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딩 주의. 

 

빨리도 돌아오네―.

 

웃자란 듯이 길쭉한 금빛 청년이 가까이 따라붙어 볼멘소리를 뱉는다. 여자는 앞서 걷기 시작한다. 쫑쫑쫑, 빨리 걸어도 작은 보폭이니 금방 따라잡히고야 만다. 청년은 여유 넘치는 걸음으로 걸어와서는 어깨를 붙잡는다. 불편하다는 듯이 어깨를 툭 털어내는 여자의 손길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청년은 살갑게 말을 붙인다.

 

이 큐-트한 작은 용을 얼마나 기다리게 해야 성에 차겠어?

 

그럼에도 여자는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이미 청년은 알고 있는 사실, 여자가 오늘 밖에 나가서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어디에 다녀왔는지, 왜 이렇게 늦었는지, 그리고 그 마음에 무엇이 싹텄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그렇게 묻는다.

 

여자의 하루는 요즘에야 빤했다.

 

얼마 전, 결국 현실 세계의 일을 전부 정리한 여자는 혼마루에서 붙박이로 사니와 일에만 전념해도 될 것이 분명했지만, 이것을 배운다, 저것에 참여한다, 누구를 만난다면서 끊임없이 현실 세계로 외출을 해 댔다. 여행을 좋아하는 작은 용에게는 처음에는 그런 변화가 기껍고 즐거웠다. 슬쩍 가방 속에 작은 용의 모습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자가. 그 빌어먹을 놈의 자식, 아니 그의 입장에선 정말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의 자식이 하나 사니와에게 들러붙기 전까지는.

 

들러붙은 것이 생긴 뒤로 코류 카게미츠는 용의 형태로 가방에 들어가는 일을 멈췄다. 대신 사니와의 뒤를 밟았다. 바람이 불거든 풀은 바람보다 먼저 누워 바람을 견디고 늦게나마 일어나 생명력을 가진다고 했다. 코류 카게미츠는 사니와보다 먼저 현실 세계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를 따라 나가서 그의 하루를 미행하듯 관찰하고는 조금 일찍 돌아와 혼마루의 게이트에서 늘 그를 맞이했다.

 

널 기다리게 하는 데 문제라도 있어? 우리 아무 사이 아니잖아.

으음? 나는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한 적 없는데.

 

사실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하기엔 찔릴 것이 많았다.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에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하면 어불성설이다. 차라리 마에다 토시로가 불성실하다고 소문을 내는 것이 더 쉬울 지경일 것이다. 7년. 인간의 삶에다 비한다면 결코 짧게 지나갈 수 없는 시간을 함께했던 연인인 이상 코류 카게미츠에게 현실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오늘은 누구를 만났는지, 어디서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자리에 앉았는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그’의 과장된 스타일이 입꼬리를 얼마나 올라가게 했는지 빤히 알지만 코류 카게미츠는 꼬치꼬치 캐물었다. 멀쩡히 연인이라고 존재하는 자신에게 앞뒤는 맞지만 피곤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선전포고를 한 것이 결국 이런 괘씸한 짓거리를 위한 포석이었던가? 코류 카게미츠는 불쾌하게 웃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눈앞의 인간을 용의 모습으로 잡아먹고야 말 자제력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

 

너,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

 

‘그놈’의 출현 이후로 멀어진 연인 같은 꼴이 된 사니와는 짐짓 화가 난 표정으로 대뜸 물었다. 저 비뚤어진 입매에 당장에라도 자신의 잇자국을 새겨버리고 싶다는 들끓는 욕망을 제어하는 것으로도 코류 카게미츠의 인내심은 막을 내리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어깨를 으쓱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디저트 카페 기둥 뒤에 있었던 게 너라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알면 말이 빠르겠네.

 

보랏빛 눈이 시퍼런 칼날처럼 가늘어지곤 이내 웃음으로 휘어진다. 억지 웃음을 웃는다. 이 웃음이 아니면, 정말이지 무슨 짓을 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혀를 잘근잘근 씹는다. 목에서 펄떡거리고 튀어나올 것만 같은 용을 억누른다. 그것이 지금 그에게 있어서 최선의 배려였다.

 

어차피 너도 그렇게 연인 흉내를 낸 것에 지나지 않잖아?

 

아아, 사니와의 말은 제가 다루는 바늘을 들고 심장을 사정없이 찔렀다. 하지만 코류 카게미츠의 심장에서는 피가 나지 않는다. 그는 칼이다. 쓰임을 다하면 잠드는 물건이다. 칼날은 바늘 따위에 상처입지 않는다. 그느 신이다. 신은, 인간의 말 따위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 그저 어디까지 자신을 모독할 수 있는지 시험할 뿐.

 

그 오랜 시간을 흉내라고 말할 자신이 있는 건가?

 

비릿하게 입가가 움직였다. 한계다. 목의 용은 인간의 피를 머금고 싶어한다. 인간의 이름을 그의 피로 써내려 빠져나갈 수 없는 계약에 묶고 싶어한다. 금빛의 기다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자아가 있는 듯이 살아 움직이면서 저 인간의 목을, 손목을, 발목을, 허리를 잡아채고 싶어한다.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눈처럼 동공이 졸아드는 것이 느껴진다. 전장에서의 감각이다.

 

사니와는 그러거나 말거나 제 말을 이어간다.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고, 물건에서 피어난 신이라 그 물건을 부러뜨리면 소멸하는 미약한 신이면서 대체 인간에게 집착하는 버릇은 어디서 배웠냐고.

 

네가 가르쳤어.

 

코류 카게미츠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뼈째 씹어먹어버리고 싶은 기분. 그놈에게 한 자락이라도 더 빼앗기느니 아예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심정을 이 인간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철저하게 인간이니까.

 

이 작고 귀여운, 매력적인 용을 껌벅 죽게 만들었으면서 요만큼의 책임도 지지 않고 손쉽게 갈아타려는 건, 결국 ‘나를 네 손에서 떨어뜨리려는’ 일이잖아? 작은 용은 쉽게 주인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아요. 꼬리로 감아서라도, 발톱으로 할퀴어서라도 너에게서 떨어지지 않아.

 

숨조차 쉬지 않고 으르렁거리듯 말을 뱉는 코류 카게미츠의 눈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사니와는 눈을 외면하려고 했다. 하지만 상당히 커다란 성인 남성의 몸을 갖고 있는 그의 팔을 벗어날 방법은 하늘에서 동아줄이 떨어져도 없었다.

 

그럼, 잘 먹을게. ―.

 

주인이 웃는다. 주인의 입술이 곡선을 그린다. 연지를 찍지 않아도 앵두 같은 색깔이 빛나고, 사이가 열리며 커다랗고 하얀 앞니가 드러난다. 동그랗게 모였다가, 다물었다가, 다시 동그랗게 벌어지기를 두어 번 반복한다. 귓가에 목소리가 맴돌기 전부터 남사는 주인 쪽을 바라본다. 입 모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필요한 것이 있거든,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고 부르라, 목소리가 닿는 곳에 있겠다던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주인은 저를 부를 것이고, 그를 위해 가까이 다가섰다.

 

“토모에-.”

 

늦지 않기 위해서, 토모에는 성큼성큼 주인의 곁에 섰다. 불렀나. 기복이 크지 않은 목소리를 확인한 주인은 본성 근처에 있는 현세 도서관에 가기를 청했다. 책에는 인간의 상상력이 온전히 담겨 있다. 수백의 사람이 글을 썼다면 수백의 삶이 책에 녹아들어 있다. 어떤 사고의 결말이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종잇장 안의 세상에는 놀랍다면 놀라울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주인이 원하는 곳엔 어디든 가야지.”

 

사니와는 바깥은 지금 무슨 계절이더라, 잠시 고민하더니 얇은 긴팔로 갈아입겠다며 내실로 향했다. 인간의 몸을 가진 이상 어느 정도 떨어지는 것은 맞았다. 그는 더 이상 물건으로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을 잘 드러내지 않는 토모에의 의장도 현대에 어울리게 바뀌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보호자를 자처하는 야겐 토시로에게 다녀온다고 이야기를 마친 사니와는 게이트로 향했다. 작은 소도시에 걸맞는 도서관이지만 있을 만한 책들은 다 있었다.

 

“잘 다녀와, 대장. 토모에가타 나리도, 대장 잘 부탁해.”

“다녀오겠다.”

“이따가 봐요.”

 

풀숲과 관목이 우거진 소로를 지나 연이어진 도리이를 통과해 현세로 나오면, 사니와가 오랫동안 지냈던 신사였다. 지난번에 빌렸던 책은 반납할 때가 되었고, 이번에는 어느 책을 빌릴까. 인간의 시간으로 고작 십몇 년을 보낸 작은 사니와는 알고자 하는 것이 더욱 많은 소녀였다.

 

“짐들은 내가 들겠다.”

“제가 들어도 충분해요.”

“주인이 덜 불편했으면 한다.”

“저는 토모에 본신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잖아요.”

“평소에는 힘을 아껴 두어야지.”

“그럼 같이 들어요.”

 

토모에보다 머리 하나 정도가 더 작았던 사니와의 말에 토모에는 작게 웃었다. 거절하는 표정이 아니었기에 사니와는 책을 담은 가방의 반대편을 건넸다.

 

오랜만이네, 환히 웃는 사서는 여전히 건강해 보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다는 점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는 척하고 넘어갔을 텐데. 사니와 쿠로는 본 척 만 척 무심하게 지나갔다. 반납이에요. 전에 빌렸던 신화들이 재미있어서 그런데, 관련된 다른 책들은 있나요? 아무렇지 않게 저가 필요한 말만 했다. 간섭받기를 싫어했다. 신사에 지내며 많은 사람들을 보아 온 사니와는 딱히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저기, 지난번의 문학 쪽으로 가면 더 있어요. 요즘 사람들이 신화와 관련된 책을 하도 많이 찾아서 ---- 씨가 찾는 서적들이 다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갑작스레 마하바라타를 찾는 사람도 늘었고, 갑자기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찾지 않나, 길가메시 서사시를 찾지 않나. 성유물이니 뭐니 하면서 구석에 먼지만 쌓인 고전 문학들도 찾아가고…. 요즘 무슨 일 있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신화를 좋아하게 된 건 좋지만.”

“남은 책들 중에서 ---- 씨가 원하는 책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사서가 책꽂이 위치를 알려주는 동안 토모에는 옆으로 비켜 서 있었다. 도서관 안은 조용했다. 요기를 가진 것도 없었다. 이쪽부터 저쪽까지 휘 둘러본 토모에는 서가를 향해 걷는 쿠로의 뒤를 따랐다. 커다란 몸집으로 졸졸, 쿠로를 따르는 모습을 본 도서관의 사서는 웃었다.

 

지난 번 쿠로가 빌려갔던 책들은 이제 사서에 의해 가지런히 지식의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책들을 읽을까. 고심하던 쿠로는 토모에에게 돌아섰다.

 

“토모에.”

“불렀나.”

“이번에는 어떤 신화를 읽어 볼까요.”

“주인의 마음에 흡족하기만 하면 된다.”

“…북유럽 신화는 남아 있으려나.”

 

다행스럽게도 사람이 없는 동네의 작은 도서관인지라 낮게 말소리를 주고받아도 눈치를 줄 만한 사람은 없었다. 대도시의 도서관은 쿠로에게 숨 막히는 장소였다. 공부한다고 문제집을 펼쳐 둔 사람들은 도서관의 본분인 서가에 늘어선 서적을 찾으러 움직이는 것에도 예민하게 굴었다. 목을 틀어쥐는 공기의 흐름을 기억하는 쿠로에게 이 작은 시골 마을의 한적한 도서관은 행복한 장소였다. 태양이 뜨겁게 직사광선을 쏘아대는 여름 낮이었다. 쓰르르, 쓰르르름, 매암, 맴- 멀리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신록이 우거진 풀숲이 기분 좋게 흔들렸다.

 

설백색의 자연이 피워낸 눈이 오는 대로 새하얗게 눈꽃이 핀 나무들이 서로의 어깨에 의지해 추운 겨울을 이겨냈다. 눈이 녹고, 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이른 봄이 오거든 도서관 밖으로는 앙상한 가지 아래 분홍빛의 진달래가 곳곳에서 피어났다. 멀리 보이는 산중턱 빛이 모이는 자리에서 시작된 꽃분홍빛 물결은 성큼성큼 온 산을 집어삼키기도 했다. 진달래가 지나가면 또다시 하얀 빛이 천지를 뒤덮는다. 바야흐로 벚꽃의 계절이 오거든 사방 천지에 하얀 꽃눈이 날린다. 사람들은 벚꽃 가지가 드리운 그림자마저도 꽃핀 길을 걸으며 꽃구경도 하고, 달콤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선물을 주고받았다. 벚꽃이 지는 자리에 연둣빛의 새 잎사귀가 하나둘 자라나거든 곧 여름이 오는 신호였다. 상냥한 노란빛을 품은 초록색 잎은 만물이 생동하는 신호였다. 바로 지금, 무섭도록 더워지기 전의 계절이었다.

 

쿠로의 혼마루에 토모에가타 나기나타가 발걸음을 한 것도 작년 이맘때이었다. 쿠로에게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라는 남사는 생명이 역동하는 시기를 나타내는 남사였다. 토모에, 계절이 와요. 라는 말에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는 곧 여름이 피어나리라는 사실을 코끝에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무골이라고, 거칠다 말하던 시즈카가타 나기나타는 한겨울을 알리는 남사였다. 겨울이 올 때면 저가 혼마루에 도착했다는 마음에 들뜨는지 시즈카가타 나기나타의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지난 겨울, 미미하게 상기된 얼굴에 오묘한 표정의 시즈카가타 나기나타는 주인을 피하곤 했다. 겨우내 돋아났던 솜털을 벗은 봄새의 모양을 한 주인을 다치게 할까 겁이 나서였다고 했다.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기에 다행이었다. 신의 말석일지언정 어엿하게 신위에 적을 둔 도검남사와 합을 맞춰 대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쩔쩔매긴 하더라도 예전처럼 어려워하진 않고 있었다.

 

신위와 인간이라 하든, 주인과 물건이든, 무엇이 되었든, 그들은 질적으로 별개의 존재는 아니었다. 함께 걷는 동반자였다. 쿠로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토모에가타 나기나타와 함께 도서관에 온 것은 이제 두 번째였다.

 

“주인.”

“네?”

“이 공간을 좋아하나.”

“좋아한다, 라고 답하기엔 모자란 느낌이어요.”

“조금 다른 이야기인가.”

“네.”

 

쿠로는 책장을 둘러보고 있었고, 토모에는 그런 쿠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은 남성과 여성의 육을 입고 있지만 연인의 느낌은 나지 않았다. 건조한 어투로 묻고 답하는 두 사람. 햇빛이 도서관 안쪽까지 비쳐든다면 분명 이들을 따라다니며 비추었을 것이다. 작은 먼지에 남은 빛이 투과해 정지한 서가 사이로 자박자박 발자국만 살아 있었다. 자국마다 한 톨 한 톨 오후의 태양을 머금은 자그마한 먼지들만의 티타임이 어지럽혀졌다.

 

“이쪽 서가인가?”

“맞아요.”

 

토모에의 손은 굳이 높이 뻗지 않아도 서가 맨 위의 장서들에 닿곤 했다. 생각지도 못한 책들이 토모에의 손에 걸려 평정을 잃을 때면 쿠로는 평소의 별다른 변화 없는 표정에 화색이 돌곤 했다.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는, 그런 쿠로의 얼굴 근육이 변화하는 모습을 좋아했다. 움직이지 않는 조각상 같은 하얀 얼굴에 물방울 하나를 똑, 떨어뜨린 것처럼 작은 파동이 일거든 온 세상이 변한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이 책은 어떤가? 마음에 들었으면 한다만.”

“일부러는 아니겠지만, 왠지 이런 좋은 책들은 토모에의 손이 닿는 곳에만 있는 모양이에요.”

“주인이 원한다면 어깨 위로 올려 주겠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당신의 말이 그렇다면. 토모에는 조용히 물러나 그의 손이 닿는 서가를 재차 훑어보았다. 요전번에 쿠로가 읽었던 책에는 수많은 이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각양각색의 동식물로 변해 있었다. 토모에와 함께 읽었던 책에는 어느새 한 사람과, 집합체로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게 된 한 도검남사의 손길이 투명하게 녹아들어 은빛의 실처럼 늘어졌다. 이 실들은 이제 모이고 짜여서 토모에가타 나기나타가 정복으로 입고 있는 하얀 천의가 될 것이다.

 

지난 번, 쿠로는 퓌그말리온의 이야기를 읽으며 보다 깊이 빠져들었다. 조각상이 퓌그말리온의 이상이 구현된 것으로, 그가 인간으로 깨어나길 바랐던 것처럼- 도검남사의 츠쿠모카미가 전승을 안고 현현될 수 있는 것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저들의 입맛대로 역사의 선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이들을 막을 이상적인 염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신화와 전승의 세계란 말이 되지 않는 것조차도 말이 되는 것처럼 만들어버린다. 역설도, 반어도, 비현실도, 환상도, 환각도, 그 어떤 상상도 언어로 구현해버리는 세계였다. 함께 현세에 와 있는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는 초현실이 사라지다시피 한 이 세계에서 어떤 전승과 신비를 갖게 될까. 쿠로는 그 순간이 기다려져 얌전히 있을 수 없었다.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는 토모에가타 나기나타인 대로, 함께 읽었던 전승에 관심을 가졌다. 바야흐로 세상이 물에 잠기기 전. 세상을 다니러 왔던 주신 제우스는 가난한 모습으로 세상에 시찰을 나왔다가, 오만 집에서 다 문전박대를 당했더랬다. 두 노인이 거위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는, 유복하지 못한 집에 도달해서야 집 안에 들어설 수 있었던 주신은 필라몬과 바우키스라는, 두 노인이 하나뿐인 거위를 잡는다, 손님을 위한 자리를 만든다, 마실 포도주를 내온다며 부산을 떠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줄어들지 않는 술과 그에게 도망쳐 살 길을 도모하는 거위를 본 노인들은 어느 순간 그가 보통의 인간이 아닌 신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나마 그들의 선함을 어여삐 여긴 주신은 둘에게 세상을 모두 수몰시켜 버릴 것이라 일러주곤, 모 월 모 일 산 정상으로 오르라 이야기했다. 결국 세상은 물에 잠겼고, 두 노인은 서로가 서로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도록, 신전에서 신을 모시다가 한 날 한시에 신전 앞에 세워진 한 쌍의 나무가 되었다, 라고.

 

함께 책을 읽었던 당시에는 말하지 않았었지만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는 오로지 결말에 몰입해 두 그루의 나무에 저와 제 주인을 대입해보았다. 인간인 주인의 검은 머리칼이 파뿌리가 되도록 곁에서 모신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주인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오거든 쿠로다 가의 우치가타나가 아닌 자신이 함께 묻혀서라도 곁을 지킨다. 그야말로 한 날 한시에 함께 잠드는 것이 아닐까- 그 모든 토모에가타의 형태를 지닌 나기나타는 새하얗고 순진무구하게도 그런 결말을 꿈꾸었다.

 

“토모에.”

“불렀나.”

“별은 좋아해요?”

“주인은 어떤가.”

 

반문하는 토모에에게 쿠로는 좋아해요, 라고 대답했다. 밤하늘에 쉬이 볼 수 없는 별들도, 멀리 떨어져서 서로 만나지 못하는 별들 사이에 길을 만들어 의미를 부여한 별자리도, 그 별자리마다 품고 있는 이야기도 모두 좋아하는 범주에 속했다.

 

“그렇다면, 주인. 이런 책도 괜찮은가?”

 

별자리에 담긴 이야기를 언급하는 주인의 얼굴에서 미세한 방울 소리를 들었던 토모에는 책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꽤나 연식 있어 보이는 오래 된 책을 꺼냈다. 그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이 안에 잠든 물상신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잠들어 있을까. 그는 쿠로의 손에 의해 길고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라 생명을 가진 이야기로, 토모에가타 나기나타에게 더해지는 이야기로, 새로운 은빛 실이 되어 그의 옷자락에 새 빛을 더해줄 것이었다.

 

토모에가 높은 서가에서 꺼낸 책을 받아든 쿠로는 책과 인사라도 나누는 것처럼 엄지로 표지에 끼인 먼지를 살살 쓸어보았다. 하얀 책표지에 끼어 있던 햇살 머금은 금빛 먼지가 걷어지며 책은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파랗게 녹슬어 버린 청동 거울의 표면을 닦아, 제 거울을 비추어보았던 이는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을까. 표지에 낀 먼지라는 녹을 닦으면, 책은 자신의 모습을 뽐낼 수 있을까. 쿠로는 토모에에게 가볍게 목례하곤 책을 품에 안았다. 돌이켜보면 쿠로는 언제나 그랬다. 물건에 잠든 신, 물상신을 깨우는 심신자의 역할을 하며 인간의 육을 처음 갖고 움직이는 그들에게 천천히 시간을 주었다. 소중히 여겨주었다. 다칠세라, 긁힐세라, 때로는 수복하지 못할세라 끊임없이 돌보았다. 의지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의 육을 입은 채로 저보다 자그마한 주인에게 돌보아진다는 사실은 부끄러울 일은 아니었다. 첫 번째 주인에게 어울리는 백지와도 같은 첫 번째 도검. 이름 없는 것들이 모여 깨어난 전승 없는 츠쿠모카미와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 사니와. 토모에가타 나기나타에게 첫 번째 주인이 쿠로라는 것이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어떤 느낌인지, 그들 중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굳이 알려 할 필요도 없었다.

 

“이번에 들어가면 또 한동안 못 나올 텐데…. 다른 책도 볼까요, 토모에?”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라. 따르겠다.”

“그러면, 잠깐 저 쪽으로 가요.”

“주인, 무거운 것은 내게 맡겨라.”

“고작 책 한 권인걸.”

“한 권 한 권이 쌓이면 무거워지지 않나.”

“그럼 실례할게요.”

 

같은 책이건만 쿠로의 손에 들려있을 때와 토모에의 손에 들려 있을 때 크기가 달라 보였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했다. 어쨌거나 도검남사는 남성의 몸으로 현현한다. 어린 단도의 모습으로 현현한 이들이 아니고서야 쿠로보다 손이 작기 쉽지 않았다. 쿠로와 키가 비슷한 여느 우치가타나들 역시 쿠로보다 손이 반 마디는 더 컸다. 하물며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는 말 그대로 나기나타다. 혼마루의 최장신조에 속했고, 키가 큰 만큼 손도 가장 큰 축에 속했다. 자연스레 쿠로가 책을 들었을 때와는 크기가 달리 보였다.

 

“이 책도 읽고 싶었어요.”

 

쿠로의 시선에 닿은 두 번째 책 역시 토모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주인의 모든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였지만, 그가 아니고서도 관심가질 만한 제목이었다. 오페라 극장의 유령과 오페라 가수의 이야기. 지난번 쿠로가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단말기로 보았던 뮤지컬 작품의 원작, 인 모양이었다. 토모에의 귓가에도 반쪽짜리 가면을 쓴 유령이 여주인공을 지하세계로 초대하며 부르던 노래가 흘렀다.

 

“아름다운 이야기였어요. 원작이 된 책은 어떤 내용이었을지 읽어볼까요.”

“주인이 원한다면 따르겠다.”

“그럼 한 번 가져가 봐요.”

 

쿠로가 손을 뻗어 책장에서 꺼낸 서적 표지에는 가면을 쓴 신사가 극장 지하의 궁전으로 크리스틴을 인도하는 장면이 유화로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워.”

 

행복감에 물든 얼굴로 책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쿠로를 보는 토모에가타 나가나타의 잔잔한 수면 같은 마음에 옅은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졌다. 가슴이 들뜨고 공기가 달콤해진다. 인간을 시중들 줄은 알되 마음을 가진 것은 처음이라 토모에는 여기에 붙일 이름을 찾지 못했다. 손을 대면 데일 것만 같고, 일말의 고통이 함께하는데 애간장이 녹아 끊어질 것 같은 슬픔과는 거리가 멀었다. 본디 현현하면서부터 주인 따르기를 알에서 깨어난 아기 새가 어미 새 따르듯 해온 그였기에 최근의 변화가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는 모르고 있었다.

 

발 없는 시간이 순식간에 천 리를 가듯 시간도 쏜살같이 흘렀다. 몇 권의 책을 더 고르고 나니 정수리를 콕콕 찔러대던 태양의 손길이 누그러져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시간이 빠르게 가네요.”

“그런 것 같다.”

“곧 도서관도 닫을 거예요. 돌아갈까요.”

“알겠다. 책은 이쪽으로.”

 

고마워요. 쿠로의 손에 들려 있던 장서 여러 권이 토모에의 손으로 옮겨졌다. 족히 열 권은 되어 보이는 두툼한 책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읽히는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충분한가?”

 

더 필요한 장서는 없나 묻는 토모에에게 이 정도면 괜찮아요, 라고 말하는 쿠로의 목소리에도 옅게 열기가 감돌았다. 그를 바라보는 토모에의 진홍색 눈에 안도감이 묻어 있었다.

 

“지난번처럼, 장기 대출로 부탁드려요.”

“다음 달에 오겠네요.”

“별 일이 없다면요.”

“그럼 잘 다녀와요. 또 봐요.”

 

토모에가타 나기나타는 쿠로의 뒤를 따라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길어진 해는 여전히 서산 꼭대기 위에서 광명을 뽐내는 중이었다.

 

“토모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토모에가타 나가나타는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섰다.

 

“괜찮다면, 서점도 들렀다 갈래요?”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 주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고마워요.”

 

비현실적인 일상 속에 쿠로가 현세를 다녀야 하는 까닭은 바로 책이었다.

 

신사에서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릴 때부터 살았던 쿠로는 교육 과정도 신사에서 마쳤다. 사람과 뒤섞여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아이였다. 물건에서 가끔 말소리가 들려온다는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었다. 그저 손을 대면 소리가 들려왔다. 신사의 기둥에 손을 대면 어딘가 약해진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야 좋았지만 점차 감당하기 힘들게 되자 의식적으로 어린 쿠로는 듣지 않으려 했었다.

 

‘신의 노여움을 샀다나 봐.’

‘얌전하고 착한 아이인 줄 알았더니.’

‘되바라진 것.’

 

신사를 다녀가는 인간의 사악함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가라앉아 잠들었다. 앞에서는 지난 번 도와주어 고맙다, 덕분에 큰일을 면했다더니 그의 등 뒤에서 주고받는 말들은 상처로 남을 뿐이었다. 거부하더라도 여태껏 들려온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어 사니와가 되겠다고 신사를 나간 쿠로는 크지 않은 혼마루에서 도검들과 함께 지내는 편이 현세보다 좋았다.

 

혼마루에 들어와 쿠로가 할 수 없는 것은 오직 하나, 지식에 대한 욕구였다. 처음에는 사니와의 임무를 통해 얻는 급료로 서재를 꾸밀까 했지만 무엇을 경계했는지 정부에 의해 반려되어 도서관 나들이를 한 달에 한 번만 허락받게 된 상태였다.

끼익-.

 

“주인.”

 

상념에 빠져 있어서인지 쿠로는 눈앞이 차도라는 것도, 신호등이 붉은 빛을 내뿜는 중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책가방이 들려 있지 않은 손으로 토모에가타 나기나타가 거세게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사고가 나도 크게 났을 상황이었다.

 

“아.”

 

상황을 깨닫자마자 쿠로는 운전자를 향해 죄송하다며, 다른 생각에 빠져 미처 보지 못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치일 뻔한 것은 주인이지만 제 주인이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모습에 토모에 역시 군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차주는 별 말 하지 않고 다음부터는 조심하라고만 말했다.

 

“저.”

 

쿠로의 손끝이 차에 닿았다 떨어졌고, 그녀는 상대방을 불렀다.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브레이크 한 번만 점검해 보셔요. 꼭.”

 

이상한 학생이네. 마침 정비소에 가는 길이었으니까 한 번 물어는 보겠다며 다시 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쿠로는 다시 인도를 걷기 시작했다. 토모에는 그런 쿠로를 말없이 따랐다.

 

둘은 서점에 들었다. 토모에의 귀가 쫑긋 서고, 눈매가 날카로워졌다가 다시 평상을 찾았다.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뒤따르는 토모에는 쿠로의 발걸음에 속도를 맞췄다.

 

“토모에, 이쪽이에요.”

 

쿠로는 서가를 손으로 짚어보더니 망설임 없이 한 권을 잡아끌었다. 표지에서부터 일본도 한 자루의 사진이 영롱하게 빛났다.

 

“이 책인가?”

“네. 이제 됐어요.”

“알겠다.”

 

값을 치르고, 꽤나 묵직해진 책이 든 가방을 들고 둘은 신사로 향했다. 불타오르는 선홍색의 노을이 하늘의 반쪽을 물들여 꽃처럼 피어났다. 길게 늘어선 그림자가 걸음에 따라 이어졌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오래도록 걷는 동안 둘은 별 말이 없었다. 그저 걸어갈 뿐이다.

 

다 와 가는군. 토모에의 코끝에 쿠로가 지내던 신사 특유의 향 피우는 냄새가 짙게 느껴졌다. 주인의 향기이자 그가 가장 좋아하는 향이었다. 부모를 각인한 아기새와 같은 그에게 자동으로 좇게 되는 향기였다. 가까이 있게 되었지만 상대적으로 토모에보다는 먼 거리에 있는 시즈카가타 나기나타라면 아직은 잘 모를 향기였다.

 

다음 달에 나올 때에도 토모에가타는 쿠로의 곁을 지킬 것이다. 딱히 구칙으로 명문화시킨 것은 아니나 자연스럽게도 그랬다. 그저 땅거미가 지는 노을 아래 그림자가 완전히 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를 토모에가타 나기나타가 바랐다.

 

“다녀왔어요. 잘 쉬었어요?”

“푹 쉬었어, 대장. 별 일은 없었지?”

“당연하죠. 다른 분들은 어때요.”

“이쪽도 좋아. 그럼, 저녁은 아직이지? 쇼쿠다이키리 나리가 오랜만에 솜씨 발휘 좀 했다고 와 달라던데.”

“고마워요, 야겐.“

“토모에가타 나리도 함께 가 봐. 짐은 나한테 맡겨.”

“고맙다.”

 

아직까지도 현세의 복장을 입고 있어 혼마루와 이질적이어 보이는 둘은 혼마루의 부엌 옆에 딸린 작은 식당으로 향했다. 현세의 식재료를 들여왔다더니 고소하고 매콤한 카레 향기가 가까워져 왔다.

 

분명히, 오래되고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상식의 선에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아니될 일이 일어난 혼마루는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다. 수많은 검들이 명도로 이름을 날리는 데에는 일화가 한 몫을 했고, 그 일화의 중앙에는 예리하여 돌마저도 묵을 썰듯 갈라버리되 주인에게만은 날을 세우지 못하는 검도 있었다. 그랬던 혼마루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한 수많은 도검남사들은 충격에 휩싸여 스스로 출입을 삼갔다. 그 결과로 혼마루는 주인을 잃었다. 지금 바깥을 걷고 있는 남사는 멍한 눈으로 더욱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초점은 맞는 듯 하더니 이내 흔들렸다.

 

사람은 종적을 감추었고, 현실은 시계바늘을 멈춰 두고도 끊임없이 제 갈 길을 걸었다. 분명히 사람의 육신에 숨은 붙어 있었을진대 제 갈 길을 고집스레 떠난 시간은 결국 영혼을 거두어가고 말았다. 높이 뜬 태양이 뜨고 지기를 반복하다가 지쳤는지 황혼의 모습만을 보여주었으나 시간은 거꾸로 가는 법 없이 돌고 돌았다. 이미 떠나버렸다. 도토리 키재기 하듯 심어 두었던 관목들은 우거진 숲의 중앙에서 견디지 못하고 변두리로 밀려나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벌써 이 계절인가?”

 

칩거한 지는 오래되었다. 주인의 명령이라기에 기다리기만 했었던 자신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아프다기에 낫기를 기다리며 얌전히 보낸 세월이 끔찍하게만 여겨졌다. 시간의 흐름만이 변하지 않았다. 계절에 따라 알록달록한 꽃은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멍하니 흔들리던 시선이 수림이 우거진 숲에서 관목이 자란 끝자락으로, 경계의 안팎을 나누는 중문으로, 또다시 중문에서 제가 서 있는 곳으로 이어지는 박석 위로 흘렀다. 질끈 감았던 눈이 뜨였을 때, 그의 눈에는 안식처가 되고야 말아버린 작은 별채로 향했다.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군 그래.’

 

저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자의 눈에서 형언할 수 없는 빛이 서렸다. 언뜻 쓸쓸함이 비치던 얼굴에는 짙은 추억의 향기가 감돌다가 이내 슬픔이 서렸다. 다시 빛이 꺼질 듯 흔들리던 눈 아래로 새하얀 진주알 하나가 또르르, 떨어졌다.

 

인간의 생은 참으로 짧았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로 쉬이 꺾여버리는 삶이란, 그 옅은 생명이란 이리도 가녀린 종류일 것이라, 그는 알면서도 막지 못했다. 그저 꽃 같았다. 한 철, 잠깐을 피우기 위해 저의 모든 힘을 쓰는 꽃이었다. 그는 이제 셈조차 쉽지 않을 만큼 켜켜이 쌓여버린 시간의 무게를 곱씹고 되새겼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들의 욕망에 의해 오만가지 수난을 겪고도 도무지 이해할 마음조차 들지 않는 존재들이 인간이었다. 그의 눈 속에 비친 사람이란 유한한 주제에 처지를 모르고 무한을 꿈꾸는 미련한 존재였다. 고작 몇십 년도 유지할 수 없는 육신으로 욕심만큼은 몇십 년은 살아갈 것처럼 부리는 하찮은 것들이었다.

 

진절머리가 났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뼈가 썩어 문드러져도 영원하리라 믿는 오만함에 침을 뱉고 싶었다. 무덤에 저를 가지고 들어가는 행태에 기가 찼다. 그렇게 묻힌 부장품을 갖겠다는 욕심으로 무덤을 파내는 꼴은 또 어떤가. 속에서 신믈이 올라왔다. 인간은 추악했다. 그렇게 믿었기에 이번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그는 한껏 멋을 부리고 나타났었다.

 

인간이 아니었지만 인간의 욕망을 알고 있었던 자는 이제 어지간한 일로는 저 자신이 놀라지도 않으리라 믿었건만, 여태까지와는 다른 신선한 기행은 그를 인생의 재미 속으로 끌어들였다. 인간의 기행이란 이렇게도 작용하는구나. 그는 새로이 입은 육신을 통해 깨닫고는 놀랐다. 수없이 악의 없는 장난을 쳤고 그때마다 함께 있었던 주인이 특별하게 느껴지고 말았다는 사실은, 그의 변화를 가리키고 있었다.

 

“맑구만.”

 

쾌청한 푸른 빛이 감도는 하늘에 몽실몽실 귀엽게 생긴 구름이 떠다녔다. 그를 놀리듯이 새하얬다. 시커멓게 멍든 가슴 탓에 당장이라도 검은 거죽을 뒤집어쓸 것 같은 마음에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고 참담함이라는 이름의 가슴 속 구덩이를 더욱 깊게 후벼팠다. 그는 손을 뻗었다. 강렬한 태양광이 그대로 투영될 듯 투명함에 가까운 손에 붉은 테두리가 둘러졌다.

 

후두둑.

 

흰 낫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울긋불긋 피었던 꽃들의 소리 없는 비명만이 남아 있었다. 왁살스럽게 꽃을 뜯어버린 손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찢긴 자리에서 쌉싸름한 풀내음이 돋았다. 일이 터진 뒤로 꽃은 보기도 싫었건만 이 꽃들은 계절의 흐름을 따라 저택을 감아올라 더욱 진득하게 피어났다. 작년보다 꽃은 붉고 짙었다. 작은 저택 안에 모든 것을 빼앗긴 주인의 절규를 대신하는 모양이었다.

 

‘네까짓 것들이 그 고통을 알고 이렇게 피었을 리가 없다.’

 

새하얗다 못해 투명한 손에 힘줄이 불거졌다. 뼈대 사이로 짓이겨져 흘러내리는 꽃잎의 즙인지, 피인지 모를 것들이 흘러내렸다. 이제는 머리로도 세기 힘든 천 년의 시간 동안 이토록 그를 분노에 휩싸이게 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영영 잃었다고 생각했던 다테의 동료들을 만나고,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후대의 존재들을 보는 일은 기꺼울 따름이었다. 매일을 신선하게 만드는 제일의 공신들이 혼마루의 동료들이었고, 그들의 정점에 선 주인이었다. 이제 다시는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볼 수 없는 주인, 다시는 그 목소리로 다정하게 저를 부를 수 없는 주인, 손에 든 방울로 당신을 찾노라고 부를 수 없는 주인. 휘하의 도검남사에게 행복이라는 이름의 고운 주단을 직조해 선물한 주인은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버렸다.

 

흰 새는 자신이 인간의 희노애락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다. 새의 날개는 꺾였다. 뼈는 부러지고 그를 감싼 근육은 여지없이 찢겼다. 깃털 하나하나에 담아두었던 감정들은 어떤 조치 없이 생으로 뽑히어 깃털이 있던 자리마다 핏빛이었다. 동료였기에, 하나의 주인 아래 몸을 얻은 존재였기에 의심의 칼날을 무디세 두었던 대가는 신의 죽음이었다. 그기 좋아하는 달콤한 간식 속에 맹독이 숨어 있었다. 그를 아끼기에 주었던 향긋한 꽃 속에 치명적인 죽음이 담겨 있었다.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간사한 인간을 숱하게 겪어 놓고 인간의 형체를 한 것들을 믿었던, 그 안일한 자신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의 세상은 부서졌다. 유리는 깨져서 찬란한 빛을 보이나 그의 단면은 검었다. 검은 날은 천 년을 거뜬히 버텨 낸 단단한 심장을 무참히 찔러댔다. 피를 토하는 심장으로 장난치지 말라 외쳤다. 그런 행동은 도움되지 않는다던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 아무 말 없이 그가 하는 양 가만 있으면서 저도 검에 손을 둔 오오쿠리카라, 옷자락을 붙들던 타이코카네 사다무네의 서로 다른 금빛이 교차했다. 동료를 향해 칼을 뽑았던가? 새빨간 피를 뒤집어쓴 뒤로 기억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본성은 침묵에 잠겨들었다. 주인을 카미카쿠시하는 도검남사들에 대해서는 익히 보고가 있어 왔으나 제 주인을 죽이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보고만 들었던 시간정부는 혼마루의 폐기를 결정하고 나서 시찰을 나왔었다. 그러나 본성의 규모와 도검남사들의 현 상태를 본 그들은 이례적으로 폐기를 번복했다. 일에 연루된 도검남사들은 전원 정화조차 없이 완전파괴되었으나 그 외의 남사들에게 정부는 장례식까지의 유예기간을 두었다.

 

본성은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듯 만개한 꽃으로 채워졌다. 장례를 준비하는 몇몇 신검들을 제외한 모든 도검남사들은 제 방에 스스로 틀어박혔다.

 

이제 새 주인을 맞이하는 일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사물에 깃든 신이니 당연했다. 제 거처로 돌아가기를 선택했어도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부장품으로 무덤에 함께 들어가고, 파내어지고, 이 주인 저 주인을 따라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어보았던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이제 마음을 정해야만 했다. 이렇게 원치 않는 싸움터로 돌아가그냐, 또다른 선택을 하느냐.

 

‘영원한 결번도 나쁘지 않겠다만.’

‘정말 그 선택으로 괜찮은 거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건 어때, 츠루 씨.’

‘더 바랄 것도 없네만.’

‘충분히 고려했겠지만 말야.’

‘딱히 마음이 바뀔 것 같지도 않구먼.’

 

더 이상 귀에 들어오는 질문은 없었다. 가질 것도 다 가져 보았으니 나름대로 길었던 인생에 바랄 것도 더 없었다. 이제 충분했다. 인간의 의지에 의해 옮겨다니는 물건에게 제 결말을 스스로 정하기보다 매력적인 일이 있을가. 노련한 도검남사는 오히려 평온하게 마지막 길을 걷기로 했다.

 

옷소매에 물든 울긋불긋한 꽃잎이 말라 있었다. 그만큼이나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붉은 문살을 넘어 연이어 건설된 회랑, 복도를 따라 배정된 도검남사들의 방, 중심에 세워진 오오히로마와 가장 깊은 곳의 사니와의 거처. 이 모든 건물을 감싸고 있는 결계는 아직 건재했다. 아직까지는 버텨내고 있었다.

 

혼마루의 뒷마당에 조성된 작은 정원 역시 아직은 푸르름을 잃지 않았다. 정원의 중심에 자리한 연못을 향해 돌아드는 시냇물도, 연못에 반쯤 걸쳐세워진 누각도 조용히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본성을 누른 적막에 숨이 막혔는지 졸졸 노래하던 시냇물은 발소리조차 내지 않았고, 연못에 가득 피어 있는 수련은 빛을 잃었다.

 

네가 살아있었을 동안에는 저들 역시 생생했건만. 주인을 닮은 색채를 띄었던 화려한 꽃은 밤이 되면 그 잎을 접고 잠들곤 했다. 주인을 잃었기에 그들 역시 슬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지금은 그 화려함을 잠재운 채였다. 주인인가. 주인과 같은 존재처럼 자리하는가. 수련은 밤이 되면 아름다운 꽃잎을 닫고 잠을 잔다. 밤이면 향기로운 꿈을 꾸던 주인 역시 수련과 같았다. 하얀 얼굴에 바알간 꽃물이 들어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도톰한 입술 사이로 향긋한 숨을 들이쉬고 내쉬던 주인의 모습이 츠루마루 쿠니나가의 뇌리에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보고 싶다.

 

경호를 자청하여 그 곁을 지키던 날들, 모르는 새에 꿈에 끼어들어 고생하게 만들 악귀들을 쫓아내기 위해 어둠 속에서 형형한 금빛 눈을 치켜뜨고 허공을 노려보던 날들, 잠들었던 주인의 인기척이 들리면 일부러 자는 척 눈을 감고 있다가 이럴 거면 경호는 왜 서는데, 라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듣던 날들, 경호 대신 깊고 깊은 이 밤에 손을 잡아달라던 날들. 여태 저를 쥐었던 어떤 주인보다 짧은 연을 맺었건만 생각이 깊어질수록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 심장도 이제는 고장나 버렸는가. 츠루마루 쿠니나가의 뼈마디가 도드라진 창백한 손이 제 가슴께를 짚었다. 분명히 뛰고 있건만 멈추어 있었다.

 

‘이리 될 줄 미리 알아차렸어야 했다. 내 불찰이다. 끝나지 않는 잠 속에서 그대는 이리 피어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대는 진정으로 떠나버린 겐가.

 

하얗다 못해 투명한 속눈썹에 이슬이 맺혔다. 자잘하고 투명한 이슬은 이내 부서져 사라졌다. 덧없는 숨, 덧없는 생, 덧없이 사라지는 추억, 내리누르는 삶의 무게에 츠루마루 쿠니나가의 고개가 바닥을 향했다. 연못에 반쯤 제 몸을 걸친 누각 난간에 기대어 자신을 향해 돌아보던 방긋 웃는 얼굴이 선명하게 그의 눈에 비쳤다. 잡고 싶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손을 붙잡고 다른 이, 누구에게도, 누구에게도 그 옆자리를 주지 말라고, 말해야만 했다.

 

머리가 울렸다가 이내 무감각해졌다. 폭풍의 전처럼 고요했다. 츠루마루 쿠니나가의 발이 다시 다져진 흙으로 정돈된 길을 타고 숲속으로 향했다. 정원의 가장 깊은 곳에 주인이 사랑했던 장소가 있었다. 공적인 거처에 있기보다는 즐거움을 추구하던 주인이었다. 주인과 츠루마루 쿠니나가만의 아지트는 잘 숨겨져 있었다. 오로지 둘만의 장소를 골랐다. 손수 나무를 짜맞추어 벽을 올린 집에서 수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었다. 모든 게 공개된 수장의 삶에서 잠시동안 벗어나 있을 수 있는 장소에서 둘은 다른 도검남사들을 상대로 한 장난을 구상하곤 했다.

 

고민은 끝났다. 이제는 충분했다. 마지막 안식처로 가장 즐거운 추억이 깃든 장소를 선택했다. 부장품 취급도, 더 이상의 도굴과 탈취도 없는 장소이기를 바랐다. 이번이 마지막이어야만 했다.

 

‘저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과연 이런 본성에 부임해 올 것인가? 그리 오는 자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럴 리가 없네. 이제는 그대도 알고 있겠지. 인간의 거죽은 무슨 마력이라도 있는 듯 하네만…. 자네, 잠시만 그 걸음을 멈춰줄 수 있겠나? 아니, 멈춰 주시게. 저승사자를 향해 있는 사정 없는 사정을 해서라도 그 자리에 있게나. 비명에 떠나는 이에게 그 정도 정은 베풀어 주리라 믿네.’

 

츠루마루 쿠니나가의 창백한 얼굴에 소년과 같은 장난기는 없었다. 담백하디 담백한 표정으로 그는 자그마한 아지트를 둘러보았다. 집의 정중앙에 나무그네를 걸어놓은 자리 외에는 모두 다다미를 덮어 둔 아지트는 주인을 잃은 뒤로 먼지를 덮어쓰고 있었다. 그는 주인이 살아있을 때처럼 쌓인 먼지를 쓸고 닦았다. 식신과 도장병을 부리면 금방 끝날 일을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제 손으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닦아냇다.

 

아하하, 츠루마루. 또 부딪혔어?

 

전통 가옥의 형태를 갖추려면 품도 많이 들고 그러다 보면 비밀이 아니게 된다며 낮게 세운 벽에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간혹 머리를 부딪치곤 했다. 그야 작은 오두막이고, 소꿉놀이를 위한 집이니 주의하지 않으면 당연히 발생하는 일이었다. 어이없는 상황에 걱정하면서도 깔깔 웃는 주인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렸다.

 

새파란 하늘에 그림처럼 구름이 떠 가는 날이었다. 이마에 혹이 날 것 같이 얼얼한 츠루마루 쿠니나가에게 주인이 손을 뻗었다. 괜찮냐고, 괜찮다고 답하다가도 서로의 얼굴을 보곤 시원스레 웃었던 기억의 파도에 그는 몸을 맡겼다. 목소리가, 그 목소리가, 살아있는 듯이 귀를 때렸다. 여러 차례 부딪치다 보니 주인은 나중에는 또 부딪쳤냐며 놀리곤 했다. 츠루마루 쿠니나가 역시 한 번씩은 쓰러지는 척을 했다. 그럴 때면 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주인에게 왁! 하고 놀래키며 웃던 것이 참으로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잠깐, 끓인 지 얼마 안 되었-.

악, 뜨거워!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무심코 맨손으로 잡고는 떨어뜨리는 주인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울렸다.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작은 화로를 닦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화로 안에 부지깽이가 꽂혀 있었고, 그 안에 자리하고 있던 숯 위로도 허연 먼지가 쌓여 있었다. 불이 붙을까.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숯 위에 쌓인 먼지도 호호 불어 닦아냈다. 화로 근처에 부싯돌이 떨어져 있었다. 그날 사용했던 찻주전자와 찻잔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킁킁, 코를 간지럽히는 향기는 그 때의 향이었다. 차는 마시고 싶지만 고르러 나가기는 귀찮고, 다도실에 있는 우구이스마루 명의의 고급 말차 보관함에서 슬쩍했던 그 향이었다.

 

아, 들켰잖아.

설마하니 이게 깨질 줄 누가 알았겠나.

 

말차를 슬쩍한 것은 좋았지만 보기 좋게 고급 찻잔을 떨어뜨려 깨뜨린 덕분에 그와 주인은 눈이 뒤집히다시피 한 우구이스마루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결국 붙잡혀서 나란히 혼마루의 복도에서 무릎 꿇고 손을 들고 가슴에 ‘우구이스마루의 차를 훔치다 찻잔을 깼습니다’ 판넬을 내걸고 있었다. 주인의 팔이 아플 것 같아 시선을 돌리겠다고 일부러 과장된 행동으로 도망쳤던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멀리 가지 못해 붙잡혀 멍석말이를 당했었다. 아프기는 했지만 꽤 재미있었다. 그렇게 슬쩍한 말차를 마시던 찻주전자와 찻잔에 쌓인 세월을 닦아냈다. 그 시절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거기 서라, 츠루마루 쿠니나가!!!!!!!!!!!!!!!

싫다네! 어디 한 번 잡아 보시게나!

하세베 미안!

 

새해의 시작은 늘 오미쿠지와 함께였다. 팔각형의 오미쿠지 함은 늘 알록달록하게 칠해져 있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했다. 함은 시간정부에서 작은 여우 요괴의 입으로 물어 왔었건만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주인 몰래 함을 바꿔치기하려다가 들켰었다. 도망치는 츠루마루 쿠니나가가 붙잡혀 주인 앞에 서서 잔소리를 듣자 사니와는 ‘오미쿠지는 그냥 마음가짐을 그리 가지라는 것뿐이잖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라고 물었었다.

 

기분의 문제잖나?

 

바꿔치기했던 오미쿠지 함이 추억의 일부처럼 책상에 엎어져 있었다. ‘대길’만으로 채워놓았던 오미쿠지 함에도 켜켜이 세월이 쌓인 채였다. 하얀 손끝이 어루만지는 자리마다 기억이 되살아났다. 색색의 오미쿠지마다 주인에게 무슨 말을 할까, 고르고 고르던 연말의 밤으로 온 듯했다. 아직 바래지 않은 색깔, 떠오르는 기억, 당신의 말투. 그 모두가 츠루마루 쿠니나가의 오랜 검생 속에 선명하게 새겨져서는 아픈 기억들을 대신해 가슴을 채웠다.

 

그이가 다쳤다고?

지붕에서 떨어졌어.

자네, 설명이 좀 필요한 것 같네만.

별을 보고 싶다 노래를 부르더니 지붕을 타고 올라가려다가 떨어져서 다쳤다는데.

 

‘너’는 별을 좋아했다. 별을 좋아하다 보니 그에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어 혼마루에 오기 전에는 천문대에 자주 왕래했다 말했다. 조금이나마 하늘에 가까워지고 싶고, 별에 가까워지고 싶어 지붕에 오르는 행동을 츠루마루 쿠니나가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의 갈망이었기 때문이었다.

 

발목에 부목을 대고 절뚝이며 걸어다니는 내내 불퉁하던 주인을 안아들고 오두막으로 향한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튼튼한 목재로 사다리를 만들어 줄테니 그걸 타고 지붕에 함께 올라가자 말했다. 감동받은 표정을 하곤 고개를 끄덕대는 주인을 위해 만든 사다리는 며칠 지나지 않아 완성되었다. 사다리를 벽에 붙이고, 주위에 푹신한 짚을 잔뜩 깔고 나서야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주인과 함께 지붕에 올랐다. 하이얀 달이 차오르기 시작했던 밤에 본 하늘은 천 년 이래로 가장 아름다운 날이었다.

 

달이 참 아름답구나.

 

근시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인은 하늘에 총총 뜬 별을 따라 손끝으로 책에서나 보았던 별자리를 그렸다. 츠루마루 쿠니나가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 밤을 채웠다. ‘너’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더니 어깨 위로 부드러운 무게가 느껴졌었다. 곤히 잠든 ‘너’를 양 팔에 안아들고 평소처럼 지붕 아래로 뛰어내릴 수는 없었다. 방 안에 매달아 둔 벤치 그네 위에 앉아 ‘너’를 재웠다. 숨겨 놓았던 사다리도 그 자리에 있었다.

 

짝 잃은 새의 심정이 이럴까. ‘주인’에서 ‘당신’으로 ‘그대’로, 끝내는 ‘너’로 바뀌었던 그 호칭의 종착역을 잃은 흰 새는 허탈함에 사로잡혀 그네에 몸을 묻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공허해진 금빛 눈에 오두막의 구석구석마다 ‘너’의 모습이 비쳐 갈 곳을 잃었다.

바깥에서 비가 떨어졌다. 비가 오는 날에도 여기에서 시간을 보냈었던 기러기는 오두막 밖으로 나와 하염없이 그 비를 맞았다. 옷자락이 다 젖어버렸다.

 

그렇게 비 맞으면 감기 걸려.

 

‘너’의 목소리가 들린다. ‘너’는 지금 내 곁에 있구나. ‘너’의 걱정을 사고 있구나. 아직, ‘너’는 그를 따라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구나. 어디로 눈을 돌려도 그는 ‘그’와 함께 있었다.

 

‘이제는 아주 조금일세.’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순찰을 돌듯 본성을 한 바퀴 더 돌았다.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상황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던 폐기된 자들의 비어버린 방 앞에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평온한 마음이었다. 사니와의 집무실 바로 옆에 마련해 두었던 제 공간에 잠시 머물렀던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품에서 오마모리를 꺼냈다.

 

오마모리에서는 여전히 주인의 향이 났다. 주인의 염원을 실은 부적을 손에 쥔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다른 손에 본래의 검을 쥐었다.

별채에 안치된 주인은 당장에라도 그 눈을 뜨고 일어나 웃으며 장난칠 듯 생생했다. 손을 뻗으면 숨이 느껴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주인의 낯빛은 세상의 모든 풍파를 건너뛰어버린 듯 평온했다. 주인을 잃은 근시는 부적을 꺼내 자신의 숨을 불어넣었다. 사니와명이 새겨진 명패가 옷깃에 놓여 있었다.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옷을 찢어 자신의 명패와 주인의 명패를 감싸 비단 주머니에 넣어 주인의 손에 쥐어주었다. 차게 식은 힘 없는 손에 아픔이 가슴을 할퀴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양 팔로 주인의 몸을 안은 하얀 학은 정원 깊은 곳 오두막을 향해 걸었다.

 

잘 정돈된 오두막의 중심에 놓인 나무그네에 그들이 앉아 있었다. 아이스크림이라는 것을 저 그네에 앉아 처음 먹어보았었다. 차갑고 청량한 아이스크림의 맛보다 주인의 신이 난 얼굴이 좋았었다. 눈을 감았다 뜨는 찰나의 순간에 환영은 사라졌다.

 

그네 위에 조심스레 주인을 눕혔다. 아직까지 뻣뻣하게 굳지 않은 팔 안에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안겨 주었다. 부싯돌을 부딪쳐 화로에 불을 붙였다. 숯에서 피어오른 불꽃을 먹이삼아 나뭇가지에게 주었다. 타오르는 나뭇가지 여러 개를 오두막의 기둥뿌리에 쌓아놓았다. 타다닥, 타닥, 나무 타는 소리가 그새 바닥을 하나둘 집어삼켰다. 꺼지지 않을 정도로 커진 불을 보던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그네에 앉아 주인의 몸을 그러안았다.

 

도검에게 불은 탄생이고 파괴였다. 익숙한 감각이지만 쓰리다 싶기도 했다. 외벽이 불타며 발생한 붉은 빛이 새하얗고 단정한 얼굴에 일렁였다. 열기가 머리를 감쌌다. 츠루마루의 발치에 불이 옮겨붙었지만 그렇게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나 둘 녹아 잿더미가 되어간다 생각되지 않았다. 스스로의 손으로 선택한 죽음은 결말이 아니었다. 불타오르는 금빛 눈 속에 길이 열렸다. 저승을 향한 길에 주인이 시커먼 형체와 함께 멈춰서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고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불길 속에 완성된 피에타는 그렇게 흔적 없이 열기에 삼켜졌다.

 

화재 경보도 울리지 않았다. 때맞춰 제를 준비하러 나온 지로타치가 검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지 않았다면 마지막 흔적을 수습할 방법은 없었을지도 몰랐다.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는 검게 타버린 공터를 보며 혀를 찼다.

 

“츠루 씨, 결국….”

“뭐, 꽃은 보기도 싫다 말했었잖아.”

 

오오쿠리카라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로타치에게 가 제사주를 한 잔 받아왔다. 옥을 깎아 만든 잔에 담긴 맑은 술이 검은 재 위로 뿌려졌다. 약간의 뼛가루와 숯검댕이 되어 더는 이전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가루가 뒤엉켜 있었다. 그을음이 짙게 남은 오마모리만이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의 증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말이지, 스스로 헌화가 되어버릴 필요까지 있었을까.”

“츠루마루 공의 선택입니다.”

 

타로타치의 말 속에도 미처 알아채지 못한 이들만이 공유하는 짙은 후회가 담겨 있었다. 인세로 불려온 신검은 주인의 영향으로 일말의 인간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다른 남사들도 하나둘 제사주를 그 위로 뿌렸다. 금빛의 눈을 갖고 있는 남사 한 명의 눈물이 제사주에 섞여들었다.

 

맑아진 하늘 멀리 흰 구름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고 있었다. 그 먼 곳에서는 이상향을 만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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