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인분 사니와
# 덴님 키워드 줘서 고마어여 + 나기사 자꾸 캐붕내는 거 같아 미안해여 ..(._,
# 여전히 삽질 중
제 전화번호가 맞다고 시키지도 않은 배달을 보내고, 쪽지까지 곱게 써 보낸 상대방이 자신이 거는 전화를 씹어먹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기사는 잇몸을 까득 깨물었다. 이런 엿 같은 일이 또 있으랴. 지갑 한 번 놓고 왔다가 자신이 대체 무슨 쪽을 당하는 건지 나기사로서는 어이가 저 멀리 가출할 일이었다. 미남과의 로맨스 같은 거야 망상으로나 즐겁지, 실제로는 로맨스도 뭣도 아닌 놀리는 짓뿐이라고 단정지은 나기사는 그냥 봐도 나 화 났소, 하는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대충 비집어 넣었다.
쾅쾅 구두굽이라도 망가뜨릴 것처럼 나기사는 발을 구르며 사무실로 내려왔다. 기분이 뭐 같으니 일도 제대로 안 풀렸다. 모니터에 뜬 검은 것은 꺼진 불이오, 흰 것은 켜진 불일지니 뭐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기사 씨, 잠깐 좀 봐요.
설상가상으로 팀장까지 착 가라앉아선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나기사를 불렀다. 제가 작업한 서류 중 하나에 0 한 글자가 대차게 빠져 있었다. 순간 그녀는 아득한 하늘 너머의 할머니가 인사하는 것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야근을 하는 자신이 그 위에 겹쳐졌다. ‘혼마루’라는 다소 낯설고도 낯익은 카페의 칙칙한 초록색 점장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따지고 보면 빌어먹을 그 자식 때문에 오늘 이 꼴이 난 것이라고. 상사의 잔소리를 들으며 나기사는 속으로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결국 나기사는 오늘도 야근 멤버가 되어 있었다. 점심시간에는 회사 근처에서 홧김에 제일 비싼 메뉴를 시켰는데 하필이면 젓가락 장식이 동박새 무늬였다. 씨발. 나기사는 대체 왜 자신을 놀리는 그놈의 카페 사장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며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었다. 늦게 나온 만큼 음식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만큼 맛있었지만 나기사의 입 속에서는 모래와 자갈만 굴러다녔다. 제가 무슨 정신으로 밥을 먹고 나왔는지도, 중간에 어느 카페에 들러서 평소와는 전혀 다른 커피를 들고 있는지도 나기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냥 ‘그 빌어먹을 카페 점장 자식’이 거슬린다는 것뿐이었다.
야근을 하다 어깨가 뻐근해진 나기사는 회사 건물 앞마당의 자판기 앞에 섰다. 동전을 두어 개 꺼내 밀어넣었다. 쨍그랑 한 푼, 쨍그랑 두 푼…. 마음이 심란하니 어디서 튀어나오는 건지 모를 동요를 우울하게 흥얼거리던 나기사는 고민을 시작했다. 밀크 티 캔과 오렌지 주스 캔을 보던 그녀는 결국 양 손 검지를 들었다.
이왕이면 주스로 마셔요.
들리지 않아야 할 목소리에 놀란 나기사는 손이 미끄러져 밀크 티도, 오렌지 주스도 아닌 알로에 음료를 선택해버렸다. 자신을 놀라게 한 사람에 대한 짜증도가 이만큼 올라가 나기사는 한껏 볼을 부풀리곤 홱 얼굴을 돌렸다.
새하얀 와이셔츠, 곱게 묶인 고급스러운 넥타이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지, 이런 옷을 입은 사람은 본 적도 없는데? 나기사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회사에 들어온 뒤 한 번도 굴리지 않은 속도로 머리를 굴리려니 골이 아팠다. 이러니저러니 행동으로 사람을 돌게 만들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싫지 않은 사람이었다.
당신…
좋아하지도 않는, 오히려 남이 줘도 싫다며 돌려보내고 싶어지는 알로에 음료를 쥔 나기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기사는 상대방에게 알로에 주스 캔을 던지듯이 떠넘겼다.
흥, 그거나 마셔요.
응, 고마워요.
잠시 뜸을 들인 남자는 예쁘게 눈을 접어 웃었다. 밤이어서 다행이야. 나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저리도 해사하고 어여쁜 얼굴이던가. 그야말로 30센티 정도밖에 안 되는 코앞에서 보는 상대방은 예뻤다. 날카로워 보이면서도 동그란 예쁜 눈과 마주하니 숨이 멎을 것 같았다. 풍성하고 긴 속눈썹은 남자의 눈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아까는 바빴어요. 혼자 있는 카페인데 주문이 밀려서. 미안해요.
아하하, 그럴 수도 있죠.
* * * * *
미츠타다는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주워섬기는 제 사촌형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몇 백 년, 아니 곧 천 년을 살아 온 자의 연륜이란 저런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절레절레. 사실 우구이스마루는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방해할 생각은 없었으니 그냥 보고 있었다. 엄청나게 가까운 거리에서 조용히 웃고 있는 휘파람새의 영롱한 눈 속에 잠겨 있는 모습은 말 그대로 신들만이 아는 것이었다.
* * * * *
화를 내듯이 알로에 음료를 안겨준 나기사는 그의 휴대전화를 받았다. 잔상처 하나 나지 않은 전화를 보는 눈에 신기함이라는 감정이 묻어나 있었다. 사람의 표정이란 재미있는 구석이 있었다. 우구이스마루는 묵묵히 상대방이 눌러 준 전화번호를 보았다. 그가 일부러 받지 않았던 그 전화번호였다. 나기사. 언제 보아도 기분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우구이스마루는 웃었다. 상대방의 휴대전화는 꽤나 상처가 많이 나 있었다. 성격대로 화끈한 건가. 달랑이는 예쁜 휴대폰걸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예쁜 장식이네요.
휴대전화는 돌려주지 않고 만지작거리던 우구이스마루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나기사는 손목시계를 보곤 표정을 찌푸렸다.
가야 해요?
미묘한 표정을 짓는 나기사를 한 번 본 우구이스마루는 제 이름은 빈 칸으로 두고 휴대전화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곤 미련 없이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이미 우구이스마루는 알고 있었다. 나기사는 오늘 연락을 해 올 것이 분명했다.
* * * * *
나기사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휴대전화를 눈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꺼내놓고 램프가 반짝이는지 계속해서 눈여겨보았다. 서류를 점검하던 나기사는 깜박거리는 램프가 반가웠다. 휴대전화의 잠금을 풀고 문자를 열었다.
[언제 끝나요? 끝나면 커피 한 잔 할까요?]
[오늘은 늦었으니까 다음에 갈게요.]
[느긋할 때 와.]
해석하기에 따라 중의적인 말을 담은 상대방의 문자를 받고 나기사는 잠깐 이마를 짚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니 나기사는 상대방의 나이도 모르고 있었다. 썩 나이가 많아보이지는 않았는데. 갸우뚱, 고운 포니테일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에이, 모르겠다. 차차 알아나가면 되겠지. 나기사는 다시 눈앞의 업무에 집중했다. 한 십 분 정도 더 하면 끝날 것 같은 양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굳이 답장을 보내지 않고 찾아가도 되겠지. 나기사는 키보드 위에 얹은 손을 재게 놀렸다.
나기사는 휴대전화가 울리는 것도 모르고 일에 집중했다. 다 끝냈다- 빌어먹을 상사의 메일에 메일을 보내고 나서 시계를 보니 한 시간 가까이 지나 있었다. 엄청 집중했나보네, 나. 역시 나야!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흐뭇하게 거울을 본 나기사는 바깥을 보았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를 하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나기사는 바깥 날씨와 제 코트를 번갈아 보았다. 하늘에서 흩뿌리는 것처럼 수없이 날리는 눈발을 그대로 맞고 돌아갔다간 내일의 자신에게 과거의 자신에 대한 욕을 옴팡지게 할 것 같아 나기사는 탕비실을 뒤졌다. 우산이 없었다. 아, 젠장. 어떡하지. 고민하던 나기사는 휴대전화의 화면을 켰다.
[눈 오네요. 우산 있어?]
삼십 분 전쯤 온 문자였다.
그로부터.
나기사는 창문에 기대 카페가 있는 곳을 보았다. 아직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혼자 하는 카페라고 했으니까 그는 아직도 자신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맞고 가야죠.]
자신이 보아도 무덤덤한 말투로 나기사는 문자를 보냈다. 일 분 쯤 지나서 손 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기다려요. 짧게 한 마디만 달랑 온 문자를 본 그녀는 가방을 정리했다. 집에 가져갈 것, 혹시라도 젖으면 안 될 것, 다시는 빼놓지 않을 지갑. 빠뜨린 것 없이 가방과 소지품을 모두 확인한 나기사는 사무실 불을 끄고 현관으로 내려갔다. 을씨년스럽게 어두운 건물은 당장에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다고, 그녀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건물 앞에 선 나기사를 향해 꽤 큰 인영이 다가왔다. 커다란 우산을 받쳐 들고 한 손에는 여느 때처럼 종이컵을 들고 있었다. 선이 살아 있는 도톰한 트렌치코트 위로 잘 어울리는 목도리를 둘러맨 그는 성장(盛裝)한 신사처럼 보였다.
들어요.
남자는 그녀에게 컵을 내밀었다. 따끈한 종이컵의 촉감에 얼어버렸던 나기사의 손이 꼭 녹았다. 장갑 안 가져왔어요? 상대방이 묻는 물음에 나기사는 순순히 대답했다. 아침에 따뜻했거든요. 하긴, 그랬네요. 무심히도 말한 남자는 한 손으로 제 목에 두르고 있던 도톰한 목도리를 풀어 온갖 바람을 맞고 있던 목을 감싸주었다.
감기 들어요.
상냥하게 말하는 상대방에게 감사합니다, 라는 말 말고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평소의 나기사를 알고 있는 친구들이라면 그야말로 두고두고 놀려먹을 일이었다. 그는 얌전히 나기사를 에스코트하며 역까지 데려다 주었다.
잘 들어가.
열차를 타는 것까지 확인한 그는 우산도, 목도리도 받지 않고 그대로 돌아가버렸다. 나기사는 한 손엔 우산을, 한 손엔 아직도 따뜻한 커피를 든 채로 빈 좌석이 많은 자리에 앉아 한 손으로 열심히 문자를 쳤다.
[우산이랑 목도리, 안 가져가요?]
[다음에 줘요. 감기 들지 마세요.]
얇은 옷차림으로 그렇게 간 당신이 더 감기에 걸릴 것 같다고, 문자를 입력하던 나기사는 황급히 모든 글을 지우고 감사합니다, 내일 가져다 드릴게요. 한 마디만 남겼다. 그는 나기사가 덕분에 잘 들어왔어요, 답변을 보낼 때까지 정답게 답변을 남겨주었다. 집에 돌아온 나기사의 손에 들려 있는 커피는 그 추운 날씨에도 식지 않고 따뜻했다. 홀짝, 잠이 오지 않는 밤 나기사의 손끝에 이어진 휴대전화에는 잘 자요, 보내지지 않은 문자 끝의 커서가 깜박였다. 여전히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는 커피처럼 끊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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