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웃는다. 주인의 입술이 곡선을 그린다. 연지를 찍지 않아도 앵두 같은 색깔이 빛나고, 사이가 열리며 커다랗고 하얀 앞니가 드러난다. 동그랗게 모였다가, 다물었다가, 다시 동그랗게 벌어지기를 두어 번 반복한다. 귓가에 목소리가 맴돌기 전부터 남사는 주인 쪽을 바라본다. 입 모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필요한 것이 있거든,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고 부르라, 목소리가 닿는 곳에 있겠다던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주인은 저를 부를 것이고, 그를 위해 가까이 다가섰다.
“토모에-.”
늦지 않기 위해서, 토모에는 성큼성큼 주인의 곁에 섰다. 불렀나. 기복이 크지 않은 목소리를 확인한 주인은 본성 근처에 있는 현세 도서관에 가기를 청했다. 책에는 인간의 상상력이 온전히 담겨 있다. 수백의 사람이 글을 썼다면 수백의 삶이 책에 녹아들어 있다. 어떤 사고의 결말이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종잇장 안의 세상에는 놀랍다면 놀라울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주인이 원하는 곳엔 어디든 가야지.”
사니와는 바깥은 지금 무슨 계절이더라, 잠시 고민하더니 얇은 긴팔로 갈아입겠다며 내실로 향했다. 인간의 몸을 가진 이상 어느 정도 떨어지는 것은 맞았다. 그는 더 이상 물건으로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을 잘 드러내지 않는 토모에의 의장도 현대에 어울리게 바뀌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보호자를 자처하는 야겐 토시로에게 다녀온다고 이야기를 마친 사니와는 게이트로 향했다. 작은 소도시에 걸맞는 도서관이지만 있을 만한 책들은 다 있었다.
“잘 다녀와, 대장. 토모에가타 나리도, 대장 잘 부탁해.”
“다녀오겠다.”
“이따가 봐요.”
풀숲과 관목이 우거진 소로를 지나 연이어진 도리이를 통과해 현세로 나오면, 사니와가 오랫동안 지냈던 신사였다. 지난번에 빌렸던 책은 반납할 때가 되었고, 이번에는 어느 책을 빌릴까. 인간의 시간으로 고작 십몇 년을 보낸 작은 사니와는 알고자 하는 것이 더욱 많은 소녀였다.
“짐들은 내가 들겠다.”
“제가 들어도 충분해요.”
“주인이 덜 불편했으면 한다.”
“저는 토모에 본신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잖아요.”
“평소에는 힘을 아껴 두어야지.”
“그럼 같이 들어요.”
토모에보다 머리 하나 정도가 더 작았던 사니와의 말에 토모에는 작게 웃었다. 거절하는 표정이 아니었기에 사니와는 책을 담은 가방의 반대편을 건넸다.
오랜만이네, 환히 웃는 사서는 여전히 건강해 보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다는 점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는 척하고 넘어갔을 텐데. 사니와 쿠로는 본 척 만 척 무심하게 지나갔다. 반납이에요. 전에 빌렸던 신화들이 재미있어서 그런데, 관련된 다른 책들은 있나요? 아무렇지 않게 저가 필요한 말만 했다. 간섭받기를 싫어했다. 신사에 지내며 많은 사람들을 보아 온 사니와는 딱히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저기, 지난번의 문학 쪽으로 가면 더 있어요. 요즘 사람들이 신화와 관련된 책을 하도 많이 찾아서 ---- 씨가 찾는 서적들이 다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갑작스레 마하바라타를 찾는 사람도 늘었고, 갑자기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찾지 않나, 길가메시 서사시를 찾지 않나. 성유물이니 뭐니 하면서 구석에 먼지만 쌓인 고전 문학들도 찾아가고…. 요즘 무슨 일 있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신화를 좋아하게 된 건 좋지만.”
“남은 책들 중에서 ---- 씨가 원하는 책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사서가 책꽂이 위치를 알려주는 동안 토모에는 옆으로 비켜 서 있었다. 도서관 안은 조용했다. 요기를 가진 것도 없었다. 이쪽부터 저쪽까지 휘 둘러본 토모에는 서가를 향해 걷는 쿠로의 뒤를 따랐다. 커다란 몸집으로 졸졸, 쿠로를 따르는 모습을 본 도서관의 사서는 웃었다.
지난 번 쿠로가 빌려갔던 책들은 이제 사서에 의해 가지런히 지식의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책들을 읽을까. 고심하던 쿠로는 토모에에게 돌아섰다.
“토모에.”
“불렀나.”
“이번에는 어떤 신화를 읽어 볼까요.”
“주인의 마음에 흡족하기만 하면 된다.”
“…북유럽 신화는 남아 있으려나.”
다행스럽게도 사람이 없는 동네의 작은 도서관인지라 낮게 말소리를 주고받아도 눈치를 줄 만한 사람은 없었다. 대도시의 도서관은 쿠로에게 숨 막히는 장소였다. 공부한다고 문제집을 펼쳐 둔 사람들은 도서관의 본분인 서가에 늘어선 서적을 찾으러 움직이는 것에도 예민하게 굴었다. 목을 틀어쥐는 공기의 흐름을 기억하는 쿠로에게 이 작은 시골 마을의 한적한 도서관은 행복한 장소였다. 태양이 뜨겁게 직사광선을 쏘아대는 여름 낮이었다. 쓰르르, 쓰르르름, 매암, 맴- 멀리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신록이 우거진 풀숲이 기분 좋게 흔들렸다.
설백색의 자연이 피워낸 눈이 오는 대로 새하얗게 눈꽃이 핀 나무들이 서로의 어깨에 의지해 추운 겨울을 이겨냈다. 눈이 녹고, 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이른 봄이 오거든 도서관 밖으로는 앙상한 가지 아래 분홍빛의 진달래가 곳곳에서 피어났다. 멀리 보이는 산중턱 빛이 모이는 자리에서 시작된 꽃분홍빛 물결은 성큼성큼 온 산을 집어삼키기도 했다. 진달래가 지나가면 또다시 하얀 빛이 천지를 뒤덮는다. 바야흐로 벚꽃의 계절이 오거든 사방 천지에 하얀 꽃눈이 날린다. 사람들은 벚꽃 가지가 드리운 그림자마저도 꽃핀 길을 걸으며 꽃구경도 하고, 달콤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선물을 주고받았다. 벚꽃이 지는 자리에 연둣빛의 새 잎사귀가 하나둘 자라나거든 곧 여름이 오는 신호였다. 상냥한 노란빛을 품은 초록색 잎은 만물이 생동하는 신호였다. 바로 지금, 무섭도록 더워지기 전의 계절이었다.
쿠로의 혼마루에 토모에가타 나기나타가 발걸음을 한 것도 작년 이맘때이었다. 쿠로에게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라는 남사는 생명이 역동하는 시기를 나타내는 남사였다. 토모에, 계절이 와요. 라는 말에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는 곧 여름이 피어나리라는 사실을 코끝에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무골이라고, 거칠다 말하던 시즈카가타 나기나타는 한겨울을 알리는 남사였다. 겨울이 올 때면 저가 혼마루에 도착했다는 마음에 들뜨는지 시즈카가타 나기나타의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지난 겨울, 미미하게 상기된 얼굴에 오묘한 표정의 시즈카가타 나기나타는 주인을 피하곤 했다. 겨우내 돋아났던 솜털을 벗은 봄새의 모양을 한 주인을 다치게 할까 겁이 나서였다고 했다.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기에 다행이었다. 신의 말석일지언정 어엿하게 신위에 적을 둔 도검남사와 합을 맞춰 대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쩔쩔매긴 하더라도 예전처럼 어려워하진 않고 있었다.
신위와 인간이라 하든, 주인과 물건이든, 무엇이 되었든, 그들은 질적으로 별개의 존재는 아니었다. 함께 걷는 동반자였다. 쿠로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토모에가타 나기나타와 함께 도서관에 온 것은 이제 두 번째였다.
“주인.”
“네?”
“이 공간을 좋아하나.”
“좋아한다, 라고 답하기엔 모자란 느낌이어요.”
“조금 다른 이야기인가.”
“네.”
쿠로는 책장을 둘러보고 있었고, 토모에는 그런 쿠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은 남성과 여성의 육을 입고 있지만 연인의 느낌은 나지 않았다. 건조한 어투로 묻고 답하는 두 사람. 햇빛이 도서관 안쪽까지 비쳐든다면 분명 이들을 따라다니며 비추었을 것이다. 작은 먼지에 남은 빛이 투과해 정지한 서가 사이로 자박자박 발자국만 살아 있었다. 자국마다 한 톨 한 톨 오후의 태양을 머금은 자그마한 먼지들만의 티타임이 어지럽혀졌다.
“이쪽 서가인가?”
“맞아요.”
토모에의 손은 굳이 높이 뻗지 않아도 서가 맨 위의 장서들에 닿곤 했다. 생각지도 못한 책들이 토모에의 손에 걸려 평정을 잃을 때면 쿠로는 평소의 별다른 변화 없는 표정에 화색이 돌곤 했다.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는, 그런 쿠로의 얼굴 근육이 변화하는 모습을 좋아했다. 움직이지 않는 조각상 같은 하얀 얼굴에 물방울 하나를 똑, 떨어뜨린 것처럼 작은 파동이 일거든 온 세상이 변한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이 책은 어떤가? 마음에 들었으면 한다만.”
“일부러는 아니겠지만, 왠지 이런 좋은 책들은 토모에의 손이 닿는 곳에만 있는 모양이에요.”
“주인이 원한다면 어깨 위로 올려 주겠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당신의 말이 그렇다면. 토모에는 조용히 물러나 그의 손이 닿는 서가를 재차 훑어보았다. 요전번에 쿠로가 읽었던 책에는 수많은 이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각양각색의 동식물로 변해 있었다. 토모에와 함께 읽었던 책에는 어느새 한 사람과, 집합체로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게 된 한 도검남사의 손길이 투명하게 녹아들어 은빛의 실처럼 늘어졌다. 이 실들은 이제 모이고 짜여서 토모에가타 나기나타가 정복으로 입고 있는 하얀 천의가 될 것이다.
지난 번, 쿠로는 퓌그말리온의 이야기를 읽으며 보다 깊이 빠져들었다. 조각상이 퓌그말리온의 이상이 구현된 것으로, 그가 인간으로 깨어나길 바랐던 것처럼- 도검남사의 츠쿠모카미가 전승을 안고 현현될 수 있는 것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저들의 입맛대로 역사의 선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이들을 막을 이상적인 염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신화와 전승의 세계란 말이 되지 않는 것조차도 말이 되는 것처럼 만들어버린다. 역설도, 반어도, 비현실도, 환상도, 환각도, 그 어떤 상상도 언어로 구현해버리는 세계였다. 함께 현세에 와 있는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는 초현실이 사라지다시피 한 이 세계에서 어떤 전승과 신비를 갖게 될까. 쿠로는 그 순간이 기다려져 얌전히 있을 수 없었다.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는 토모에가타 나기나타인 대로, 함께 읽었던 전승에 관심을 가졌다. 바야흐로 세상이 물에 잠기기 전. 세상을 다니러 왔던 주신 제우스는 가난한 모습으로 세상에 시찰을 나왔다가, 오만 집에서 다 문전박대를 당했더랬다. 두 노인이 거위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는, 유복하지 못한 집에 도달해서야 집 안에 들어설 수 있었던 주신은 필라몬과 바우키스라는, 두 노인이 하나뿐인 거위를 잡는다, 손님을 위한 자리를 만든다, 마실 포도주를 내온다며 부산을 떠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줄어들지 않는 술과 그에게 도망쳐 살 길을 도모하는 거위를 본 노인들은 어느 순간 그가 보통의 인간이 아닌 신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나마 그들의 선함을 어여삐 여긴 주신은 둘에게 세상을 모두 수몰시켜 버릴 것이라 일러주곤, 모 월 모 일 산 정상으로 오르라 이야기했다. 결국 세상은 물에 잠겼고, 두 노인은 서로가 서로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도록, 신전에서 신을 모시다가 한 날 한시에 신전 앞에 세워진 한 쌍의 나무가 되었다, 라고.
함께 책을 읽었던 당시에는 말하지 않았었지만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는 오로지 결말에 몰입해 두 그루의 나무에 저와 제 주인을 대입해보았다. 인간인 주인의 검은 머리칼이 파뿌리가 되도록 곁에서 모신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주인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오거든 쿠로다 가의 우치가타나가 아닌 자신이 함께 묻혀서라도 곁을 지킨다. 그야말로 한 날 한시에 함께 잠드는 것이 아닐까- 그 모든 토모에가타의 형태를 지닌 나기나타는 새하얗고 순진무구하게도 그런 결말을 꿈꾸었다.
“토모에.”
“불렀나.”
“별은 좋아해요?”
“주인은 어떤가.”
반문하는 토모에에게 쿠로는 좋아해요, 라고 대답했다. 밤하늘에 쉬이 볼 수 없는 별들도, 멀리 떨어져서 서로 만나지 못하는 별들 사이에 길을 만들어 의미를 부여한 별자리도, 그 별자리마다 품고 있는 이야기도 모두 좋아하는 범주에 속했다.
“그렇다면, 주인. 이런 책도 괜찮은가?”
별자리에 담긴 이야기를 언급하는 주인의 얼굴에서 미세한 방울 소리를 들었던 토모에는 책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꽤나 연식 있어 보이는 오래 된 책을 꺼냈다. 그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이 안에 잠든 물상신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잠들어 있을까. 그는 쿠로의 손에 의해 길고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라 생명을 가진 이야기로, 토모에가타 나기나타에게 더해지는 이야기로, 새로운 은빛 실이 되어 그의 옷자락에 새 빛을 더해줄 것이었다.
토모에가 높은 서가에서 꺼낸 책을 받아든 쿠로는 책과 인사라도 나누는 것처럼 엄지로 표지에 끼인 먼지를 살살 쓸어보았다. 하얀 책표지에 끼어 있던 햇살 머금은 금빛 먼지가 걷어지며 책은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파랗게 녹슬어 버린 청동 거울의 표면을 닦아, 제 거울을 비추어보았던 이는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을까. 표지에 낀 먼지라는 녹을 닦으면, 책은 자신의 모습을 뽐낼 수 있을까. 쿠로는 토모에에게 가볍게 목례하곤 책을 품에 안았다. 돌이켜보면 쿠로는 언제나 그랬다. 물건에 잠든 신, 물상신을 깨우는 심신자의 역할을 하며 인간의 육을 처음 갖고 움직이는 그들에게 천천히 시간을 주었다. 소중히 여겨주었다. 다칠세라, 긁힐세라, 때로는 수복하지 못할세라 끊임없이 돌보았다. 의지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의 육을 입은 채로 저보다 자그마한 주인에게 돌보아진다는 사실은 부끄러울 일은 아니었다. 첫 번째 주인에게 어울리는 백지와도 같은 첫 번째 도검. 이름 없는 것들이 모여 깨어난 전승 없는 츠쿠모카미와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 사니와. 토모에가타 나기나타에게 첫 번째 주인이 쿠로라는 것이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어떤 느낌인지, 그들 중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굳이 알려 할 필요도 없었다.
“이번에 들어가면 또 한동안 못 나올 텐데…. 다른 책도 볼까요, 토모에?”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라. 따르겠다.”
“그러면, 잠깐 저 쪽으로 가요.”
“주인, 무거운 것은 내게 맡겨라.”
“고작 책 한 권인걸.”
“한 권 한 권이 쌓이면 무거워지지 않나.”
“그럼 실례할게요.”
같은 책이건만 쿠로의 손에 들려있을 때와 토모에의 손에 들려 있을 때 크기가 달라 보였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했다. 어쨌거나 도검남사는 남성의 몸으로 현현한다. 어린 단도의 모습으로 현현한 이들이 아니고서야 쿠로보다 손이 작기 쉽지 않았다. 쿠로와 키가 비슷한 여느 우치가타나들 역시 쿠로보다 손이 반 마디는 더 컸다. 하물며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는 말 그대로 나기나타다. 혼마루의 최장신조에 속했고, 키가 큰 만큼 손도 가장 큰 축에 속했다. 자연스레 쿠로가 책을 들었을 때와는 크기가 달리 보였다.
“이 책도 읽고 싶었어요.”
쿠로의 시선에 닿은 두 번째 책 역시 토모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주인의 모든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였지만, 그가 아니고서도 관심가질 만한 제목이었다. 오페라 극장의 유령과 오페라 가수의 이야기. 지난번 쿠로가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단말기로 보았던 뮤지컬 작품의 원작, 인 모양이었다. 토모에의 귓가에도 반쪽짜리 가면을 쓴 유령이 여주인공을 지하세계로 초대하며 부르던 노래가 흘렀다.
“아름다운 이야기였어요. 원작이 된 책은 어떤 내용이었을지 읽어볼까요.”
“주인이 원한다면 따르겠다.”
“그럼 한 번 가져가 봐요.”
쿠로가 손을 뻗어 책장에서 꺼낸 서적 표지에는 가면을 쓴 신사가 극장 지하의 궁전으로 크리스틴을 인도하는 장면이 유화로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워.”
행복감에 물든 얼굴로 책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쿠로를 보는 토모에가타 나가나타의 잔잔한 수면 같은 마음에 옅은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졌다. 가슴이 들뜨고 공기가 달콤해진다. 인간을 시중들 줄은 알되 마음을 가진 것은 처음이라 토모에는 여기에 붙일 이름을 찾지 못했다. 손을 대면 데일 것만 같고, 일말의 고통이 함께하는데 애간장이 녹아 끊어질 것 같은 슬픔과는 거리가 멀었다. 본디 현현하면서부터 주인 따르기를 알에서 깨어난 아기 새가 어미 새 따르듯 해온 그였기에 최근의 변화가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는 모르고 있었다.
발 없는 시간이 순식간에 천 리를 가듯 시간도 쏜살같이 흘렀다. 몇 권의 책을 더 고르고 나니 정수리를 콕콕 찔러대던 태양의 손길이 누그러져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시간이 빠르게 가네요.”
“그런 것 같다.”
“곧 도서관도 닫을 거예요. 돌아갈까요.”
“알겠다. 책은 이쪽으로.”
고마워요. 쿠로의 손에 들려 있던 장서 여러 권이 토모에의 손으로 옮겨졌다. 족히 열 권은 되어 보이는 두툼한 책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읽히는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충분한가?”
더 필요한 장서는 없나 묻는 토모에에게 이 정도면 괜찮아요, 라고 말하는 쿠로의 목소리에도 옅게 열기가 감돌았다. 그를 바라보는 토모에의 진홍색 눈에 안도감이 묻어 있었다.
“지난번처럼, 장기 대출로 부탁드려요.”
“다음 달에 오겠네요.”
“별 일이 없다면요.”
“그럼 잘 다녀와요. 또 봐요.”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는 쿠로의 뒤를 따라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길어진 해는 여전히 서산 꼭대기 위에서 광명을 뽐내는 중이었다.
“토모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토모에가타 나가나타는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섰다.
“괜찮다면, 서점도 들렀다 갈래요?”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 주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고마워요.”
비현실적인 일상 속에 쿠로가 현세를 다녀야 하는 까닭은 바로 책이었다.
신사에서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릴 때부터 살았던 쿠로는 교육 과정도 신사에서 마쳤다. 사람과 뒤섞여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아이였다. 물건에서 가끔 말소리가 들려온다는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었다. 그저 손을 대면 소리가 들려왔다. 신사의 기둥에 손을 대면 어딘가 약해진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야 좋았지만 점차 감당하기 힘들게 되자 의식적으로 어린 쿠로는 듣지 않으려 했었다.
‘신의 노여움을 샀다나 봐.’
‘얌전하고 착한 아이인 줄 알았더니.’
‘되바라진 것.’
신사를 다녀가는 인간의 사악함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가라앉아 잠들었다. 앞에서는 지난 번 도와주어 고맙다, 덕분에 큰일을 면했다더니 그의 등 뒤에서 주고받는 말들은 상처로 남을 뿐이었다. 거부하더라도 여태껏 들려온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어 사니와가 되겠다고 신사를 나간 쿠로는 크지 않은 혼마루에서 도검들과 함께 지내는 편이 현세보다 좋았다.
혼마루에 들어와 쿠로가 할 수 없는 것은 오직 하나, 지식에 대한 욕구였다. 처음에는 사니와의 임무를 통해 얻는 급료로 서재를 꾸밀까 했지만 무엇을 경계했는지 정부에 의해 반려되어 도서관 나들이를 한 달에 한 번만 허락받게 된 상태였다.
끼익-.
“주인.”
상념에 빠져 있어서인지 쿠로는 눈앞이 차도라는 것도, 신호등이 붉은 빛을 내뿜는 중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책가방이 들려 있지 않은 손으로 토모에가타 나기나타가 거세게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사고가 나도 크게 났을 상황이었다.
“아.”
상황을 깨닫자마자 쿠로는 운전자를 향해 죄송하다며, 다른 생각에 빠져 미처 보지 못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치일 뻔한 것은 주인이지만 제 주인이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모습에 토모에 역시 군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차주는 별 말 하지 않고 다음부터는 조심하라고만 말했다.
“저.”
쿠로의 손끝이 차에 닿았다 떨어졌고, 그녀는 상대방을 불렀다.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브레이크 한 번만 점검해 보셔요. 꼭.”
이상한 학생이네. 마침 정비소에 가는 길이었으니까 한 번 물어는 보겠다며 다시 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쿠로는 다시 인도를 걷기 시작했다. 토모에는 그런 쿠로를 말없이 따랐다.
둘은 서점에 들었다. 토모에의 귀가 쫑긋 서고, 눈매가 날카로워졌다가 다시 평상을 찾았다.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뒤따르는 토모에는 쿠로의 발걸음에 속도를 맞췄다.
“토모에, 이쪽이에요.”
쿠로는 서가를 손으로 짚어보더니 망설임 없이 한 권을 잡아끌었다. 표지에서부터 일본도 한 자루의 사진이 영롱하게 빛났다.
“이 책인가?”
“네. 이제 됐어요.”
“알겠다.”
값을 치르고, 꽤나 묵직해진 책이 든 가방을 들고 둘은 신사로 향했다. 불타오르는 선홍색의 노을이 하늘의 반쪽을 물들여 꽃처럼 피어났다. 길게 늘어선 그림자가 걸음에 따라 이어졌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오래도록 걷는 동안 둘은 별 말이 없었다. 그저 걸어갈 뿐이다.
다 와 가는군. 토모에의 코끝에 쿠로가 지내던 신사 특유의 향 피우는 냄새가 짙게 느껴졌다. 주인의 향기이자 그가 가장 좋아하는 향이었다. 부모를 각인한 아기새와 같은 그에게 자동으로 좇게 되는 향기였다. 가까이 있게 되었지만 상대적으로 토모에보다는 먼 거리에 있는 시즈카가타 나기나타라면 아직은 잘 모를 향기였다.
다음 달에 나올 때에도 토모에가타는 쿠로의 곁을 지킬 것이다. 딱히 구칙으로 명문화시킨 것은 아니나 자연스럽게도 그랬다. 그저 땅거미가 지는 노을 아래 그림자가 완전히 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를 토모에가타 나기나타가 바랐다.
“다녀왔어요. 잘 쉬었어요?”
“푹 쉬었어, 대장. 별 일은 없었지?”
“당연하죠. 다른 분들은 어때요.”
“이쪽도 좋아. 그럼, 저녁은 아직이지? 쇼쿠다이키리 나리가 오랜만에 솜씨 발휘 좀 했다고 와 달라던데.”
“고마워요, 야겐.“
“토모에가타 나리도 함께 가 봐. 짐은 나한테 맡겨.”
“고맙다.”
아직까지도 현세의 복장을 입고 있어 혼마루와 이질적이어 보이는 둘은 혼마루의 부엌 옆에 딸린 작은 식당으로 향했다. 현세의 식재료를 들여왔다더니 고소하고 매콤한 카레 향기가 가까워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