게 문제였다.

 

평소에도 그쪽 노래 많이 듣잖아. 항상 틀어놓고 살잖아. 그걸로 부족해서 지금 이렇게 틀어놓고, 누구 속 터지게 할 일이라도 있어? 당장에라도 따지고 싶지만 어떡하겠는가. 저렇게 좋다고 할 땐 놔두어야 소심한 복수가 일어나지 않는걸. 코류 카게미츠는 근시로서 할 일을 하면서 주인을 그대로 둔 지 20일쯤이 지나자 슬슬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이코에서 소득이 따로 없었네.

항상 소득이 있으면 자기, 복권에라도 당첨될 운을 끌어다 쓴 걸걸.

어쩔 수 없지. 코류한테 빨리 찻잔 하나 선물해 주고 싶은데.

아하하, 그건 듣던 중 고마운 소리야.

 

저 소리만 아니라면 말이지. 어느새 아카이브는 흐르고 흘러 많은 사람들이 앙코르를 목이 터져라 외치는 구간까지 재생되어 있었다. 가챠! 힘찬 목소리와 함께 주인의 손가락이 다시 까딱까딱 움직였다.

 

나 잠깐만 상점가에 나갔다 올게.

, 다녀와.

주인은 코류를 선선히 내보냈다. 그리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다녀왔습니다 어라?

 

주인은 집무실에 없었다. 대충 이쯤이면 분큐 토사번에 보낸 도검들의 현황을 점검하느라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집무실에 없었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잠깐 산책이라도 갔나? 코류 카게미츠는 상점가에서 사온 조그마한 꽃다발을 들고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카이브 소리가 꺼져 있었다. 그렇다면 주인은 집무실에서 나갔다는 뜻이다.

 

헤에, 이거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내가 돌아온 자리에 없다 이거지.

 

코류 카게미츠는 성큼성큼 자기의 방으로 향했다. 주인의 별채 옆에 딱 붙어 있는 호신도의 특실. 그곳에서 주인을 놀래킬 요량이었다.

 

흐흥~~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웬일인지 집무실을 일찍 비워버린 주인이 꽤 기꺼웠다. 오늘은 어지간히 급한 사정이 아니고서는 더 이상 일도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니 오랜만에 독점해도 되겠는걸. 그는 잰걸음으로 방으로 향했다.

 

덜컥.

덜컥.

덜컥-.

 

방의 문이 안에서부터 잠겨 있었다. 이게 뭐람? 코류 카게미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문을 잠그고 나왔나? 아닌데. 나 오늘 주인 방에서 잤는데. 그럼 누가 이 문을 안에서 잠갔다는 뜻인데 누구지? 생각풍선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럴 땐 방법이 있지.

 

코류 카게미츠는 머리카락을 고정한 핀을 하나 땄다. 현대식으로 만들어진 문고리인 만큼 대충 몇 번 쑤시면 열릴 터였다. , , . 캠핑으로 다져진 손재주로 몇 번 열쇠구멍을 찌르자 탁,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어느 도둑놈인지 얼굴이나 보자, 코류는 기세등등하게 문을 열었다.

 

자기가거기서나와?

 

코류는 벙 찐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와중에 자기라고 불린 그의 주인이자 연인은 자기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상점가에 갔다가 얼마만에 올 줄 알고 이런 깜찍한 짓을.

 

맥이 탁 풀렸다. 어느 도둑놈은 어느 도둑놈이야, 네 심장 도둑놈이지, 라고 말하듯이 은빛의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니, 똑바로 쳐다본 건 상관이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 당당한 시선이 좋았던 거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거, 내 옷, 아냐?

 

얼떨떨하니 코류는 주인이 입고 있는 옷을 자각하자마자 한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툭 떨어뜨렸다. 아무리 체격차가 있기로서니 이렇게 시선을 자극적으로 유인하는 옷차림이 될 수 있는 옷이었단 말인가? 물론 저 옷을 입고 주인을 꼬신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

 

주인이 실실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당황스러워요, ‘허니’? 요즘 우리 허니가 좀 불만이 많은 것 같아서 준비해봤어.

 

유독 허니, 라는 말에 힘을 주고 한 글자 한 글자를 되새기는 주인의 얼굴을, 아니 푹 파인 가슴께를 보기 힘들었던 코류 카게미츠는 자기도 모르게 문을 닫고 잠금쇠를 걸었다. 오늘은 정말로 내일 아침 집무 시간까지 놔주지 않으리라.

 

잘 먹겠습니다, 라고 인사하면 되는 거지?

글쎄에?

 

일부러 늘려 말하면서 입꼬리를 히죽이는 것이 마음의 준비는 이미 된 것이렷다. 코류 카게미츠는 떨어뜨린 꽃다발을 주워다 주인의 품에 안겼다.

 

오늘은 곱게 안 재울 거야.

어디 한 번 해보든가, 대포 씨.

그래놓고 맨날 기절하면서, 도발하는 거예요? 어쨌든, 고마워.

 

코류 카게미츠는 주인의 허리를 한 팔로 휘어잡았다. 언제라도 이런 도발이라면 환영이었다.

* 독자적 사니와 설정 있음.

 

해가 저물어 가는 때면 혼마루에는 검은 옷이 유행한다. 아직 해가 아주 넘어가기에는 두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았지만 이 혼마루가 만들어졌을 때부터의 전통 비스무리한 것이라고 했다. 유월 초순에 한 번, 시월 말에 한 번. 검은 옷의 물결이 온 혼마루를 헤치는 시기.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시기이다. 한 도파의 장으로서의 행실이 몸에 밴 그로서도 어김없이 옷장에 묵혀 둔 검은 옷을 꺼내는 시기였다.

 

혼마루의 주인. 모두가 남성형의 육체를 가지고 깨어나는 이곳에서 유일한 홍일점이자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주인은 올해에도 작년에 입었던 검은색의 발목까지 오는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이면 제가 태어나 자란 곳의 전통복을 꺼내입는 날이 절대적으로 많은 그녀는 단정한 검은 드레스를 꺼내 옷자락을 펼쳤다.

 

올해도 그때가 왔구나. 그는 어깨에 흰 깃털 무늬가 아름답게 수놓인 기모노를 걸친 채 주인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부드러운 광택의 검은 드레스는 수수하고도 품격 있는 모양새였다. 그것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본 주인은 그에게 말을 건넸다.

 

밖에서 조금만 기다려줄래요?

코토리의 말이라면.

 

그는 근시의 지정석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이내 작은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창호에 거대하다고 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주인은 조심스레 옷의 등 지퍼를 열어 한 발 한 발을 옷 속에 넣고 양팔에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그 시절에도 이런 기분이었지, 주인은 낮게 읊조렸다. 십 년은 되어가는 이야기. 십 년은 족히 채우고도 남을, 새드 엔딩으로 끝나버린 한 편의 드라마 같던 이야기. 그 속의 비련의 여주인공. 마지막 포옹. 모든 것이 꿈 같은 이야기였다.

휘하의 남사들이 이 기간이 되면 유독 검은 옷을 많이 입는다는 것이 자신의 영향임도 알고 있었다. 십 년이 되어가는 낡은 이야기를 기억하는 자는 하나일 때보단 둘일 때, 둘보다는 넷일 때 더욱 좋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차마 내놓을 수 없는 어려운 상대도 있었다.

 

당신이 들으면 뭐라고 할까. 과거에 사로잡힌 망령과 같으니 그만 잊고 새 연인인 자신에게 충실하라고 할까, 아니면 다른 남사들이 말하는 그대로, 너를 만나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할까. 첫눈에 반해버렸다는 이야기를 나지막이 하면서도 가슴 속에 여전히 가지고 있는 바깥 세계에서의 이야기를 그는 달갑게 들어줄 수 있을까, 바깥에서 다시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상대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안은 그녀는 조심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와도 돼요.

 

방에 들어온 남자의 시선에 끝이 치렁치렁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 내의가 보였다. 그는 일말의 동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다가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지퍼를 끝까지 채워주었다.

 

코토리는 이 시기만 되면 항상 이 옷차림이군. 이유라도 있을까?

하하, 할로윈이잖아요. 기분 좀 내는 거죠, .

악령의 장난을 피하기 위한 옷차림 치고는 수수하지 않니?

뭐어혼마루에 악령 같은 게 나오겠어요? 나왔다간 베일 텐데.

 

는 수수께끼를 풀고 싶었고, ‘그녀는 들키고 싶지 않아 때아닌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그나마 이 남사가 할로윈까지만 알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멕시코에서 사흘간 기념하는 망자의 날을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그는 꼬치꼬치 캐물었을 게 분명했다.

 

’. 산쵸모는 석연찮음을 느끼고 있었다. 유월은, 특히나 유월 초는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한 달이었다. 주인, 아니 연인의 부임일이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남사들은 검은 옷을 챙겨입고 주인과 함께 어딘가를 훌쩍 다녀오곤 했다. 그 행렬에 자신은 결코 지명되지 않아왔다. 아니, 이치몬지 도파 대부분은 그 행렬에 끼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주로 취임일 축하연의 준비가 맡겨졌고, 한두 해 정도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월과 시월의 이 이상한 풍습은 이 혼마루에만 있는 광경이었고, 다른 혼마루의 동일 개체를 만났던 그는 의문을 품어왔다.

 

코토리.

?

진지하게 들어줬으면 하는구나. 지금 농담하는 게 아니란다.

 

짐짓 엄한 표정으로 늘 착용하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새빨간 맹금류의 눈이 타고 있었다. 일가의 장만이 갖는 각인에도 붉은빛이 일렁였다. 주인의 은빛 눈이 도로록 구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되는구나.

기분 탓이에요. 그냥 이 옷이 입고 싶을 때가 있는 거래도.

변명은 그쯤 하렴.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실렸다. 보통 이쯤 되면 사실대로 이야기할 법도 한데 이렇게까지 숨기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 트릭 오어 트릿! 진짜 할로윈이라니까요.

코토리.

 

이제는 정말 인내심이 끓어올랐다. 산쵸모는 주인, 아니 연인의 허리를 한 팔로 끌어당겼다. 저 공단 옷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서라도 비밀을 파헤치고 싶었다. 마지막 배려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야 알아줄까, 아주 잠깐 고민한 그는 다른 손을 뻗어 작은 새의 뒷목에 있는 지퍼를 내리곤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 ! 아파요! 뭐 하는 거야.

 

침상에서의 스킨십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도 코토리는 밀어내려고 힘을 썼다. 체구가 두 배는 차이가 나니 어떤 소용도 없는 걸 알면서도 벗어나려 애썼다.

 

이 정도는 늘 하는 스킨십이잖니. 이유를 말해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마.

말할 것 없대도.

아니, 분명히 코토리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어.

 

이야기 속의 뱀파이어 백작처럼 그는 다시 이를 세우고 목덜미에 잇자국을 남겼다. 붉은 울혈이 지는데도 코토리는 이렇다저렇다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 그러니?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이거 놔요. 놓고 얘기해요.

말하기 전까진 놓아줄 생각이 없단다.

그럼 어디 마음대로 해 봐요! 나는 말할 것 없다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

 

눈을 마주치고 낮게 속삭이는 그의 동공이 바짝 졸아들었다. 코토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에게만큼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 공포의 수위가 무섭도록 차올랐다.

* 독자적인 설정이 있습니다. 열람 주의.

 

오늘도 작은 아이는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소원을 이루어주었을 뿐인데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남자는 문신을 갸우뚱 흔들며 손도 대지 않은 쟁반을 거두었다. 쟁반 위의 그릇은 무엇 하나 차게 식지 않은 것이 없다. 뽀얀 우윳빛의 쟁반덮개 위로 먼지가 몇 알 내려앉은 것을 후, 불며 그는 답이 없을 노크를 했다. 고요했다.

 

작은 아이는 살아있다. 그야 당연하다. 그가 그렇게 느끼고 있기에 작은 아이는 몇 날 며칠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서도 멀쩡히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작은 아이를 데리고 온 곳은 특수한 곳이었으니까. 삶을 느낄 수도 있고 죽음을 감지할 수도 있었다. 다만 작은 아이는 무슨 짓을 하든 결코 죽을 수 없다 그것이 그의 세계의 규칙이었기 때문에.

 

그는 손수 양송이 크림 수프를 내다버렸다. 물에 향을 온통 빼앗긴 찻잎도 미련 없이 털어버렸다. 온기를 주변에 모두 빼앗기고 남은 액체 역시 미련없이 흘려버렸다. 저 작은 아이는 이곳에 온 이후로 단 한 번의 끼니도 먹지 않았다. 그가 바라던 모든 것을 손에 쥐어주자 맥없이 그의 손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그는 그 아이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아니, 그럴 방법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원하던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것, 그것이 그의 신분으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코토리.

 

나지막한 음성이 부드럽고 달콤하게 작은 아이를 불렀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살포시 문을 열어 볼까? 그는 코토리를 저택으로 데려온 뒤 처음으로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이 문을 열고, 작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뺨을 맞대고, 손을 부드럽게 그러잡고 싶었다. 영원할 것만 같은 모래사장을 한 바퀴 돌고 온 시간이 다시 제자리에 설 동안 그는 작은 아이와 떨어져 있었다. 이렇게 떨어져 있었던 것이 얼마만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육신을 갖고 작은 아이를 만난 뒤로 그는 작은 아이와 언제나 한 몸이었던 가지처럼 붙어 지냈기 때문이다.

 

집이 갖고 싶어.

 

작은 아이의 입버릇이었다. 여기가 네 집이잖니. 넓은 툇마루를 가리키며 그는 다정히 지저귀곤 했다.

 

여기 말고, 온전히 내 소유의 집.

 

그렇구나. 너에게는 이곳에서 너만을 따르는 이 모두가 네 소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구나. 그는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을 골똘히 생각했다. 작은 아이의 소원은 곧 자신의 소원이었다. 온전한 나의 소유를 갖는 것. 그래서 그 작은 아이를 제 소유로 더했다. 과정은 지난하지만은 않았다. 그저 약간의 눈속임으로 충분했다. 작은 아이는 손쉽게 그가 쳐놓은 새장에 제발로 들어왔다.

 

소리없이 문이 그 입을 벌렸다. 조금의 틈새로 큰 발을 들여놓은 그는 조용히 작은 아이의 방 안을 바라보았다. 작은 아이의 앞으로는 사람의 머리 형상을 한 것이 여럿 놓여 있었다. 주먹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머리들은 형상이 다양했다. 몇 개는 눈을 부드러이 감고 있고, 몇 개는 한쪽 눈을 살포시 감은 채 웃는 상을 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전설 속에 나오는 요정처럼 뾰족한 귀를 하고 있었고, 어떤 것은 양쪽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머리 뚜껑이 열린 것들은 그 형상이 뒤집힌 채 작은 아이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림잡아 수백 개는 될 법한 머리! 작은 아이가 눈여겨보았던 형상들은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진열해놓은 그 자리에 작은 아이는 없었다.

 

작은 아이는 그 모두를 뒤로하고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는 의아함을 표하지 않으려 애쓰며 침상 옆의 조그만 의자에 걸터앉았다.

 

코토리.

 

부드럽고 낮은 음성이 다시 작은 아이를 불렀다. 꿈의 틀에라도 끼인 것인지 작은 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음성이 작은 아이를 불렀다. 여전히 작은 아이는 꿈틀하지 않았다.

 

일어나렴.

 

그는 귓가에 숨을 후, 불어넣었다. 작은 아이가 눈을 떴다. 은빛의 눈동자에 졸음이 가득 묻어 있었다. 저택에 와서 눈을 뜬 것이 몇 번째인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던 작은 아이는 미간을 찡그렸다. 여기는 내가 원하던 곳이 아니야. 작은 아이는 고개를 젓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

 

그의 인내심은 동났다. 얼굴에 새겨진 문신은 이미 붉게 탄 지 오래였다. 뺨에 느껴지는 은은한 작열감이 그의 고양되었음을 아까부터 알리고 있었다. 기껍고도 사납게 타는 불꽃은 그의 손을 타고 흘렀다. 그는 이불을 걷었다. 붉은 공단 이불이 사라락 소리를 내며 걷히고 순수하디 순수한 우윳빛을 띤 잠옷이 드러났다.

 

한때 꿈을 꾸듯 선명하게 빛나던 은색 생명력은 사그라든 채였다. 눈을 떴지만 여전히 잠에 들어 있는 것만 같은 빛을 띤 회색빛에 그의 얼굴이 가득히 반사되었다. 조그마한 색 바랜 입술에 그가 머물렀다 떨어졌다. 회색 눈에서 물기가 또르륵 굴러내렸다. 스스로도 영문을 모르는 이슬이었다.

 

코토리, 네가 원하는 것을 모두 준비해 주었잖니.

 

코토리라고 불린 작은 아이는 빛이 꺼진 눈으로 방을 휘 둘러보았다. 붉은빛의 고급스러운 벨벳이 내린 벽이 그 눈에 들어갔을까. 코토리는 자그마한 발로 바닥을 짚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을 만큼 푹신한 카펫이 그 발에 감겨들었다. 코토리는 그가 준비해놓은 작업대에 올라앉았다. 그러나 붓을 잡지는 않았다. 그가 준비해놓은 수많은 조각들에도 무심한 눈길을 줄 뿐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작은 아이에게 다가갔다. 작업대 앞에 앉아 무심히, 공허하게 허공에 뜬 시선을 가슴에 안았다. 가슴에 가만히 귀를 가져다댔다. 작은 아이에게 어울리는 작은 심장이 콩, , , 느릿하게 뛰었다. 작은 아이의 몸은 따뜻했지만 차가웠다. 가녀린 팔이 작동하듯 그를 마주안았다.

 

그래. 그거면 된단다.

 

그는 작은 아이와 뺨을 맞대고, 손을 부드럽게 그러잡았다. 철저하게 하나처럼 뛰는 고동이 낯설었다. 잿빛 눈에 다시 그가 비쳤다. 초점이 붕 뜬 눈조차 자신이 비치는 것이 그토록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수많은 안구 없는 눈 사이로 그림자는 하나로 겹쳤다.

 

 

꿈인 줄 알았어. 정말이지,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바다에 발을 담그고 있던 사니와가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난 주, 가타부타 말도 없이 오밤중에 나타나 고백한 사사누키의 기행에 대한 회포를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참동안 답이 없었다. 사니와는 고개를 들고 옆을 쳐다보았다. 분명히 옆에 있었던 도검남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사샤? 사샤?

 

사니와는 사색이 된 채로 놀라 일어났다. 분명히 조금 전 수박 조각을 아삭아삭 먹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나란히 앉아 분위기도 좋은데 술이라도 가져올까~ 하던 도검남사가 잠시 연못을 보는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디로 갔담?

 

영문을 알 수 없게 사라진 사사누키의 행방을 찾기 위해 주인은 급히 신발을 발에 꿰었다. 마음이 급한 이상 하얀 샌들이 제대로 신겨질 리 만무했다. 두어 번 왼쪽과 오른쪽을 바꿔 신기를 반복한 주인은 골이 난 얼굴로 맨발로 해변에서 일어섰다. 조각조각 잘라놓은 수박과 참외가 놓여있던 접시를 한 손에 들고, 한 손엔 신발을 들고 정처없이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정신없는 일주일이었다. 끽소리도 못 낼 만큼 강한 포옹으로 제 의견을 표출하는 남사는 여태껏 없었다. 저기 멀리 동동 뜬 접시배처럼 굴더니 갑자기 거리를 좁혀와서는 찰싹 달라붙어 있는 이 남사와의 일주일은 참으로 스릴이 넘쳤다. 콕콕 몇 번 좀 찔러봤다고 뱀 나올지도 몰라? 라더니 진짜로 팔을 뱀처럼 휘두르는 모습을 보여줄 줄은 몰랐었다.

 

,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는데.

 

사니와는 연대전을 위해 옮겨온 여름 별장 부엌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포크 두 개가 가지런히 놓인 것이 이마저도 그와의 추억인 것 같아 왠지 모를 흡족함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는 신발을 고쳐신고 다시 물가로 나아갔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그는 다시 자신을 찾아오고야 말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편하게 찾아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사샤, 사샤.

 

여러번 불렀지만 답은 없었다. 바다는 조금 무섭다더니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사니와는 아까의 그 자리로 향했다. 바다에 버려졌다던 이야기 때문에 바다가 두려울 그에게 바다가 무섭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던 사니와였다. 절대로 나는 너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주고 싶었는데.

 

어디로 가 버린 거야 대체.

 

볼멘소리를 한 마디 뱉은 사니와는 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수면에는 한 사람분의 그림자만 비치고 있었다. 두 사람분의 그림자가 비치면 좋을 텐데. 무의식적으로 사니와는 수면 위에 두 사람분의 그림자를 그리고 있었다.

 

보고 싶어.

 

십 분, 이십 분을 그렇게 서 있었을까? 사니와가 기다리는 도검남사는 사니와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그 말대로 일주일을 족히 붙어있던 사이에 사라지고 나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뙤약볕이 내려오는 시간이었다. 팔이 따가웠다. 기다리는 것을 멈추고 슬슬 들어가야 할까, 고민하던 사니와는 얇은 겉옷을 걸치고 수면을 빤히 바라보았다.

 

기다렸어?

우왁!!!!!!!!

풍덩.

 

동시에 세 개의 소리가 해변을 메웠다.

 

아하하, 미안, 미안.

 

가 서 있었다. 기척도 없이 등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림자 하나가 물에 어리는 것을 보자마자 사니와는 실제로 놀라자빠져서 물속으로 다이빙했다.

 

내가 나온 게 그렇게 놀라운 일이야?

 

사사누키는 한쪽 팔에 서핑보드를 끼고 당혹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사니와는 한참 첨벙대더니 물을 털며 물 바깥으로 일어나 나왔다.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오니까 그렇지. 츠루마루도 아니고.

아하하, 미안. 그럼, 사과하는 김에 같이 서핑이라도 해줘.

나 서핑할 줄 몰라.

가르쳐 줄테니까. , 여기.

 

사사누키는 서핑 판을 팡팡 두드렸다. 꽤나 웃긴 모습으로 물에 빠진 주인을 보고 웃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사니와는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사사누키를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한번 해 보면 재미있다니까. 바다가 무섭다는 것도 잊어버릴 수 있어. . 어서.

 

사사누키는 빈 손을 사니와 쪽으로 내밀었다. 파도 밖으로 기어나오듯이 나온 사니와는 그 손을 잡았다. 열에 데워져 따뜻했다. 하얀 손과 그을린 손이 얽혀 물 위에 하나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파도는 끊임없이 들이쳤다. 먼저 보여준다던 사사누키가 멋지게 파도를 타고 돌아왔다. . 평소에도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좀 많이 멋졌어. 사니와는 솔직하게 감상을 드러냈다.

 

, 여기 타 봐.

 

그는 바다 위에 서핑 판을 띄우곤 사니와를 향해 손짓했다. 어차피 젖은 거 들어가나 보자, 지금보다 더 웃기게 떨어지겠어? 사니와는 물 속으로 들어갔다.

 

이거 뒤집히면 어떡해?

내가 잡아줄 테니까 걱정 마. 너무 겁먹으면 흔들어 떨어뜨릴지도 몰라?

이봐!

하하, 장난, -!

 

한 손을 들고 와하하, 밝게 웃는 얼굴에 누가 졌겠는가. 먼저 좋아한 사람이 지는 거다. 사니와는 조심스럽게 서핑 판에 몸을 실었다.

 

처음부터 어려운 걸 해보라고 하지는 않을테니까~

 

사사누키는 가볍게 웃었다.

 

일단은 몸과 서핑보드의 수평을 맞추고. . 그렇게 손으로 저어나가는 거야. 어이쿠.

 

운동신경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보고 배운 것은 잘 따라하는데 이상하게 이런 건 못하는 사니와였다. 사실 어릴 적에 스케이트보드도 못 타서 넘어지기를 반복하다 그만뒀던 사니와는 서핑보드 위에서도 균형을 잡지 못해 넘어져 버렸다.

 

어푸푸-.

어어, 괜찮아? 물 안 먹었어?

안 먹었어.

, 그럼 다시 해 보자.

 

생각보다 사사누키는 좋은 선생님일지도 몰랐다. 첫술에 배부른 건 없으니 다시 하면 돼~ 하고 느긋하게 말하는 것이 말이다.

 

둘은 그렇게 한두 시간쯤을 서핑보드 위에서 균형을 잡는 데에 몰두했다. 수면에 비친 두 모습을 이글이글 타오르던 태양조차 흐뭇하게 바라보느라 낮이 길어진 어느 날이었다.

 

분명히 의도대로였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을 것이었다. 만듦새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고 대나무 숲에 버려버리다니, 갓 태어난 아기를 버려서 죽기를 바람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날붙이로서 그를 따라다니던 수식어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며 육신을 입은 사사누키는 이번에 제가 돌아와야 할 곳을 휘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쳤던 이번 대의 주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검을 수집하는 것으로는 과거에 만난 주인들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인간이 하나, 도검이 족히 백은 되어 보이는데도 제련소에서는 매일같이 새로운 검을 치고, 본성의 자원을 충당하기 위해 탐욕도 부렸다.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도검남사는 있었으나 그에 대해 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여기가 새 집이란 말이지.”

 

사사누키는 자신의 몸을 움직여보며 혼자 말했다. 담담하게. 눈을 마주치긴 했지만 그 주인이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를 보는 눈빛이 거슬렸다. 그래서 새롭게 얻은 육신이 지내는 본성을 돌아올 곳으로 결정했다. 그뿐이었다.

 

주인의 눈빛은 여느 도검남사를 보는 것과 달랐다. 그것만큼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보는 눈과 그들을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손에서 놓아버릴 징조. 사사누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인간에 대해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떠나갈 존재들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손에서 놓아버릴 존재들이었다. 어차피 어느 순간엔 자신을 버리고야 말 존재였다. 거기에 주인이란 백 자루의 검을 통솔하는 입장이니 하나쯤은 선물로 줘버리거나 하면 다행이고 어디로 사라져도 모르지 않겠는가.

 

언제 어디에 버리더라도 자력으로 돌아올 준비는 되어있지만 돌아올 곳은 본성이지 저 주인의 손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

 

분명히 시작은 동정이었다. 버려졌던 검. 수차례 버려졌던 검이라는 내력을 조사해보고 나서는 아직 도검남사로 불러내지도 않은 검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불러내고 나서 표표하게 빛나는 푸른 눈에 그대로 비쳤으리라. 그 눈엔 여느 설화를 거느린 검들이 거느린 자부심도, 도검남사로서의 사명도 빛나지 않았다. 별 기대 없는 눈. 그 눈이 저를 옭아매는 밧줄이 될 거라고 사니와는 생각하지 못했다.

 

연민이었다. 버려짐의 아픔을 아는 사람에게 그의 눈은 뚫을 수 없는 장벽으로 보였다.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온전히 버려졌다는 아픔을 아는 사람에게 그의 눈빛은 넘을 수 없는 높은 산이었다.

 

그래서 넘고 싶었다.

 

연민과 동정은 그를 찾게 했다. 거처에 자주 발걸음하고, 당번으로 근시로 그를 자주 내세웠다. 버려진 검이라는 상처를 더는 안고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육신을 입었으니 아침해를 맞고 밤별을 맞이하는 감상이 그에게도 빛나게 다가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라났다. 적어도 내가 죽을 때까지는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심정이 전해지기를 바랐다.

 

사샤, 사샤.”

 

여느 남사에게 대하듯 애칭을 지어 부르고 슬쩍 상점가를 갈 때 호위로 지정하고, 그가 시야 안에 들어오도록 하루를 조정했다. 분명히 처음엔 안타까움이었다. 그러나 습관처럼 그를 눈 안에 두고 보니 순간순간 어떤 사명감이 자라났다. 주인으로서 그를 지키고 싶었다.

 

*

 

기분이 나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물건, 그 물건에서 피어오른 물상신, 부리는 사람의 명령을 따르다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건 떠나면 물건으로 돌아가야 할 ’. 그런 것이 자신이었다. 그래서 별 기대가 없었다. 육신을 입자 일정한 박자를 타고 뛰는 심장도 신기할 것이 못 되었다. 아침이면 해가 떠오르고 저녁이면 별이 떠오르는 것도 별 감흥 없는 일이었다. 싸우고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그랬던 그는 주인의 명령을 즐기지 못했다.

 

어차피 가만히 놔두고 방치해도 곁으로 돌아가고야 말 불길한 소리를 하는 도검남사 따위를 자꾸 그 시야 안에 두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름을 두고 괴상한 별명으로 부르고, 시야 안에 두려고 하는 주인의 의도야 빤했다. 상점에 데리고 가서 선물을 사준다거나 하는 행동도 때로는 별 의미없이 느껴졌다.

 

*

 

사샤, 이거 받아.”

어느 날 주인은 그에게 뭔가를 건넸다.

 

남사의 본분은 역행군과의 싸움이라지만 너를 싸움에 매번 보내고 싶지는 않네.”

궤변이다. 시간역행군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육신을 입을 일조차 없었을 그였다.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해.”

주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 무슨 일이 생겨도 나는 여기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

돌아오는 건 특기라고? 사사누키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래도. 말야. 잠깐 겉옷 좀 빌려 줘.”

 

주인의 이런저런 명령들에 비하면 별것 아닌 부탁이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겉옷을 벗어주었다. 주인은 오마모리 하나를 꺼내놓았다. 금실로 마감된 부적 위로 사사누키의 문양이 수놓여 있었다. 주인은 부적을 갈무리해서 옷자락에 넣고 다시 바느질했다.

 

꼭 돌아와야 해.”

주인과 눈이 마주친 것은 그것이 두 번째였다.

하하, 우리 주인은 걱정이 지나치네. 반드시 돌아온대도.”

 

눈빛이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

 

오늘의 근시는 사사누키.”

자네, 오늘도인가?”

 

전투부대를 이끌고 여름 연대전에 다녀온 츠루마루 쿠니나가가 어깨를 으쓱했다. 끼고 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주인은 사사누키를 불러낸 이후 자주 근시로 임명했다.

 

그냥. 그럴 이유가 있어.”

자네 그러고 보니 요즘 눈빛이 많이 변했다만.”

츠루가 보기에도 그래? 아하하. 그렇지만.”

 

사니와는 눈을 초승달처럼 휘어가며 고개를 돌렸다. 웃으면 참 예쁜 얼굴이었다. 동그란 눈은 초승달처럼 휘고, 입술 새로 앞니가 살짝 보이는 예쁘장한 얼굴. 그 얼굴이 요즘 향하는 곳이 화제의 신입이라는 걸 모르는 고참 도검남사가 더 드물었다.

 

처음 신입을 데려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일세.”

농담하지 마, 아니, 농담이 아닌가.”

, 자네가 알아서 처신하겠지.”

 

사니와로 지낸 7년이 넘는 시간만큼 신뢰를 쌓은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무슨 일이든 사니와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자리를 비키며 마침 그 근방을 지나던 사사누키를 불러세워 귀엣말을 전하곤 높은 수압의 물총을 챙겨 나갔다.

 

*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발걸음이 본성이 아니라 주인에게 향하고 있었다. 부적을 받은 이후부터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겉옷을 떼어놓기도 했지만 머리와 발이 따로 놀았다. 해가 뜨면 근시임을 빙자해 주인에게 향했고, 별이 뜨면 호위를 핑계 삼아 주인이 보이는 반경 안에 머물렀다.

 

이해할 수 없었다. 주인의 눈빛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기엔 단 두 번밖에 눈을 마주친 기억이 없었다. 개연성 없는 소리였다. 어차피 언젠가는 나를 버릴 인간, 이라고 습관적으로 생각했던 마음의 소리는 언젠가부터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저 눈이 진심이겠냐는 생각이 어느 순간 기울어 절벽 아래로 떨어져가고 있었다. 발길이 저도 모르게 한 점으로 좁혀가고 있었다.

 

*

 

벌컥, 문이 열렸다. 오랜만의 야근을 하고 있던 사니와는 문을 열고 들어선 그림자의 존재에 깜짝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한 쌍의 눈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이내 사니와는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반겼다.

 

어서 와, 사샤. 할 말이라도 있어? 이 시간에 웬일이야?”

 

성큼성큼 그가 걸어왔다. 집무실의 책상에 가로막혀 대나무 사이에 갇힌 꼴이 된 사니와는 그에게 무슨 일이냐며 다급하게 물으며 파닥파닥거렸다. 병아리 같았다.

 

*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 꿈인 줄 알았다. 그는 병아리 모양으로 파닥거리는 제 주인을 억센 팔로 힘껏 안았다.

 

오늘 원정은 4지역의 2, 4번 담당이야.”

.”

출진은 전력확충계획 2, 아즈키 나가미츠 탐색 지역이고.”

……? .”

이봐, 주인. 듣고 있어?”

뭐라고?”

 

하아, 내가 미쳐. 코류 카게미츠는 요즘 잦아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즘 따라 주인은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근시인 자신의 말도 제대로 듣지 않고 있었다. 1부대 대장과 근시를 분리해 지정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하냥 기뻤다. 누가 전투에 나가든 주인의 곁을 지키고 앉아 총애받는 용용이로 지낼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주인이 딴 생각에 빠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코류 카게미츠는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야말로 거의 울기 직전의 모습으로 자신을 맞이했던 주인이었다. 원정으로 몇 시간 자리를 비우는 것도 견디지 못해서 혼마루 시간으로 10분짜리 원정도 보내지 않는 주인이었다. 아무리 수행을 위해서라지만 나흘간 자리를 비우는 것도 기다리고 싶지 않다며 (허가된 일이지만) 수행용 전서구를 날려 혼마루의 시간을 멋대로 돌려버리고, 단 한 번도 1부대 부대장에서 해제한 적도 없는 주인이었다. 하다못해 자신은 어떤가? 전공으로 따져도 당당히 목록 첫 페이지에 이름이 올라 있는 상태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생각은 무슨. 별 것 아냐.”

 

과거의 어느 시점 같으면 사근사근 웃는 얼굴로 네 생각 하고 있지, 라고 답변하던 사랑스러운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요즘은 시큰둥하게 원정을 보내고, 내번을 보내고(그 내번 담당도 몇 달째 바뀌지 않아 다이한냐 나가미츠의 볼멘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전투에 나가는 남사들에게 다치지 말라는 말도 없었다. 이게 매너리즘인가? 너무나도 오래된 일상에 권태감을 느끼는 건가? 그러다 보니 나에게서도 멀어진 건가? 헌신짝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으로 남사는 원인을 곰곰이 되짚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시작은 작년 즈음부터였다. 새로운 도검남사가 자주 충원되는 것도 아니던 시절, 시간정부에 불만을 품은 주인은 현세와 연결된 단말에 이것저것 새로운 걸 깔기 시작했었다. 몇십 개의 어플리케이션이 단말에 깔렸다, 지워졌다를 반복했다.

 

이건 랭킹이 있네, 아웃. 이건. 가챠가 너무 답이 없어. 안 할래. 이건내 사회적 명예가 걱정되는데? , 그거? 이벤트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지웠어. , 그거? 플레이어를 너무 막 대해서.

 

잠시간의 일탈이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주인이 야금야금 책장을 하나 비우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게 책을 좋아하다 못해 껴안고 살던 주인이 몇 권을 사니와마켓에 내놓더니 안 팔리는 책을 버렸다. 카센 카네사다의 기쁨의 목소리가 아직까지도 귓전에 들릴 것 같았다. 드디어 주인이 책을 베고 사는 게 아니라 사람 사는 방을 만들고 있다면서! 하지만 늘, 일 보의 후퇴는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렇게 비워버린 책장 한 켠에 CD와 태피스트리와 인형들이 가득 차기 전까지 아무도 문제라고 느끼지 않았었다. 도검남사들이 느끼기에도 시간정부가 제대로 업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

 

문제를 알아차린 것은 역시 주인 곁에서 365일을 보내고 있던 코류 카게미츠였다. 안 하던 외국어 공부를 하겠다고 설치지를 않나, 갑자기 만방에서 원고지 뭉치를 싸들고 오질 않나, 오늘처럼 딴 생각을 하느라 원정 부대와 출진에 대해서도 제대로 듣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질 않나. 갑자기 시찰이라도 나오면 이건 혼마루 방만 경영이라고 경고라도 먹을 것 같은 기세로 대충대충 일하면서 주인은 단말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주인이 빠진 것은 각종 리듬게임이었다. 단말기 상단에서 떨어지는 표식들을 타이밍 좋게 맞춰서 점수를 따는 게임. 대사 한 줄 없이 그림만으로 상황을 전달하는 리듬게임까지는 봐줄 만했다.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상정하고 인류를 지키기 위해 인터넷에 접속한다는 내용의 게임도 괜찮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것도 하고많은 게임 중에서 도검남사들과는 다른 매력을 지닌 남성 캐릭터들만 우글우글한 게임! 처음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겠거니 했다. 코류 카게미츠를 눈앞에 두고도 원래 일대일의 관계라는 건 구시대적 발상이라며 다른 남사들을 과도하게 칭찬하다가도 결국 자기에게 돌아오는 그런 바람이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책장을 치우고 새로 채우고, 굿즈를 사고, 그 굿즈에 입을 맞추고. 코류 카게미츠로서는 식지 않는 주인의 바람에 아주 돌아버릴 노릇이었다.

 

내일부터 라이브야. 방해하지 마.”

주인, 지금은 전시상황이다만.”

전쟁 중에도 휴가는 있는 법이야. 정말 급한 일이라면 내가 정신줄 놓고 라이브만 보고 있을까 봐?”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오죽하면 주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던 야만바기리 쿠니히로마저 주인에게 지금은 전시상황이라는 점을 일깨워줘야 했다. 하지만 주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내가 너희들을 그렇게 나약하게 키웠냐고 일갈까지 했다. 아니, 7주년을 맞은 사니와라지만 해도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기가 찼지만 시간정부의 하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올해도 글러먹은 듯했다.

 

어쨌든, 주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코류 카게미츠의 말을 말 그대로 반쯤 씹었다’. 차라리 포기가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포기도 안 되는 제 심정을 어쩔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내 지시 없어도 이제 너희들 알아서 잘 하잖아.”

수리는 네 손을 거쳐야 하거든.”

그 외의 시간은 좀 놔두면 안돼?”

“‘주인을 어떻게 그냥 놔둬?”

그래그래. 네 주인이긴 하지.”

 

어디의 공주님이기도 하고 말이야. 주인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콱 씨. 조화라도 부려서 저놈의 뽑기를 아주 폭망하게 만들어 버릴까. 코류 카게미츠는 주인의 건성을 더 견딜 수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 놔.”

.”

그 단말기 이리 내.”

싫어, 내 건데 왜?”

자기는 내 거잖아?”

?”

 

말도 안 되는 궤변인 줄 알면서도 코류는 단말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게임의 이벤트 기간이라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었다. 주인이 손을 뻗었지만 코류의 팔이 조금 더 길었다.

 

!”

.”

 

주인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이까지 코류 카게미츠는 단말기를 들어올렸다. 원체 키가 작은 주인이라 조금만 들어올려도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이에 도달했다. 씨익 웃는 얼굴에 장난기가 돌았다.

 

자기야, 이거 그대로 던지면 어떻게 돼?”

넌 나한테 죽을 줄 알아.”

, 살벌하네에. 그런데 그럴 수 있어?”

?”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 자기 내 얼굴에 약하잖아.”

지금 굉장히 강해진 기분이거든?”

어디 한 번 해봐, 그럼. -챠지한 미스터 챠밍 리틀드래곤의 진심을 얕보지 말라고.”

 

그는 한 손에 단말기를 든 채였다. 얼굴에 진심이 가득했다. 보랏빛 눈은 장난스럽지만 진지했다. 이 새끼 이거 그대로 일 치겠는데. 주인의 머리에 번개가 일었다.

 

바라는 게 뭐야?”

주인 잃은 도검남사가 바라는 게 뭐겠어?”

똑바로 말 안 해?”

. 알 때까지 말 안 할 거야.”

용가리 너 진짜!”

 

주인은 의자 위에 올라가서 손을 뻗었다. 코류 카게미츠는 솜씨 좋게 팔을 휘두르며 단말을 빼앗은 손을 잡히지 않으려고 했다. 결국 주인이 모서리를 잘못 밟고 휘청했다.

 

, 위험하지 위험.”

!!!!!!!!!!!!!!”

 

코류 카게미츠는 너무나도 익숙한 손짓으로 주인을 받아내었다. 졸지에 팔에 매달린 빨래 꼴이 된 주인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그는 두르고 있던 모포로 주인을 꽁꽁 싸맸다. 아기는 포대기에 꽁꽁 감싸놓으면 조용해진다. 자그마치 800년은 묵어버린 도검남사에게는 주인도 아기와 별다를 것이 없었다. 바둥거리던 주인은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걸 느끼고 얌전해졌다.

 

오늘은 우리 자기, 나랑 시간 좀 보내야겠어𝅘𝅥𝅮”

 

그는 조용히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단말기를 버려놓고 방으로 향했다. 단말기에서는 여전히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어디를 가니?

 

그는 그림자에서라도 솟아난 양 불쑥 튀어나왔다. 손가락 하나도 들어갈까 말까 한 가까운 거리에서, 그것도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혼마루의 주인은 안타깝게도 오이를 만난 고양이처럼 펄쩍 뛰었다.

 

이 영감탱 또!! !!!! 제발 기척 좀 하고 다니란 말야!!!!

 

얼마나 놀랐는지 주인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굉장히 높은 음을 냈다. 원인을 제공한 자는 여전히, 평소와 한끝도 다름없이, 나풀나풀 바람을 타고 흐르고야 말 것 같은 얼굴이었다.

 

으하하하하! 역시 재미가 있는 주인이로고.

 

그는 슬쩍 주인의 손에 있던 물건을 제 손에 쥐었다. 왼손에는 늘 들고 다니는 접선을, 오른손에는 주인의 작은 클러치 백을 들고 호탕하게 웃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어디를 가는 게냐?

대감마님께서 아실 일은 아니랍니다.

 

주인은 딴청을 부렸다. 여전히 골이 난 얼굴이니, 오늘놀림당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비죽이며 팔짱을 끼고 다시 뒤돌아 나가려는 주인을 대감마님은 또 불러세웠다.

 

외출하면서 가방도 들지 않고 말이다.

 

귀에 선명히 박히는 소리에 주인은 제 양손을 살펴보고 제정신을 깜박했던 모양이라고 발길을 180도 틀었다. 그렇게 깜박한 줄 알고 걸어가던 제 주인의 어깨를 대감마님께서 부채로 톡톡 쳤다.

 

아 또 왜! ――.

네 것은 여기에 있다만.

 

이치몬지 노리무네! 온 혼마루를 쩌렁쩌렁 울리고도 남을 법한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목청으로 주인은 저를 놀리는 도검남사의 본명을 외쳤다.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킥킥 웃던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현세를 벗어난 상점가를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

 

혼자 와도 된다니까.

원래 귀한 몸께서는 혼자 상점가를 걷지 않는 법이란다?

영감이야말로 그 요상한 곳에서 혼자 다녔으면서?

거긴 상점가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 몸은 은거하는 몸이라 말이다.

갖다 대면 다 말이지 그래.

 

주인은 여전히 투덜거렸다. 지갑밖에 들어있지 않은 클러치 백은 얌전히 이치몬지 노리무네 저 영감탱의 손에 들려 있었다.

 

정말 가볍디가벼운 옷차림으로 상점가에 따라 나온 영감탱은 내가 뭘 하러 온 건지도 모르면서 따라 나왔겠지.

주인은 볼멘소리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저 속을 알 수 없는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랑 말을 섞는 순간부터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말려버리는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차라리 먼저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을 택했다. 이치몬지 노리무네 역시 그 경우에는 굳이 사니와를 먼저 건드리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심심하지 않은 동안에는. 그리고 상점가를 한참을 걸었으니 이제는 슬슬.

 

그런데, 어디를 가는 게냐?

 

두 번째 질문이었다. 주인은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흐응. 흰색에 가까운 엷은 청회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멋대로 따라나오기는 했지만 알려는 주어야지.

영감 팔러 가.

허어?

 

분명히 그만 물어보라는 의미에서, 입 다물라고 고른 표현이었는데 이게 오히려 이치몬지 노리무네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의 눈매가 점점 더 곱게 휘었다.

 

그것 참 재미있는 이야기로구나. 이 일만 냥의 보도를 팔아서 갖고 싶은 것이 있는 모양이로군.

 

부채 너머에서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보고 있을 그의 얼굴을 떠올린 사니와는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려 버렸다. 뭘 해도 쉽게 상대가 안 되는 영감이었다.

 

차라리 대꾸를 하지 말고 일이 끝난 뒤에 이야기하든가 해야지.

 

헤이안 시대를 살아왔던 진짜 영감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능구렁이 같은지 모를 일이었다. 이게 바로 전 수장의 관록이라는 것인지, 주인 되는 사니와도 놀려먹고 말로 구워삶아 찜쪄 먹고 아주 지지고 볶는 모양새가 누가 주인이고 누가 도검남사인지아니, 누가 수하인지 헷갈릴 노릇이었다.

 

, 팔 테면 팔아 보거라. 어린 것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은거하는 노인의 특권이지.

 

제 주인이 한참을 답하지 않자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부채를 접지 않은 채로 뇌까렸다. 그런 말을 들으면 팔고 싶어도 못 팔게 될 주인의 성정임을 다 알고 하는 말이었다. 정말이지 사회성 만렙의 여느 도검남사들이라고 해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말을 진지함을 백 배로 쳐서 받아치고 있으니 사니와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하필 나오는 길에 왜 이 영감탱에게 들켜서 이 모양이람.

 

머릿속에 피어오르는 생각을 속으로 삼킨 사니와는 상점가 끝에 있는 양과자점으로 향했다.

 

예약 찾으러 왔어요. 주문 번호는 *******입니다. 대금은 그때 완납했구요.

 

주문번호를 받은 점원은 예약 주문표를 한참 살피더니 주문품을 꺼내왔다. 서양에서 시작되었다던 날에 걸맞게 적당한 채도의 빨간색과 짙은 갈색 사이로 금박 문양이 들어간 고급스러운 포장 속에 담겨 있는 것은, 아마도 주인이 홀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 줄 것이라고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멋대로 생각했다. 혼마루에 기거하는 90명이 훌쩍 넘는 도검남사들에게 모두 돌릴 만한 양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는 배송 서비스로 신청하셨죠?

 

점원이 주인에게 한 차례 더 물었다. 주인은 예, 하고 짧게 대답하고 감사하다 인사했다. 그리고 그들은 5분도 지나지 않아 거리에 나와 있었다.

 

*

 

이제 돌아가려고?

, 이제 하려던 일은 끝났어. 그리고 주말이잖아. 오늘은 쉴 거야.

그렇다면.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슬쩍 말끝을 흘렸다. 이 양반이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사니와는 그가 왜 그리 말하는지 알면서도 넘어가는 방법밖에는 몰랐다. 그의 제안은 언제나 구미가 당기는 매력적인 것들뿐인 탓이었다.

 

잠시 이 노구에 어울려주지 않겠는가?

?

그래, 그 뭐냐. 데이트- 말이다. 데이트. 모처럼의 휴일이니 쇼핑이나 하자꾸나.

? - 이 영감이 미쳤나?’

 

만화적인 표현으로 말풍선을 바꾸어 말할 뻔한 이치몬지 노리무네의 주인은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갑자기 말문이 막혀 아무 말이나 하고도 남을 것 같아 물리적으로 막는 게 나았다.

 

마침 선물을 주는 날이라니, 이 몸도 육신을 가진 이상 현대적인 전통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느뇨?

, , 그래요.

 

그 파랗게 빛나는 눈을 10cm 거리에서 보고 부탁을 거절할 만한 인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주인은 오늘도 휘말려 곧바로 귀가하지 못하고 그와 어울리게 되었다.

 

*

 

거리는 부산했다. 주말이기도 하고, 기독교적 축일에서 시작된 그 명절을 즐기려는 이들이 많았다. 조합은 다양했지만 아까 본 얼굴의 동일한 얼굴도 곳곳에서 보이곤 했다. 중간중간 이치몬지 노리무네와 똑 닮은 다른 혼마루의 이치몬지 노리무네도 보였다.

 

시종일관 그는 주인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어떻게 봐도 연인일 게 뻔해 보이는 조합으로 허리에 팔을 두르거나 어깨에 팔을 두른 이들도 많았다. 정말이지 골목길에 들어가서 잘 보이지 않는다지만 길거리에서 저러면 안 될 텐데 싶은 눈꼴사나운 광경도 한둘 지나갔다.

 

그런데 노리 영감. 살 게 있어?

있다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아까 지나오다 봐 둔 가게가 있단다. 무엇인지 궁금한 겐가?

천 년이나 묵은 영감이 데이트니 쇼핑이니 하는데 놀라자빠질 뻔했으니 행선지도 궁금한 거지.

가 보면 안다. 가 보면 알아. 아하하.

 

국화꽃을 잔뜩 드리운 등이 웃음소리에 따라 흔들렸다. 호탕한 웃음이라 괜한 걱정도 없었다. 심지어 아까 말했던 당신 팔아버리겠다는 빈말도 이제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둘은 그렇게 가게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짤랑거리는 풍경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고, 이내 점원의 환영 인사가 들어왔다. 가게는 골목을 두어 번 돌아 들어와야 있는 자그마한 곳이었다. 이런 곳에 이런 가게가 있다니. 주인은 거의 6년 이상을 혼마루에서 살면서 이 상가를 이용하면서도 모르는 곳이었다.

 

골라 보시게나.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주인을 부채 끝으로 밀어 진열장 앞에 서게 했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각종 보석이 빛났다.

 

영감?

일단 골라 보래도.

 

진열장에는 가격표가 없었다. 일단 무작정 끌고 와서 고르라는 말이 무슨 될 법한 말인가. 사니와는 어이가 없어 벙찐 얼굴로 이치몬지 노리무네를 한 번, 화려하다 못해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반짝이는 보석들로 가득한 진열장을 한 번 돌아보았다.

 

척 보아도 얼빠진 사니와는 10분 가까이 고르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게 다 얼마람. 보석 가격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사니와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숫자 뒤로 0이 최소 예닐곱 개는 붙을 것만 같은 모양새들이었다.

 

혼란과 혼돈 속에 빠진 주인은 그 뒤로 바짝 다가오는 발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다.

 

.

주인의 어깨가 팔짝 뛰었다. 살포시 짓는 한숨에도 반응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역시 고를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마음에 드는 게 없는 게 아니라, 또 이 영감탱이의 장난질에 당해서 말린 것만 같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못 고르겠다면 내가 골라 주랴?

 

그는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읊조리더니 점원을 불렀다.

 

진열장에 있는 것 말고, 더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은가?

, 있습니다. 보여드릴까요?

이왕이면 붉은 계열로 부탁하네만.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점원은 잠시 가게 뒷방으로 향했다. 본능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요구하는 품목은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살 수 있는 종류의 물건들이 아니었다. 그런 것을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마치 일상용품을 구입하듯 입에 올렸다.

 

당신 미쳤어?

미쳤다니? 무엇이 말이냐?

당장 여기 있는 것들도 이렇게 화려한데?

진열장에 나와 있는 것은 기성품이란다. 누구나 살 수 있는 것이지. 그런 것을 고르게 할 수야 없지.

 

어이가 없어 입이 떡 벌어진 주인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한쪽 어깨를 잡은 채로 그가 답했다. ‘누구나 살 수 있는 그런 것이라는 말에서 주인이 어떤 인지부조화를 느꼈든 그것은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점원이 몇 개의 케이스를 가지고 나왔다. 하나의 케이스 안에 한 알씩만 들어있는 붉은 빛의 보석들은 어떻게 보아도 이런 골목길에 있을 법한 물건들이 아니었다. 소더비에서나 등장할 법한 물건들이 아닌지, 라고 멋대로 생각하던 사니와가 떨리는 눈으로 이치몬지 노리무네를 흘겨보았다.

 

그는 더없이 진지했다. 감사관으로 일하면서도, 검을 잡으면서도, 자신이 직을 내려놓은 이치몬지의 이들 앞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눈빛으로 보석들을 하나하나 보던 그는 부채 끝으로 케이스 하나를 짚었다.

 

이것으로 하는 게 좋겠군.

세공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는 카탈로그를 몇 장 펼쳐보더니 역시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주인은 점원에게 손이 잡혀 손가락의 치수를 쟀다. 왼손의 다섯 손가락 치수를 물끄러미 보던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그 중 한 치수를 골라 주문서를 작성하곤 제 옷 어디선가에서 카드를 한 장 꺼내 내밀었다.

 

?????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주인은 이치몬지 노리무네를 살펴보았다. 단순한 장난으로 넘길 만한 가격이 아닌 것을 아무렇지 않게 일사천리로 더 알아보지도 않고 결제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나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직접 받으러 간 양과자점의 초콜릿을 눈앞의 이 남사에게 주려던 것이었다는 사실도 깜박하고야 말았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잘 부탁하네.

 

당황스러운 외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주인이 양과자점의 초콜릿 주인이 누구인지 떠오를 때까지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고급 레스토랑과 디저트에 분위기 좋은 바까지, 제 좋을 대로 주인을 끌고 다녔다.

 

*

 

그로부터 열흘이 지났다. 그는 주인에게 찾으러 갈 것이 있다 하며 외출 신청서를 내밀었다. 그래, 다녀와. 내가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거잖아. 주인은 여전히 얼빠진 상태로 서류에 사인했다.

 

잘 갔다 와. 제때 돌아오고, 영감탱.

 

주인의 영혼 없는 인사를 받은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씨익 웃더니 주인을 어깨에 들쳐멨다.

 

, 진짜. 일하고 있을 땐 건드리지 말라니까!!!

자네도 가야 하는데.

아 무슨, 저게 니 휴가 신청서지 내 휴가 신청서냐.

자네를 동반한다고 적었네만? 서류에 사인은 신중하게 하라는 교훈으로 알아들으라고. 으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는 주인을 끌고 상점가로 나갔다. 역시나 몇 번 골목을 거쳐 조용한 골목에서 그들은 일전의 보석상에 도착했다.

 

도착하셨군요. 주문하신 물품의 제작이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았군. 그럼. 언젠가 또 보도록 하겠네.

 

*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그 길로 혼마루로 돌아가지 않고 한적하고 경치 좋은 장소로 향했다. 벤치에 앉아 새 소리를 들으며 실없는 농담을 던지려나 싶었지만 그의 눈은 이미 사냥감을 눈앞에 둔 매처럼 단호했다. 얼굴을 가리던 부채는 내려놓은 채로 그는 케이스에 들어 있던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를 제 주인의 손가락에 곱게 끼워 주었다.

 

새들이 숱하게 짹짹거리는 겨울의 막바지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