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적인 함유가 다분합니다. 열람 주의. 

 

집무실에서는 오늘도 듣기 싫은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지난 몇 년간 그랬듯이 1월이면 주인의 혼을 쏙 빼놓는 소리가 작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주인은 그 리듬에 맞춰서 딸깍딸깍 서류를 결재했다. 그 소리 좀 어떻게 꺼줄 수 없어? 이 혼마루에 인간 남성의 목소리를 가진 것만 백여 입인데 그걸로 모자라서 그걸 굳이 스테레오로 들어야겠어? 금발의 청년은 볼멘소리로 툴툴거렸다.

 

사건의 전모야 별것 아니었다. 평소 같으면 단 이틀 라이브 행사를 하고, 일주일만 녹화 아카이브를 공개하던 게임이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2주 간격으로 다섯 날씩이나 라이브를 하고 아카이브를 열흘이나 풀어줬다는 게 문제였다.

 

평소에도 그쪽 노래 많이 듣잖아. 항상 틀어놓고 살잖아. 그걸로 부족해서 지금 이렇게 틀어놓고, 누구 속 터지게 할 일이라도 있어? 당장에라도 따지고 싶지만 어떡하겠는가. 저렇게 좋다고 할 땐 놔두어야 소심한 복수가 일어나지 않는걸. 코류 카게미츠는 근시로서 할 일을 하면서 주인을 그대로 둔 지 20일쯤이 지나자 슬슬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이코에서 소득이 따로 없었네.

항상 소득이 있으면 자기, 복권에라도 당첨될 운을 끌어다 쓴 걸걸.

어쩔 수 없지. 코류한테 빨리 찻잔 하나 선물해 주고 싶은데.

아하하, 그건 듣던 중 고마운 소리야.

 

저 소리만 아니라면 말이지. 어느새 아카이브는 흐르고 흘러 많은 사람들이 앙코르를 목이 터져라 외치는 구간까지 재생되어 있었다. 가챠! 힘찬 목소리와 함께 주인의 손가락이 다시 까딱까딱 움직였다.

 

나 잠깐만 상점가에 나갔다 올게.

, 다녀와.

주인은 코류를 선선히 내보냈다. 그리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다녀왔습니다 어라?

 

주인은 집무실에 없었다. 대충 이쯤이면 분큐 토사번에 보낸 도검들의 현황을 점검하느라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집무실에 없었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잠깐 산책이라도 갔나? 코류 카게미츠는 상점가에서 사온 조그마한 꽃다발을 들고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카이브 소리가 꺼져 있었다. 그렇다면 주인은 집무실에서 나갔다는 뜻이다.

 

헤에, 이거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내가 돌아온 자리에 없다 이거지.

 

코류 카게미츠는 성큼성큼 자기의 방으로 향했다. 주인의 별채 옆에 딱 붙어 있는 호신도의 특실. 그곳에서 주인을 놀래킬 요량이었다.

 

흐흥~~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웬일인지 집무실을 일찍 비워버린 주인이 꽤 기꺼웠다. 오늘은 어지간히 급한 사정이 아니고서는 더 이상 일도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니 오랜만에 독점해도 되겠는걸. 그는 잰걸음으로 방으로 향했다.

 

덜컥.

덜컥.

덜컥-.

 

방의 문이 안에서부터 잠겨 있었다. 이게 뭐람? 코류 카게미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문을 잠그고 나왔나? 아닌데. 나 오늘 주인 방에서 잤는데. 그럼 누가 이 문을 안에서 잠갔다는 뜻인데 누구지? 생각풍선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럴 땐 방법이 있지.

 

코류 카게미츠는 머리카락을 고정한 핀을 하나 땄다. 현대식으로 만들어진 문고리인 만큼 대충 몇 번 쑤시면 열릴 터였다. , , . 캠핑으로 다져진 손재주로 몇 번 열쇠구멍을 찌르자 탁,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어느 도둑놈인지 얼굴이나 보자, 코류는 기세등등하게 문을 열었다.

 

자기가거기서나와?

 

코류는 벙 찐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와중에 자기라고 불린 그의 주인이자 연인은 자기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상점가에 갔다가 얼마만에 올 줄 알고 이런 깜찍한 짓을.

 

맥이 탁 풀렸다. 어느 도둑놈은 어느 도둑놈이야, 네 심장 도둑놈이지, 라고 말하듯이 은빛의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니, 똑바로 쳐다본 건 상관이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 당당한 시선이 좋았던 거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거, 내 옷, 아냐?

 

얼떨떨하니 코류는 주인이 입고 있는 옷을 자각하자마자 한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툭 떨어뜨렸다. 아무리 체격차가 있기로서니 이렇게 시선을 자극적으로 유인하는 옷차림이 될 수 있는 옷이었단 말인가? 물론 저 옷을 입고 주인을 꼬신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

 

주인이 실실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당황스러워요, ‘허니’? 요즘 우리 허니가 좀 불만이 많은 것 같아서 준비해봤어.

 

유독 허니, 라는 말에 힘을 주고 한 글자 한 글자를 되새기는 주인의 얼굴을, 아니 푹 파인 가슴께를 보기 힘들었던 코류 카게미츠는 자기도 모르게 문을 닫고 잠금쇠를 걸었다. 오늘은 정말로 내일 아침 집무 시간까지 놔주지 않으리라.

 

잘 먹겠습니다, 라고 인사하면 되는 거지?

글쎄에?

 

일부러 늘려 말하면서 입꼬리를 히죽이는 것이 마음의 준비는 이미 된 것이렷다. 코류 카게미츠는 떨어뜨린 꽃다발을 주워다 주인의 품에 안겼다.

 

오늘은 곱게 안 재울 거야.

어디 한 번 해보든가, 대포 씨.

그래놓고 맨날 기절하면서, 도발하는 거예요? 어쨌든, 고마워.

 

코류 카게미츠는 주인의 허리를 한 팔로 휘어잡았다. 언제라도 이런 도발이라면 환영이었다.

* 독자적 사니와 설정 있음.

 

해가 저물어 가는 때면 혼마루에는 검은 옷이 유행한다. 아직 해가 아주 넘어가기에는 두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았지만 이 혼마루가 만들어졌을 때부터의 전통 비스무리한 것이라고 했다. 유월 초순에 한 번, 시월 말에 한 번. 검은 옷의 물결이 온 혼마루를 헤치는 시기.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시기이다. 한 도파의 장으로서의 행실이 몸에 밴 그로서도 어김없이 옷장에 묵혀 둔 검은 옷을 꺼내는 시기였다.

 

혼마루의 주인. 모두가 남성형의 육체를 가지고 깨어나는 이곳에서 유일한 홍일점이자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주인은 올해에도 작년에 입었던 검은색의 발목까지 오는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이면 제가 태어나 자란 곳의 전통복을 꺼내입는 날이 절대적으로 많은 그녀는 단정한 검은 드레스를 꺼내 옷자락을 펼쳤다.

 

올해도 그때가 왔구나. 그는 어깨에 흰 깃털 무늬가 아름답게 수놓인 기모노를 걸친 채 주인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부드러운 광택의 검은 드레스는 수수하고도 품격 있는 모양새였다. 그것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본 주인은 그에게 말을 건넸다.

 

밖에서 조금만 기다려줄래요?

코토리의 말이라면.

 

그는 근시의 지정석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이내 작은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창호에 거대하다고 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주인은 조심스레 옷의 등 지퍼를 열어 한 발 한 발을 옷 속에 넣고 양팔에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그 시절에도 이런 기분이었지, 주인은 낮게 읊조렸다. 십 년은 되어가는 이야기. 십 년은 족히 채우고도 남을, 새드 엔딩으로 끝나버린 한 편의 드라마 같던 이야기. 그 속의 비련의 여주인공. 마지막 포옹. 모든 것이 꿈 같은 이야기였다.

휘하의 남사들이 이 기간이 되면 유독 검은 옷을 많이 입는다는 것이 자신의 영향임도 알고 있었다. 십 년이 되어가는 낡은 이야기를 기억하는 자는 하나일 때보단 둘일 때, 둘보다는 넷일 때 더욱 좋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차마 내놓을 수 없는 어려운 상대도 있었다.

 

당신이 들으면 뭐라고 할까. 과거에 사로잡힌 망령과 같으니 그만 잊고 새 연인인 자신에게 충실하라고 할까, 아니면 다른 남사들이 말하는 그대로, 너를 만나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할까. 첫눈에 반해버렸다는 이야기를 나지막이 하면서도 가슴 속에 여전히 가지고 있는 바깥 세계에서의 이야기를 그는 달갑게 들어줄 수 있을까, 바깥에서 다시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상대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안은 그녀는 조심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와도 돼요.

 

방에 들어온 남자의 시선에 끝이 치렁치렁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 내의가 보였다. 그는 일말의 동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다가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지퍼를 끝까지 채워주었다.

 

코토리는 이 시기만 되면 항상 이 옷차림이군. 이유라도 있을까?

하하, 할로윈이잖아요. 기분 좀 내는 거죠, .

악령의 장난을 피하기 위한 옷차림 치고는 수수하지 않니?

뭐어혼마루에 악령 같은 게 나오겠어요? 나왔다간 베일 텐데.

 

는 수수께끼를 풀고 싶었고, ‘그녀는 들키고 싶지 않아 때아닌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그나마 이 남사가 할로윈까지만 알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멕시코에서 사흘간 기념하는 망자의 날을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그는 꼬치꼬치 캐물었을 게 분명했다.

 

’. 산쵸모는 석연찮음을 느끼고 있었다. 유월은, 특히나 유월 초는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한 달이었다. 주인, 아니 연인의 부임일이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남사들은 검은 옷을 챙겨입고 주인과 함께 어딘가를 훌쩍 다녀오곤 했다. 그 행렬에 자신은 결코 지명되지 않아왔다. 아니, 이치몬지 도파 대부분은 그 행렬에 끼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주로 취임일 축하연의 준비가 맡겨졌고, 한두 해 정도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월과 시월의 이 이상한 풍습은 이 혼마루에만 있는 광경이었고, 다른 혼마루의 동일 개체를 만났던 그는 의문을 품어왔다.

 

코토리.

?

진지하게 들어줬으면 하는구나. 지금 농담하는 게 아니란다.

 

짐짓 엄한 표정으로 늘 착용하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새빨간 맹금류의 눈이 타고 있었다. 일가의 장만이 갖는 각인에도 붉은빛이 일렁였다. 주인의 은빛 눈이 도로록 구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되는구나.

기분 탓이에요. 그냥 이 옷이 입고 싶을 때가 있는 거래도.

변명은 그쯤 하렴.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실렸다. 보통 이쯤 되면 사실대로 이야기할 법도 한데 이렇게까지 숨기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 트릭 오어 트릿! 진짜 할로윈이라니까요.

코토리.

 

이제는 정말 인내심이 끓어올랐다. 산쵸모는 주인, 아니 연인의 허리를 한 팔로 끌어당겼다. 저 공단 옷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서라도 비밀을 파헤치고 싶었다. 마지막 배려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야 알아줄까, 아주 잠깐 고민한 그는 다른 손을 뻗어 작은 새의 뒷목에 있는 지퍼를 내리곤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 ! 아파요! 뭐 하는 거야.

 

침상에서의 스킨십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도 코토리는 밀어내려고 힘을 썼다. 체구가 두 배는 차이가 나니 어떤 소용도 없는 걸 알면서도 벗어나려 애썼다.

 

이 정도는 늘 하는 스킨십이잖니. 이유를 말해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마.

말할 것 없대도.

아니, 분명히 코토리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어.

 

이야기 속의 뱀파이어 백작처럼 그는 다시 이를 세우고 목덜미에 잇자국을 남겼다. 붉은 울혈이 지는데도 코토리는 이렇다저렇다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 그러니?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이거 놔요. 놓고 얘기해요.

말하기 전까진 놓아줄 생각이 없단다.

그럼 어디 마음대로 해 봐요! 나는 말할 것 없다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

 

눈을 마주치고 낮게 속삭이는 그의 동공이 바짝 졸아들었다. 코토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에게만큼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 공포의 수위가 무섭도록 차올랐다.

* 독자적인 설정이 있습니다. 열람 주의.

 

오늘도 작은 아이는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소원을 이루어주었을 뿐인데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남자는 문신을 갸우뚱 흔들며 손도 대지 않은 쟁반을 거두었다. 쟁반 위의 그릇은 무엇 하나 차게 식지 않은 것이 없다. 뽀얀 우윳빛의 쟁반덮개 위로 먼지가 몇 알 내려앉은 것을 후, 불며 그는 답이 없을 노크를 했다. 고요했다.

 

작은 아이는 살아있다. 그야 당연하다. 그가 그렇게 느끼고 있기에 작은 아이는 몇 날 며칠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서도 멀쩡히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작은 아이를 데리고 온 곳은 특수한 곳이었으니까. 삶을 느낄 수도 있고 죽음을 감지할 수도 있었다. 다만 작은 아이는 무슨 짓을 하든 결코 죽을 수 없다 그것이 그의 세계의 규칙이었기 때문에.

 

그는 손수 양송이 크림 수프를 내다버렸다. 물에 향을 온통 빼앗긴 찻잎도 미련 없이 털어버렸다. 온기를 주변에 모두 빼앗기고 남은 액체 역시 미련없이 흘려버렸다. 저 작은 아이는 이곳에 온 이후로 단 한 번의 끼니도 먹지 않았다. 그가 바라던 모든 것을 손에 쥐어주자 맥없이 그의 손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그는 그 아이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아니, 그럴 방법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원하던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것, 그것이 그의 신분으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코토리.

 

나지막한 음성이 부드럽고 달콤하게 작은 아이를 불렀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살포시 문을 열어 볼까? 그는 코토리를 저택으로 데려온 뒤 처음으로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이 문을 열고, 작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뺨을 맞대고, 손을 부드럽게 그러잡고 싶었다. 영원할 것만 같은 모래사장을 한 바퀴 돌고 온 시간이 다시 제자리에 설 동안 그는 작은 아이와 떨어져 있었다. 이렇게 떨어져 있었던 것이 얼마만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육신을 갖고 작은 아이를 만난 뒤로 그는 작은 아이와 언제나 한 몸이었던 가지처럼 붙어 지냈기 때문이다.

 

집이 갖고 싶어.

 

작은 아이의 입버릇이었다. 여기가 네 집이잖니. 넓은 툇마루를 가리키며 그는 다정히 지저귀곤 했다.

 

여기 말고, 온전히 내 소유의 집.

 

그렇구나. 너에게는 이곳에서 너만을 따르는 이 모두가 네 소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구나. 그는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을 골똘히 생각했다. 작은 아이의 소원은 곧 자신의 소원이었다. 온전한 나의 소유를 갖는 것. 그래서 그 작은 아이를 제 소유로 더했다. 과정은 지난하지만은 않았다. 그저 약간의 눈속임으로 충분했다. 작은 아이는 손쉽게 그가 쳐놓은 새장에 제발로 들어왔다.

 

소리없이 문이 그 입을 벌렸다. 조금의 틈새로 큰 발을 들여놓은 그는 조용히 작은 아이의 방 안을 바라보았다. 작은 아이의 앞으로는 사람의 머리 형상을 한 것이 여럿 놓여 있었다. 주먹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머리들은 형상이 다양했다. 몇 개는 눈을 부드러이 감고 있고, 몇 개는 한쪽 눈을 살포시 감은 채 웃는 상을 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전설 속에 나오는 요정처럼 뾰족한 귀를 하고 있었고, 어떤 것은 양쪽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머리 뚜껑이 열린 것들은 그 형상이 뒤집힌 채 작은 아이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림잡아 수백 개는 될 법한 머리! 작은 아이가 눈여겨보았던 형상들은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진열해놓은 그 자리에 작은 아이는 없었다.

 

작은 아이는 그 모두를 뒤로하고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는 의아함을 표하지 않으려 애쓰며 침상 옆의 조그만 의자에 걸터앉았다.

 

코토리.

 

부드럽고 낮은 음성이 다시 작은 아이를 불렀다. 꿈의 틀에라도 끼인 것인지 작은 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음성이 작은 아이를 불렀다. 여전히 작은 아이는 꿈틀하지 않았다.

 

일어나렴.

 

그는 귓가에 숨을 후, 불어넣었다. 작은 아이가 눈을 떴다. 은빛의 눈동자에 졸음이 가득 묻어 있었다. 저택에 와서 눈을 뜬 것이 몇 번째인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던 작은 아이는 미간을 찡그렸다. 여기는 내가 원하던 곳이 아니야. 작은 아이는 고개를 젓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

 

그의 인내심은 동났다. 얼굴에 새겨진 문신은 이미 붉게 탄 지 오래였다. 뺨에 느껴지는 은은한 작열감이 그의 고양되었음을 아까부터 알리고 있었다. 기껍고도 사납게 타는 불꽃은 그의 손을 타고 흘렀다. 그는 이불을 걷었다. 붉은 공단 이불이 사라락 소리를 내며 걷히고 순수하디 순수한 우윳빛을 띤 잠옷이 드러났다.

 

한때 꿈을 꾸듯 선명하게 빛나던 은색 생명력은 사그라든 채였다. 눈을 떴지만 여전히 잠에 들어 있는 것만 같은 빛을 띤 회색빛에 그의 얼굴이 가득히 반사되었다. 조그마한 색 바랜 입술에 그가 머물렀다 떨어졌다. 회색 눈에서 물기가 또르륵 굴러내렸다. 스스로도 영문을 모르는 이슬이었다.

 

코토리, 네가 원하는 것을 모두 준비해 주었잖니.

 

코토리라고 불린 작은 아이는 빛이 꺼진 눈으로 방을 휘 둘러보았다. 붉은빛의 고급스러운 벨벳이 내린 벽이 그 눈에 들어갔을까. 코토리는 자그마한 발로 바닥을 짚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을 만큼 푹신한 카펫이 그 발에 감겨들었다. 코토리는 그가 준비해놓은 작업대에 올라앉았다. 그러나 붓을 잡지는 않았다. 그가 준비해놓은 수많은 조각들에도 무심한 눈길을 줄 뿐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작은 아이에게 다가갔다. 작업대 앞에 앉아 무심히, 공허하게 허공에 뜬 시선을 가슴에 안았다. 가슴에 가만히 귀를 가져다댔다. 작은 아이에게 어울리는 작은 심장이 콩, , , 느릿하게 뛰었다. 작은 아이의 몸은 따뜻했지만 차가웠다. 가녀린 팔이 작동하듯 그를 마주안았다.

 

그래. 그거면 된단다.

 

그는 작은 아이와 뺨을 맞대고, 손을 부드럽게 그러잡았다. 철저하게 하나처럼 뛰는 고동이 낯설었다. 잿빛 눈에 다시 그가 비쳤다. 초점이 붕 뜬 눈조차 자신이 비치는 것이 그토록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수많은 안구 없는 눈 사이로 그림자는 하나로 겹쳤다.

 

 

* 독자적인 혼마루 설정이 있습니다.

* 코류 카게미츠 x 사니와

* 타 장르 언급이 있습니다.

 

눈을 뜨니 낯선 공간이다. 내 혼마루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는 의문도 잠시, 같이 있는 커다란 짐승 같은 몸집의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저놈이 기어이 일을 저질렀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놀라서 펄쩍 일어났다.

 

일어났어?

, , 무슨 짓이야.

대뜸 무슨 소리야?

 

녀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묻는다. 금발의 머리카락이 챠르륵 흔들린다. 저 영롱한 보라색 눈에도 의문이 가득한 걸 보니 일단 날 속이고 있는 건 아니다. 무슨 영문인지 나만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싶었다.

 

잠깐 졸았다 싶었는데 이런 데 와 있으면 당연히 의심부터 하지 않겠어?

, 나 그렇게 신뢰도가 떨어진 상태야?

 

근시는 그렇게 물었다. 아니, 신뢰도가 떨어졌다기 보다는 이런 방면에서는 신을 믿을 수 없다던가, 하는 소리를 주절거리며 나는 방문으로 향했다. 아니, 방문으로 보이는 것을 찾아야만 했다.

 

뭐야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야?

나도 몰라.

너가 모르면 난 어떡해?

날 믿어주는 건 좋은데 같이 낮잠 잔 뒤로 눈을 뜨니 여기였다는 기억뿐이야. 나도.

 

좀 믿어달라는 식으로 녀석의 눈이 가늘어진다. 어쩌겠는가. 나갈 방법을 찾아야 혼마루에 돌아가서 남사들에게 영력도 불어넣고 신입을 단련시킬 텐데 이건 나갈 방법이 보이질 않는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나갈 문이란 건 보이지 않고 네모난 벽과 널려 있는 가구들 뿐이었다. 이러다 하얗게 머리가 미쳐버릴 것 같은데 공기는 어디서 들어왔다. 덜렁 누워 천장을 보니 조명도 없었다. 그럼 어디서 빛이 공급되고 있다는 뜻인데 이 말도 안 되는 공간을 부수고 나갈 방법은 없을까?

 

그거 이미 해 봤어. 안 부서져.

너 내 속에 들어갔다 나왔니?

나 자기 표정만 보면 이제 무슨 말 할지도 알거든.

하긴 그렇긴 하다.

 

몇 년간을 인간과 사귀고 있었는데 인간적인 표정 몇 개를 못 읽으면 말이 안 되지. 나는 생각을 읽는 용 한 마리와 함께 벽을 두드리기도 하고, 천장도 두드려 보았다.

 

자기, 살 쪘어? 요즘 빵 좀 먹더니.

시끄러워.

좀 무거워진 것 같은데. 한 근 정도?

나가서 확인해보자 그래. 아니기만 해봐.

 

천장을 확인하는데 갑자기 좀 무서워졌단 소리를 한다. 그야 최근에 좀 많이 먹긴 했다. 그렇지만 직언을 이렇게 퍼부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확 무릎으로 목을 꾹 눌러버릴까 하다가 신인 녀석에게는 소용도 없다 싶어 그만두었다.

그렇게 실없는 말도 몇 마디였다. 두어 마디 더 나누다 말고 이거 못 나가면 어떡하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났다. 신인 녀석이야 상관없다지만 인간인 나는? 화장실이 가고 싶다거나, 씻어야 한다. 시간이 되면 밥도 공급해 줘야 한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졌다.

 

소룡아, 여기 못 나가면 어떡하지?

그런 소리 하지 마. 내가 부서지더라도 데리고 나갈 거니까.

그게 더 무서워.

그러니까 일단 침착하자.

 

방을 탐색하던 나는 심호흡부터 했다. 패닉에 빠져봐야 남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요전번 다른 방에 갇혔을 때 뼈저리게 배웠기 때문이다. 이런 함정 같은 방이 왜 혼마루에 만들어지는지 정말 괴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한 번씩 잊을 만하면 이런 방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뭘까?

 

자기.

.

왜 갇혔는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우리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기야 하지.

 

하얀 방에 널려 있는 가구가 누구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방에서 나가려면 당연히도 저 가구까지 뒤져서 뭐라도 찾아내서 나가야만 했다. 일단 오늘 켄신도 껴서 만방에 나가기로 했는데 이대로라면 오늘이 아니라 오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도록 못 나갈 게 뻔했다.

 

그렇게 방을 뒤지기 시작한 우리는 가구를 옮기네 가구 서랍을 뒤지네 온갖 쇼를 했다. 방은 깨끗하게! 정말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제 남은 거라곤 덮고 있던 이불뿐이었다. 어쩌겠는가. 저것도 탈탈 털어봐야지.

 

하나.

.

.

 

펄럭펄럭 이불을 흔들자 바스락 소리와 함께 종이가 하나 떨어졌다. 처음 보는 꼬부랑 글씨체로 쓰여 있는 말은 하나였다.

제일 좋아하는 모습 말하기

…….

우리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어제만 해도 밤늦게까지 음악 감상하느라 소홀했던 벌을 이렇게 받는구나 싶었다. 상대방의 제일 좋아하는 모습이라니 일단 코류의 입부터 막아야 했다. 저 폭탄 같은 입술 속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웠다.

 

잠깐만, 소룡아. 몸 좀 낮춰 봐.

?

네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워.

자기 제일 좋아하는 모습이야, 좋아하는 걸 한껏 좋아하고 있을 때의 모습인데.

철컥.

뭔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는 모습에 턱 빠지는 줄 알았다. ? 당장 어제만 하더라도 굉장히 부루퉁해 있던 녀석이 맞단 말인가?

 

*

사건은 그제부터 시작이었다. 좋아하는 쇼 레스토랑 싱어들의 네 번째 정규 앨범이 발매되었다. 혼마루까지의 배송은 정부의 검열을 거치고 해야 해서 한 일 주일쯤 걸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외로 검열이 빨리 끝났다. 골든위크에 안 걸렸다. 당연히 내 입꼬리는 귀에 걸리고 코류는 샐쭉해졌다.

 

그렇게 걔들이 좋아요?

 

샐쭉해질 때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존댓말을 써가면서 말하는 우리집 소룡이는 올해에도 그렇게 부루퉁해했다.

도대체 거기가 뭐 하는 곳이길래 현세에 갈 때마다 들리냐고 하도 궁금해하길래 한 번 데려갔었더니 그 뒤로 경계심만 더욱 높아져서 팬의 마음이 맞냐는 둥 무대 위에서 그렇게 근육을 드러낸 모습이 맘에 든다면 나도 배까지 드러냈어, 라고 얘기할 정도로 좋아하는 걸 썩 내켜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 곳에서 네 번째 앨범이 배송이 왔다니, 그것도 풀 패키지로. 소룡이가 싫어할 만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패키지를 열고, 리핑하고, 한 곡 한 곡 감상평을 남겨 다이어리에 적는 모습을 썩 기분좋지 못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니 놀랠 노 자였다.

*

 

그런데 뭐? 내가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모습이 맘에 든다고?

그 건은 예외고. 지금 그런 표정도 좋아해.

 

입을 막아야 할 폭탄 발언보다 이게 더 위험했다.

 

켈록켈록, 너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지?

신은 밥 안 먹어도 돼요. 탈도 안 나요.

그건 부러운데, 여하간 뭐라고?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자기 모습이 좋다고.

 

철컥.

아무리 생각해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거짓말은 아닌 모양인데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너 내가 앨범 오고 신나할 땐 불퉁했잖아.

외간 남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 때까지 뾰로통해하지 않으면 내가 연인이라고 불릴 수 있겠어?

그야, 그렇지만.

얼른 자기도 내가 좋은 이유 하나만 말해줘. 안 그러면.

 

코류는 귀에 가까이 다가와 바람을 훅 불었다.

 

내보내줄 때까지 장난칠 거야.

, 알았어! 솔직하게 얘기할게. 자유분방한 네 심성이 좋아.

 

찰칵-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벽 하나가 슥 미끄러지며 열렸다. 바깥에는 콘노스케가 기다리고 있다 뛰어들어왔다. 유부를 꽤나 많이 먹였더니 처음 혼마루에 왔을 때보다 윤기도 나고 부드럽고 묵직해진 게 이 녀석도 자라는가보았다.

 

우왓! 알겠어! 진정해!

 

가끔 이럴 땐 콘노스케가 강아지 같아서 마구 쓰다듬었다.

 

*

남사들의 환영과 함께 집무실로 돌아왔다. 몇 시간 동안 원정과 역행군 사냥을 마친 이들의 전과 보고를 듣기 위해서다. 코류도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집무실의 작업용 BGM을 깔았다. 문제의 그 앨범 중 열다섯 번째 트랙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곡이 음원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또 그 곡이야?

 

아까의 멜로눈을 하고 네가 좋아하는 걸 좋아할 때가 좋다던 작은 용은 새초롬한 눈으로 이쪽을 귀엽게 흘겨보았다. 단단히 미쳤지. 저 모습이 귀엽다니.

 

그렇게 귀엽다고 쳐다봐도 말야.

 

코류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곤 내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노래를 듣는 건 좋은데 업무는 똑바로 해줘. 사인을 할 곳이 그 쪽이 아니잖아요.

 

그리고는 만년필을 쥔 손을 겹쳐잡곤 사인할 곳을 가리켰다. 향이 훅 끼쳐들어오면서 코끝이 아찔했다.

.

뮤직 플레이어가 멈췄다. 어느새 사인이 된 서류더미 위로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꿈인 줄 알았어. 정말이지,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바다에 발을 담그고 있던 사니와가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난 주, 가타부타 말도 없이 오밤중에 나타나 고백한 사사누키의 기행에 대한 회포를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참동안 답이 없었다. 사니와는 고개를 들고 옆을 쳐다보았다. 분명히 옆에 있었던 도검남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사샤? 사샤?

 

사니와는 사색이 된 채로 놀라 일어났다. 분명히 조금 전 수박 조각을 아삭아삭 먹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나란히 앉아 분위기도 좋은데 술이라도 가져올까~ 하던 도검남사가 잠시 연못을 보는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디로 갔담?

 

영문을 알 수 없게 사라진 사사누키의 행방을 찾기 위해 주인은 급히 신발을 발에 꿰었다. 마음이 급한 이상 하얀 샌들이 제대로 신겨질 리 만무했다. 두어 번 왼쪽과 오른쪽을 바꿔 신기를 반복한 주인은 골이 난 얼굴로 맨발로 해변에서 일어섰다. 조각조각 잘라놓은 수박과 참외가 놓여있던 접시를 한 손에 들고, 한 손엔 신발을 들고 정처없이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정신없는 일주일이었다. 끽소리도 못 낼 만큼 강한 포옹으로 제 의견을 표출하는 남사는 여태껏 없었다. 저기 멀리 동동 뜬 접시배처럼 굴더니 갑자기 거리를 좁혀와서는 찰싹 달라붙어 있는 이 남사와의 일주일은 참으로 스릴이 넘쳤다. 콕콕 몇 번 좀 찔러봤다고 뱀 나올지도 몰라? 라더니 진짜로 팔을 뱀처럼 휘두르는 모습을 보여줄 줄은 몰랐었다.

 

,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는데.

 

사니와는 연대전을 위해 옮겨온 여름 별장 부엌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포크 두 개가 가지런히 놓인 것이 이마저도 그와의 추억인 것 같아 왠지 모를 흡족함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는 신발을 고쳐신고 다시 물가로 나아갔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그는 다시 자신을 찾아오고야 말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편하게 찾아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사샤, 사샤.

 

여러번 불렀지만 답은 없었다. 바다는 조금 무섭다더니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사니와는 아까의 그 자리로 향했다. 바다에 버려졌다던 이야기 때문에 바다가 두려울 그에게 바다가 무섭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던 사니와였다. 절대로 나는 너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주고 싶었는데.

 

어디로 가 버린 거야 대체.

 

볼멘소리를 한 마디 뱉은 사니와는 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수면에는 한 사람분의 그림자만 비치고 있었다. 두 사람분의 그림자가 비치면 좋을 텐데. 무의식적으로 사니와는 수면 위에 두 사람분의 그림자를 그리고 있었다.

 

보고 싶어.

 

십 분, 이십 분을 그렇게 서 있었을까? 사니와가 기다리는 도검남사는 사니와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그 말대로 일주일을 족히 붙어있던 사이에 사라지고 나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뙤약볕이 내려오는 시간이었다. 팔이 따가웠다. 기다리는 것을 멈추고 슬슬 들어가야 할까, 고민하던 사니와는 얇은 겉옷을 걸치고 수면을 빤히 바라보았다.

 

기다렸어?

우왁!!!!!!!!

풍덩.

 

동시에 세 개의 소리가 해변을 메웠다.

 

아하하, 미안, 미안.

 

가 서 있었다. 기척도 없이 등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림자 하나가 물에 어리는 것을 보자마자 사니와는 실제로 놀라자빠져서 물속으로 다이빙했다.

 

내가 나온 게 그렇게 놀라운 일이야?

 

사사누키는 한쪽 팔에 서핑보드를 끼고 당혹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사니와는 한참 첨벙대더니 물을 털며 물 바깥으로 일어나 나왔다.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오니까 그렇지. 츠루마루도 아니고.

아하하, 미안. 그럼, 사과하는 김에 같이 서핑이라도 해줘.

나 서핑할 줄 몰라.

가르쳐 줄테니까. , 여기.

 

사사누키는 서핑 판을 팡팡 두드렸다. 꽤나 웃긴 모습으로 물에 빠진 주인을 보고 웃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사니와는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사사누키를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한번 해 보면 재미있다니까. 바다가 무섭다는 것도 잊어버릴 수 있어. . 어서.

 

사사누키는 빈 손을 사니와 쪽으로 내밀었다. 파도 밖으로 기어나오듯이 나온 사니와는 그 손을 잡았다. 열에 데워져 따뜻했다. 하얀 손과 그을린 손이 얽혀 물 위에 하나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파도는 끊임없이 들이쳤다. 먼저 보여준다던 사사누키가 멋지게 파도를 타고 돌아왔다. . 평소에도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좀 많이 멋졌어. 사니와는 솔직하게 감상을 드러냈다.

 

, 여기 타 봐.

 

그는 바다 위에 서핑 판을 띄우곤 사니와를 향해 손짓했다. 어차피 젖은 거 들어가나 보자, 지금보다 더 웃기게 떨어지겠어? 사니와는 물 속으로 들어갔다.

 

이거 뒤집히면 어떡해?

내가 잡아줄 테니까 걱정 마. 너무 겁먹으면 흔들어 떨어뜨릴지도 몰라?

이봐!

하하, 장난, -!

 

한 손을 들고 와하하, 밝게 웃는 얼굴에 누가 졌겠는가. 먼저 좋아한 사람이 지는 거다. 사니와는 조심스럽게 서핑 판에 몸을 실었다.

 

처음부터 어려운 걸 해보라고 하지는 않을테니까~

 

사사누키는 가볍게 웃었다.

 

일단은 몸과 서핑보드의 수평을 맞추고. . 그렇게 손으로 저어나가는 거야. 어이쿠.

 

운동신경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보고 배운 것은 잘 따라하는데 이상하게 이런 건 못하는 사니와였다. 사실 어릴 적에 스케이트보드도 못 타서 넘어지기를 반복하다 그만뒀던 사니와는 서핑보드 위에서도 균형을 잡지 못해 넘어져 버렸다.

 

어푸푸-.

어어, 괜찮아? 물 안 먹었어?

안 먹었어.

, 그럼 다시 해 보자.

 

생각보다 사사누키는 좋은 선생님일지도 몰랐다. 첫술에 배부른 건 없으니 다시 하면 돼~ 하고 느긋하게 말하는 것이 말이다.

 

둘은 그렇게 한두 시간쯤을 서핑보드 위에서 균형을 잡는 데에 몰두했다. 수면에 비친 두 모습을 이글이글 타오르던 태양조차 흐뭇하게 바라보느라 낮이 길어진 어느 날이었다.

 

분명히 의도대로였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을 것이었다. 만듦새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고 대나무 숲에 버려버리다니, 갓 태어난 아기를 버려서 죽기를 바람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날붙이로서 그를 따라다니던 수식어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며 육신을 입은 사사누키는 이번에 제가 돌아와야 할 곳을 휘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쳤던 이번 대의 주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검을 수집하는 것으로는 과거에 만난 주인들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인간이 하나, 도검이 족히 백은 되어 보이는데도 제련소에서는 매일같이 새로운 검을 치고, 본성의 자원을 충당하기 위해 탐욕도 부렸다.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도검남사는 있었으나 그에 대해 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여기가 새 집이란 말이지.”

 

사사누키는 자신의 몸을 움직여보며 혼자 말했다. 담담하게. 눈을 마주치긴 했지만 그 주인이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를 보는 눈빛이 거슬렸다. 그래서 새롭게 얻은 육신이 지내는 본성을 돌아올 곳으로 결정했다. 그뿐이었다.

 

주인의 눈빛은 여느 도검남사를 보는 것과 달랐다. 그것만큼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보는 눈과 그들을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손에서 놓아버릴 징조. 사사누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인간에 대해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떠나갈 존재들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손에서 놓아버릴 존재들이었다. 어차피 어느 순간엔 자신을 버리고야 말 존재였다. 거기에 주인이란 백 자루의 검을 통솔하는 입장이니 하나쯤은 선물로 줘버리거나 하면 다행이고 어디로 사라져도 모르지 않겠는가.

 

언제 어디에 버리더라도 자력으로 돌아올 준비는 되어있지만 돌아올 곳은 본성이지 저 주인의 손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

 

분명히 시작은 동정이었다. 버려졌던 검. 수차례 버려졌던 검이라는 내력을 조사해보고 나서는 아직 도검남사로 불러내지도 않은 검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불러내고 나서 표표하게 빛나는 푸른 눈에 그대로 비쳤으리라. 그 눈엔 여느 설화를 거느린 검들이 거느린 자부심도, 도검남사로서의 사명도 빛나지 않았다. 별 기대 없는 눈. 그 눈이 저를 옭아매는 밧줄이 될 거라고 사니와는 생각하지 못했다.

 

연민이었다. 버려짐의 아픔을 아는 사람에게 그의 눈은 뚫을 수 없는 장벽으로 보였다.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온전히 버려졌다는 아픔을 아는 사람에게 그의 눈빛은 넘을 수 없는 높은 산이었다.

 

그래서 넘고 싶었다.

 

연민과 동정은 그를 찾게 했다. 거처에 자주 발걸음하고, 당번으로 근시로 그를 자주 내세웠다. 버려진 검이라는 상처를 더는 안고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육신을 입었으니 아침해를 맞고 밤별을 맞이하는 감상이 그에게도 빛나게 다가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라났다. 적어도 내가 죽을 때까지는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심정이 전해지기를 바랐다.

 

사샤, 사샤.”

 

여느 남사에게 대하듯 애칭을 지어 부르고 슬쩍 상점가를 갈 때 호위로 지정하고, 그가 시야 안에 들어오도록 하루를 조정했다. 분명히 처음엔 안타까움이었다. 그러나 습관처럼 그를 눈 안에 두고 보니 순간순간 어떤 사명감이 자라났다. 주인으로서 그를 지키고 싶었다.

 

*

 

기분이 나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물건, 그 물건에서 피어오른 물상신, 부리는 사람의 명령을 따르다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건 떠나면 물건으로 돌아가야 할 ’. 그런 것이 자신이었다. 그래서 별 기대가 없었다. 육신을 입자 일정한 박자를 타고 뛰는 심장도 신기할 것이 못 되었다. 아침이면 해가 떠오르고 저녁이면 별이 떠오르는 것도 별 감흥 없는 일이었다. 싸우고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그랬던 그는 주인의 명령을 즐기지 못했다.

 

어차피 가만히 놔두고 방치해도 곁으로 돌아가고야 말 불길한 소리를 하는 도검남사 따위를 자꾸 그 시야 안에 두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름을 두고 괴상한 별명으로 부르고, 시야 안에 두려고 하는 주인의 의도야 빤했다. 상점에 데리고 가서 선물을 사준다거나 하는 행동도 때로는 별 의미없이 느껴졌다.

 

*

 

사샤, 이거 받아.”

어느 날 주인은 그에게 뭔가를 건넸다.

 

남사의 본분은 역행군과의 싸움이라지만 너를 싸움에 매번 보내고 싶지는 않네.”

궤변이다. 시간역행군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육신을 입을 일조차 없었을 그였다.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해.”

주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 무슨 일이 생겨도 나는 여기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

돌아오는 건 특기라고? 사사누키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래도. 말야. 잠깐 겉옷 좀 빌려 줘.”

 

주인의 이런저런 명령들에 비하면 별것 아닌 부탁이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겉옷을 벗어주었다. 주인은 오마모리 하나를 꺼내놓았다. 금실로 마감된 부적 위로 사사누키의 문양이 수놓여 있었다. 주인은 부적을 갈무리해서 옷자락에 넣고 다시 바느질했다.

 

꼭 돌아와야 해.”

주인과 눈이 마주친 것은 그것이 두 번째였다.

하하, 우리 주인은 걱정이 지나치네. 반드시 돌아온대도.”

 

눈빛이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

 

오늘의 근시는 사사누키.”

자네, 오늘도인가?”

 

전투부대를 이끌고 여름 연대전에 다녀온 츠루마루 쿠니나가가 어깨를 으쓱했다. 끼고 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주인은 사사누키를 불러낸 이후 자주 근시로 임명했다.

 

그냥. 그럴 이유가 있어.”

자네 그러고 보니 요즘 눈빛이 많이 변했다만.”

츠루가 보기에도 그래? 아하하. 그렇지만.”

 

사니와는 눈을 초승달처럼 휘어가며 고개를 돌렸다. 웃으면 참 예쁜 얼굴이었다. 동그란 눈은 초승달처럼 휘고, 입술 새로 앞니가 살짝 보이는 예쁘장한 얼굴. 그 얼굴이 요즘 향하는 곳이 화제의 신입이라는 걸 모르는 고참 도검남사가 더 드물었다.

 

처음 신입을 데려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일세.”

농담하지 마, 아니, 농담이 아닌가.”

, 자네가 알아서 처신하겠지.”

 

사니와로 지낸 7년이 넘는 시간만큼 신뢰를 쌓은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무슨 일이든 사니와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자리를 비키며 마침 그 근방을 지나던 사사누키를 불러세워 귀엣말을 전하곤 높은 수압의 물총을 챙겨 나갔다.

 

*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발걸음이 본성이 아니라 주인에게 향하고 있었다. 부적을 받은 이후부터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겉옷을 떼어놓기도 했지만 머리와 발이 따로 놀았다. 해가 뜨면 근시임을 빙자해 주인에게 향했고, 별이 뜨면 호위를 핑계 삼아 주인이 보이는 반경 안에 머물렀다.

 

이해할 수 없었다. 주인의 눈빛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기엔 단 두 번밖에 눈을 마주친 기억이 없었다. 개연성 없는 소리였다. 어차피 언젠가는 나를 버릴 인간, 이라고 습관적으로 생각했던 마음의 소리는 언젠가부터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저 눈이 진심이겠냐는 생각이 어느 순간 기울어 절벽 아래로 떨어져가고 있었다. 발길이 저도 모르게 한 점으로 좁혀가고 있었다.

 

*

 

벌컥, 문이 열렸다. 오랜만의 야근을 하고 있던 사니와는 문을 열고 들어선 그림자의 존재에 깜짝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한 쌍의 눈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이내 사니와는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반겼다.

 

어서 와, 사샤. 할 말이라도 있어? 이 시간에 웬일이야?”

 

성큼성큼 그가 걸어왔다. 집무실의 책상에 가로막혀 대나무 사이에 갇힌 꼴이 된 사니와는 그에게 무슨 일이냐며 다급하게 물으며 파닥파닥거렸다. 병아리 같았다.

 

*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 꿈인 줄 알았다. 그는 병아리 모양으로 파닥거리는 제 주인을 억센 팔로 힘껏 안았다.

 

오늘 원정은 4지역의 2, 4번 담당이야.”

.”

출진은 전력확충계획 2, 아즈키 나가미츠 탐색 지역이고.”

……? .”

이봐, 주인. 듣고 있어?”

뭐라고?”

 

하아, 내가 미쳐. 코류 카게미츠는 요즘 잦아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즘 따라 주인은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근시인 자신의 말도 제대로 듣지 않고 있었다. 1부대 대장과 근시를 분리해 지정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하냥 기뻤다. 누가 전투에 나가든 주인의 곁을 지키고 앉아 총애받는 용용이로 지낼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주인이 딴 생각에 빠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코류 카게미츠는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야말로 거의 울기 직전의 모습으로 자신을 맞이했던 주인이었다. 원정으로 몇 시간 자리를 비우는 것도 견디지 못해서 혼마루 시간으로 10분짜리 원정도 보내지 않는 주인이었다. 아무리 수행을 위해서라지만 나흘간 자리를 비우는 것도 기다리고 싶지 않다며 (허가된 일이지만) 수행용 전서구를 날려 혼마루의 시간을 멋대로 돌려버리고, 단 한 번도 1부대 부대장에서 해제한 적도 없는 주인이었다. 하다못해 자신은 어떤가? 전공으로 따져도 당당히 목록 첫 페이지에 이름이 올라 있는 상태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생각은 무슨. 별 것 아냐.”

 

과거의 어느 시점 같으면 사근사근 웃는 얼굴로 네 생각 하고 있지, 라고 답변하던 사랑스러운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요즘은 시큰둥하게 원정을 보내고, 내번을 보내고(그 내번 담당도 몇 달째 바뀌지 않아 다이한냐 나가미츠의 볼멘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전투에 나가는 남사들에게 다치지 말라는 말도 없었다. 이게 매너리즘인가? 너무나도 오래된 일상에 권태감을 느끼는 건가? 그러다 보니 나에게서도 멀어진 건가? 헌신짝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으로 남사는 원인을 곰곰이 되짚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시작은 작년 즈음부터였다. 새로운 도검남사가 자주 충원되는 것도 아니던 시절, 시간정부에 불만을 품은 주인은 현세와 연결된 단말에 이것저것 새로운 걸 깔기 시작했었다. 몇십 개의 어플리케이션이 단말에 깔렸다, 지워졌다를 반복했다.

 

이건 랭킹이 있네, 아웃. 이건. 가챠가 너무 답이 없어. 안 할래. 이건내 사회적 명예가 걱정되는데? , 그거? 이벤트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지웠어. , 그거? 플레이어를 너무 막 대해서.

 

잠시간의 일탈이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주인이 야금야금 책장을 하나 비우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게 책을 좋아하다 못해 껴안고 살던 주인이 몇 권을 사니와마켓에 내놓더니 안 팔리는 책을 버렸다. 카센 카네사다의 기쁨의 목소리가 아직까지도 귓전에 들릴 것 같았다. 드디어 주인이 책을 베고 사는 게 아니라 사람 사는 방을 만들고 있다면서! 하지만 늘, 일 보의 후퇴는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렇게 비워버린 책장 한 켠에 CD와 태피스트리와 인형들이 가득 차기 전까지 아무도 문제라고 느끼지 않았었다. 도검남사들이 느끼기에도 시간정부가 제대로 업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

 

문제를 알아차린 것은 역시 주인 곁에서 365일을 보내고 있던 코류 카게미츠였다. 안 하던 외국어 공부를 하겠다고 설치지를 않나, 갑자기 만방에서 원고지 뭉치를 싸들고 오질 않나, 오늘처럼 딴 생각을 하느라 원정 부대와 출진에 대해서도 제대로 듣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질 않나. 갑자기 시찰이라도 나오면 이건 혼마루 방만 경영이라고 경고라도 먹을 것 같은 기세로 대충대충 일하면서 주인은 단말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주인이 빠진 것은 각종 리듬게임이었다. 단말기 상단에서 떨어지는 표식들을 타이밍 좋게 맞춰서 점수를 따는 게임. 대사 한 줄 없이 그림만으로 상황을 전달하는 리듬게임까지는 봐줄 만했다.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상정하고 인류를 지키기 위해 인터넷에 접속한다는 내용의 게임도 괜찮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것도 하고많은 게임 중에서 도검남사들과는 다른 매력을 지닌 남성 캐릭터들만 우글우글한 게임! 처음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겠거니 했다. 코류 카게미츠를 눈앞에 두고도 원래 일대일의 관계라는 건 구시대적 발상이라며 다른 남사들을 과도하게 칭찬하다가도 결국 자기에게 돌아오는 그런 바람이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책장을 치우고 새로 채우고, 굿즈를 사고, 그 굿즈에 입을 맞추고. 코류 카게미츠로서는 식지 않는 주인의 바람에 아주 돌아버릴 노릇이었다.

 

내일부터 라이브야. 방해하지 마.”

주인, 지금은 전시상황이다만.”

전쟁 중에도 휴가는 있는 법이야. 정말 급한 일이라면 내가 정신줄 놓고 라이브만 보고 있을까 봐?”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오죽하면 주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던 야만바기리 쿠니히로마저 주인에게 지금은 전시상황이라는 점을 일깨워줘야 했다. 하지만 주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내가 너희들을 그렇게 나약하게 키웠냐고 일갈까지 했다. 아니, 7주년을 맞은 사니와라지만 해도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기가 찼지만 시간정부의 하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올해도 글러먹은 듯했다.

 

어쨌든, 주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코류 카게미츠의 말을 말 그대로 반쯤 씹었다’. 차라리 포기가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포기도 안 되는 제 심정을 어쩔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내 지시 없어도 이제 너희들 알아서 잘 하잖아.”

수리는 네 손을 거쳐야 하거든.”

그 외의 시간은 좀 놔두면 안돼?”

“‘주인을 어떻게 그냥 놔둬?”

그래그래. 네 주인이긴 하지.”

 

어디의 공주님이기도 하고 말이야. 주인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콱 씨. 조화라도 부려서 저놈의 뽑기를 아주 폭망하게 만들어 버릴까. 코류 카게미츠는 주인의 건성을 더 견딜 수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 놔.”

.”

그 단말기 이리 내.”

싫어, 내 건데 왜?”

자기는 내 거잖아?”

?”

 

말도 안 되는 궤변인 줄 알면서도 코류는 단말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게임의 이벤트 기간이라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었다. 주인이 손을 뻗었지만 코류의 팔이 조금 더 길었다.

 

!”

.”

 

주인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이까지 코류 카게미츠는 단말기를 들어올렸다. 원체 키가 작은 주인이라 조금만 들어올려도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이에 도달했다. 씨익 웃는 얼굴에 장난기가 돌았다.

 

자기야, 이거 그대로 던지면 어떻게 돼?”

넌 나한테 죽을 줄 알아.”

, 살벌하네에. 그런데 그럴 수 있어?”

?”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 자기 내 얼굴에 약하잖아.”

지금 굉장히 강해진 기분이거든?”

어디 한 번 해봐, 그럼. -챠지한 미스터 챠밍 리틀드래곤의 진심을 얕보지 말라고.”

 

그는 한 손에 단말기를 든 채였다. 얼굴에 진심이 가득했다. 보랏빛 눈은 장난스럽지만 진지했다. 이 새끼 이거 그대로 일 치겠는데. 주인의 머리에 번개가 일었다.

 

바라는 게 뭐야?”

주인 잃은 도검남사가 바라는 게 뭐겠어?”

똑바로 말 안 해?”

. 알 때까지 말 안 할 거야.”

용가리 너 진짜!”

 

주인은 의자 위에 올라가서 손을 뻗었다. 코류 카게미츠는 솜씨 좋게 팔을 휘두르며 단말을 빼앗은 손을 잡히지 않으려고 했다. 결국 주인이 모서리를 잘못 밟고 휘청했다.

 

, 위험하지 위험.”

!!!!!!!!!!!!!!”

 

코류 카게미츠는 너무나도 익숙한 손짓으로 주인을 받아내었다. 졸지에 팔에 매달린 빨래 꼴이 된 주인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그는 두르고 있던 모포로 주인을 꽁꽁 싸맸다. 아기는 포대기에 꽁꽁 감싸놓으면 조용해진다. 자그마치 800년은 묵어버린 도검남사에게는 주인도 아기와 별다를 것이 없었다. 바둥거리던 주인은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걸 느끼고 얌전해졌다.

 

오늘은 우리 자기, 나랑 시간 좀 보내야겠어𝅘𝅥𝅮”

 

그는 조용히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단말기를 버려놓고 방으로 향했다. 단말기에서는 여전히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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