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출 수 있는 길이라면 이미 멈추었을 것입니다. 가속도가 붙은 운명이라는 것을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을까요? 별이여, 그대는 나에게 꿈을 주고 내 심장을 앗았나봅니다.

옆자리 그 녀석이 이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진즉에 알아차리고 있었다.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따라갈 수 있었지만 묻지 않은 것에 대한 답은 하지 않으려 했다. 한 번 말을 하기 시작하면, 갑작스런 전학생에 대한 말만이 많아질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모든 교류를 끊을 것처럼 행동했다.

나와서 뭘 해도 괜찮으니 학교는 졸업해야 하지 않겠니.

글쎄요. 이미 나이는 지날 대로 지났고, 이제 와서 학교에 다시 다니기에도 힘든 상황에 놓인 것이 제가 아닌가요. 해마다, 학기마다 전 담임선생님은 전화했다. 너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회유했다.

너의 상심은 잘 알고 있다.
그래요, 아시겠죠.
네가 어떤 마음인 줄도 안단다.
그래요, 그럴 테죠.
그가 이런 너를 바라진 않을 거란다.
그것도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내가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저게 먹여주고 키워주고 재워줬더니. 너한테는 애비 애미도 없냐? 너한테 부모가 뭐야?”
저 사람 때문이에요.

머리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책을 선택한 것은 다른 이유가 없었다. 맨 앞의 200. 다른 책이라면 이미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라는 소설의 5단계를 다 지났을 분량이 고작 도입부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길었다. 길디길어 지루했다. 지루한 만큼 또 어려웠다. 온 정신을 책에 집중해야만 오데뜨와 스완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었다.

책과 관련된, 또다른 책을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의 또래였던 세 명의 상처입은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도서였다. 그들은 독서 클럽을 만들어 마르셀 프루스트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했다. 대화를 통해서.

그러면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하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중요한 것은 억지로 나온 것이나마 자신의 의지가 확고함을, 그렇기에 자신이 이렇게나 무가치하다고 드러내는 것뿐이었다. 과거 총명하고 얌전한 자신은 이제 죽었다는 것을 보이는 것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행위의 의미였다. 그 날 이후로 손을 놓아버린 공부를 따라가려면 여태 해온 것의 몇 배의 노력을 필요로 했다. 노력하기 싫었다. 자신의 노력을 진심으로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아니  그저 들어주기만 해도 좋았다. 곁에 있어주는 사람, 나를 탓하지 않는 사람. 그래, 온전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세상에 둘 있을 리 만무했다. 운명 같은 것을 믿지도 않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 한 번 다가왔으니 이제는, 저세상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그였기에 노력도 무엇도 할 마음이 없었다.

숨이 멎는 날까지 적당히 살다가 말아버리는 것. 단 하나의 소원이 죽음인 삶은 얼마나 삭막한지 주위를 조여오던 호기심의 자루들을 틀어막았다. 고작 몇 시간 만에 그녀 주위에는 학교를 그만두기 전과 같은 적막함만이 남아 있었다.

누가 도시락을 까먹든, 누가 밥을 같이 먹자고 하든, 매점 같이 갈래, 묻든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같지 않으면 외면당한다. 같지 않으면 무시당한다. 같지 않으면, 조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제된다. 그것이 학교라면 있는 대로 없는 대로 아등바등 다닐 가치란 없었다. 그렇기에 모든 관심을 무시와 차단으로 일관했다. 원하던 대로 그녀는 혼자 있을 수 있었다.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옆자리의 남학생이 조금 특이해보인 이유였다.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아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목숨을 구해준 것과 같은 큰 손을 억지로 쳐냈다. 그리고 뛰었다. 곁에 있는 푸딩 머리 때문인지 그는 집요하게 저를 쫓아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묘하게 눈길이 갔던 것 같다. 이상하게 제멋대로 삐쳐올라간 머리카락에서 자신과 같은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었기에 괜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특이한 일이기도 했다. 어쨌든 눈에 들어온 이 녀석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도 찜찜해 그가 교실에 없는 틈을 타 쪽지만 하나 남겨두고, 교무실 옆에 딸린 상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남들이 말을 걸어와도 그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에게 별명을 붙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어서 쿠로, 라고.

여전히 학교라는 공간은 누구 할 것 없이 우르르, 이곳저곳 몰려다니는 곳이었다. 밀물처럼 반을 채우고 찾아왔던 아이들은 종례와 함께 썰물처럼 사라졌다. 학교란 곳은 정신없는 곳이었다. 교실은 어지러운 곳이었다. 인물 관계를 정립하느라 몇백 쪽 읽지 못한 책의 무게가 그제야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말소리가 시끄러워, 주위 공기가 역겨워. 그런 시간이 지나고 남은 것은 건너편에 앉아 있던 그 녀석뿐이었다. 이쪽 한 번, 책 한 번 보는 것이 뭐냐고 묻고 싶은 눈치였다. 책에서 눈길 한 번 떼지 않고 작가의 이름만 말해주었을 뿐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어디에다 넋을 놓고 있는지, 쿠로오의 모습을 보며 켄마는 혀를 끌끌 찼다. 그래서 그게 뭔데 아까부터 중얼거리는 거야. 고심하고 있는 쿠로오에게 공을 올리면서 켄마는 귀찮지만 쉬는 시간에 뭔지 검색이나 해볼까 하고 생각했다.
, 토톡. 휴대전화를 몇 번 두드리던 켄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작가? 웬 작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켄마는 작품 이름만 쪽지 귀퉁이에 대충 써주고는 사라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치 그 여학생의 모습 같았다. 잃어버린 시간. 못해도 몇 년은 되었다. 쿠로오는 배구에 가려져 빛이 바랜 기억 몇 개를 꺼내어 풀어놓기 시작했다. 켄마와 배구를 연습하던 날들, 어쩌다 보니 로드워크를 하다가 늦은 날. 한 번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던 옆집의 두꺼운 커튼 뒤 밝은 조명.

쿠로오의 동공이 미야기 현의 괴짜 속공을 처음 봤을 때처럼 졸아들었다. 그래.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삼 년쯤 전이었던가. 유독 아침잠이 오지 않아 학교를 일찍 가려고 등굣길에 오르던 날이었다. 앞을 걸어가던, 차분한 검은색의 긴 생머리 여학생.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색 니트 베스트가 예뻤더랬다. 등 뒤로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샴푸 향기가 코끝에 훅, 끼쳐 왔다. 넋을 놓고 따라가다 보니 네코마 고교로 등교할 뻔 했던 날이었다. 그 때도 여린 모습이었지만 지금보다는 아니었는데. 모든 것을 포기한 그런 발걸음은 아니었는데.

쥐 잡아먹은 것처럼 마구잡이로 잘라버린 머리카락은 무엇의 흔적이었던 걸까.
왜 삼 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이 자리에 붙박혀있는 걸까.
왜 여태 몰랐을까.

수없이 뛰어오르고, 공을 치고, 몸을 날리는 시간이 지났다. 스트레칭으로 마무리하고 샤워를 마치고 나왔음에도 제 교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왜일까. 쿠로오는 무엇에 홀린 얼굴이었다. 야쿠가 괜찮은 거냐고 물어옴에도 답하지 않았다. 성큼성큼, 교실로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바깥은 이미 짙은 어둠이 깔린 밤인데 교실만큼은 낮과 같았다. 벚꽃이 휘날리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들 만큼, 상대방은 그 자리에 붙박이인 듯 앉아 있었다. 뒷문도 아까 쿠로오가 열어두고 간 그대로였다. 우뚝, 그림자를 지고 선 쿠로오는 찬찬히 상대방을 뜯어보았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그 흑단 같은 머리카락에 있었던 아름다움이란 퇴색되어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잊어버리려던 것처럼 멋대로 잘라놓은 것 같았다.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토록 아름답던 사람의 뒷모습을 이리도 망가뜨린 것은 사람일까. 사람이 아닐 것이다. 사람이라면, 저토록 어여쁜, 고운 이를 다치게 할 수 없었다. 쿠로오는 다시금 제가 옆집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재구성했다. 어딘지 인상이 나쁘다던 아저씨. 초인종을 눌렀더니 화를 삭이지 못하던 사람.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소름이 끼쳤다. 나이가 꽤 들은 목소리였으니 아마도 아버지, 또는 그 연배의 누군가가 분명했다. 아름다움은 최고의 가치라고, 누가 이야기했는데. 그 아름다움을 망가뜨린 사람이 누구든 간에 쿠로오의 마음 한켠에 분노가 자리잡게 하기는 쉬웠다.

그 어린 날 반해버렸던 것이었다.

그 단순한 말에 담긴 감정은 복잡하게 얽히고설키어 견딜 수 없었다. 저 가녀린 어깨를 잡고 당신의 3년은 어디에 갔냐고, 왜 이런 모습으로 내 앞에 다시 나타났냐고. 그 날 이후로 다시 보이지 않을 거면 행복했어야지.

토해낼 수 없는 감정만이 하나둘 쌓여갔다.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묻고 싶었다. , 이런, 모습이, 되었냐고. 묻고 싶은 것이 가득한데 쿠로오의 귓전을 때리는 것은 지난날의 그 목소리였다. 날카로운 절규, 그어버릴 거야. 죽어버릴 거야. 멈춰 서서는 움직일 수조차 없는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방은 그저 책을 읽을 뿐이었다.

쿠로오의 시선이 아까는 보지 못한 것에 닿았다. 책 위에 놓여 있는 철제 책갈피에 달려있는 빨간 꽃 장식. 몇 개의 꽃은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고, 몇 개의 꽃잎은 땅으로 내려앉는 빨간 꽃. 꽃무릇. 상사화. 빨갛고 위험한 그 꽃은 왜 여기에 장식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상대방에게, 무엇 하나 의미 없는 행동이 있기는 했을까. 

2nd of http://rearienne.tistory.com/124


길고도 긴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너무나도 달콤해서, 깨어날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몇 년 만에 입는 교복이 낯설었다. 분명히 스스로는 학교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냥 살아가는 것이 그였다. 새까맣다는 말로 모자란 검은색의 세상 속에 빛이 있으리라, 손짓하던 이를 따라 세상이 물들어갔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보기에 아름답더라.

 

철학과 이성의 산물로 만들어진 머리에 창조라는 개념은 오직 허구에 불과했다. 인간은 자신의 불편함을 해소할 방법을 찾는다. 그뿐이다.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은 창조가 아니라 해답이었다. 사람은 창조된 것이 아니다. 이 세상도 창조된 것이 아니다. 그저 해답을 찾는 것이 삶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해답에는, 해설에는 시작이 있는 것처럼 끝이 있다. 그리고 그 끝을 잡으려 하면 떨어져 하늘에서 멀리 날아가 사라질 것이 자신이었다.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순간, 그는 날개가 되었다. 벼랑 끝으로 마지막 중심을 던지는 순간 온통 빛을 흩뿌리는 날개가 된 그는 자신을 감싸안았다.

 

그래. 오로지 그것만이 시작이었다.

 

멈춰 있던 톱니바퀴가 다시 구르기 시작한다. 억지로 비틀려진 톱니는 반짝이는 새 것으로 갈아끼운다. 하나, , . 그의 날개 끝에서부터 시작된 빛이 형태를 갖추고, 이내 썩어버린 것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끼워맞추는 형태가 된다. 부드럽게 구르기 시작하는 감정의 톱니바퀴는 심연과도 같이 자신을 집어삼켰다. 오직 그만이 알고 있을 깊이의 심연이 내어주는 애정은 너무나도 따뜻하였다. 내 있는 곳에 그가 있으리라. 한참을 멈춰 있던 톱니바퀴가 구르자 틈새마다 시간의 꽃이 피어나 영롱하게 발했다. 나를 온전히 돌아보는 시간. 그는 날개였고, 피어나는 꽃이었고, 바다였다. 그는 꿈이었고, 북극성이었으며 태양이었다.

 

손에 들린 펜이 낯설다. 모두 함께 있지만 자신은 혼자이다.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었다. 역행하는 톱니바퀴에 피어났던 꽃은 짓이겨지고, 날개는 검은 재로 타 버린 채로 교실에 있었다. 저 하늘로, 날아오르면, 어떤 기분일까.


 

나비이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찾아 날아가는.

 

그저 밤이고 싶었습니다.

당신이라는 별을 품는.


반지이고 싶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묻히는.

 

다시 나비이고 싶었습니다.

불꽃과 함께 사그라지는.



삶은 시에 불과했다. 그것은 글로 형상화되지 않을 무엇이었다. 누군가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줄이었고, 누군가는 몇 십 장을 이어가는 단편소설이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세상 오만 곳을 다 담고 있는 몇 십 권짜리 장편소설과도 같았다. 자신의 삶은 어디에 있을까. 가늠하는 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었던 것일까.

 

멍하니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의 무게는 상대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있었다. 오도카니 자신 하나뿐인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것은 그저 있을 뿐이었다. 환영인가. 비어 있는 낡은 옆자리에 붙은 신기루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한을 품은 비인간일 것인가.

 

쿠로오는 그저 시선이 이끌리는 대로 옆 라인을 지켜볼 뿐이었다. 학과 선생의 말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대놓고 교과서가 아닌 책을 읽고 있었다. 낡고 오래된, 바랜, 바래다 못해 누런 얼룩이 군데군데 남은 책은 소중한 것처럼 화사한 무늬의 천으로 만든 커버로 보호받고 있었다. 아무 가위나 들고 대충대충 손 가는대로 손질한 머리카락이 책을 넘길 때마다 흔들렸다. 담임 교사는 이쪽을 보면서도 아무 지적도 하지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그럴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무슨 소설일까. 쿠로오는 고개를 드는 한낱 호기심에 말을 붙여볼까 생각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학생들이 교사가 내어 준 문제를 푸는 와중에도 규칙적으로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옆 자리에서 들려왔다. 마치 벽을 쌓아놓은 것처럼, 그 벽을 누구에게도 허물지 않겠다는 것처럼 견고한 고립 속에 상대가 존재했다. 죽어버릴 거라고 그토록 처절하게 절규하던 사람이 맞는 걸까, 의심이 갈 만큼 그것은 고요했다.

 

하루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학 시간까지도 여학생은 미동도 않고 그저 책만 읽었다. 쿠로오는 대놓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되는 대로 잘려선 어떤 관리도 없이 제멋대로 웃자란 검은 머리카락에서 묘한 신비감을 느꼈다. 표지의 제목마저 가려져 온통 미궁투성이인 책을 눈에 담는 옆모습의 선이 지극히 차분했다. 하루 종일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이름을 말하고, 괜찮다고 자리에 앉은 뒤로 누가 자리에 와서 무슨 말을 해도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저러다가 괴롭힘을 당하는 건 아닌가, 싶을 만큼 의도적인 무시였다. 누가 와서 말을 걸어도 상대는 미동도 않고 책 속에 빠져 있었다.

 

무슨 책이야?

몰라, 길어.


이상한 전학생에 대한 소문은 빨리도 퍼졌다. 무언가 새로운 일만 생겼다 하면 옹기종기 모여 기웃거리는 날파리들이 꼬여 왔다. 더러는 말을 시키려다가 무시당했다. 껄렁한 녀석들이 모여들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쉬는 시간만 되면 시끄럽다며 귀를 막고 잠을 청하던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가늘게 눈을 뜨고 자는 척, 옆 라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요행히도 별 일 없이 하루가 끝났다. 쿠로오는 부실로 향하기 전, 가방을 챙겼다. 아직까지도 상대는 책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교실에 사람이 다 빠져나가고, 한 순간 둘만 남아 있는 교실이었다.

 

뭘 그렇게 읽어.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공 속의 침묵과 뇌를 흔드는 절규 사이의 간극은 끝없이 컸다. 둘 사이를 줄을 타고 이어나가는 것이 관계를 트는 일이라면, 쿠로오에게 이번 줄타기는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어떡할까, 고민하는 그에게 불쑥,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과 같은 무미건조한 음성이 스쳐지나갔다.

 

마르셀 프루스트.

 

놀라자빠질 뻔한 쿠로오의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3학년이 끝날 때까지 놀려먹고, 그 뒤로도 두고두고 써먹을 만해 보였다. 스스로가 누군가로 인해 놀란다는 것이 더 놀라웠던 쿠로오는 황급히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가고도 오래도록, 교실의 불은 꺼질 줄 몰랐다. 마치 그 자리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상대는 존재했다.

# 1 . 늦잠 with 아카아시 케이지


 조금만 - 조금만 더 잘래, 아카아시, 5분만...


 이게 몇 번째인지, 아카아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자기 연인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어제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라면서 전날 밤을 새다시피 하고 아침 일찍 나가서 늦게 돌아오더라니.


 오늘은 토요일이 아니니 일찍 돌아오십시오.

 응, 응. 그래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건성으로 대답하던 (-)의 모습을 떠올리자 아카아시는 괜한 분통이 팍 터져 밤이 새도록 심술을 부리고 말았다. 결국 제 사랑스러운(?) 연인은 거의 이틀 밤을 꼬박 샌 것이나 다름없었다. 학원 선생님이기 때문에 출근이 자신보다 꽤 늦는 (-)이 조금 더 늦게 자도 괜찮긴 했지만 제가 평소에 출근하는 시간보다 더 늦게 일어나버리면 지각할 것이 너무나도 빤했다. 결국 아카아시는 간만에 연차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일찍 일어나 5분마다 사랑스러운 연인님의 알람시계 노릇을 했다.


 상대방이 잠에 푹 절어서는 5분만~을 다섯 번 넘게 웅얼대는 것이 문제였을 뿐. 

 

 아카아시는 언제나처럼 2인분을 차린 아침 중 한 쪽에 보온용 덮개를 씌웠다. 괜히 속이 터져 평소보다 거칠게 굴었던 밤의 흔적도 씻어내고, 옷을 다 챙겨 입으면서도 중간중간 5분마다 성실하게도 (-)를 깨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의 인내심이 터지기 직전까지 (-)는 자리는 커녕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있지도 않았다.


 ..오늘 월요일이라고 했잖습니까, (-)상.

 싫어.. 졸려- 

 누가 이틀씩이나 밤을 새다시피 하시라고 했습니까.

 어젠 케이지가 안 재웠잖아아. 케이지 미워. 아카아시 해. 오늘 하루 종일 케이지로 안 부를 거..야..


 억지 떼를 부리는 (-)가 사랑스러워 웃음이 나올 뻔 했다. 와중에도 상대방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아카아시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불 속에서 꼬물꼬물 투정을 부리는 연인이 어여뻤지만 그만큼 시간이 위태로웠다. 결국 그는 이불도롱이를 하고 있는 연인의 위에 올라탔다.


 정말 출근 못 하고 싶어? 



# 2 . 지각 with 이와이즈미 하지메


 이거 봐.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매일같이 늦게 나간다며 집안일을 도맡아하는 연인을 위해 간만에 월차를 쓴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는 (-)와 시계를 번갈아가며 보다가 이마를 짚었다. 나는 연차라서 좀 더 자면 된다지만, 어제 그렇게 안 자더니. 계속 자면 어떻게 되어도 난 모른다, 라고 협박성 짙은 말을 해도 꿈쩍이지 않는 연인을 보며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저걸 쿠소카와 다루듯 한 대 칠 수도 없고. 라는 생각을 했다가 제 머리통을 괜시리 쥐어박았다.


 결국 자신이 타이르고 타이르다 지쳐 이불 위에 올라탔는데도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였다. 이와이즈미는 차마 다 내던져버리고 싶다, 라는 마음을 애써 꾹꾹 눌러참으며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일어나. 

 5분.....

 10초.

 3분-

 3초.

 하지메에-

 말 늘여도 소용 없어. 일어나. 


 말로 안 될 때는 역시 힘이 답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이건 네가 자초한 거다, 라며 찬 바람이 쌩쌩 불어오는 창문을 활짝 열고는 이불을 힘으로 빼앗고 (추웟!) 짐짝처럼 제 연인을 어깨에 들쳐멘 뒤 (아파아!) 식탁 앞에 어린애 다루듯 앉혀놓았다. (이와쨩 미워!) 비몽사몽한 표정으로 (-)는 젓가락을 국에 담그곤 바빙 안 퍼져... 라고 웅얼댔다. 이와이즈미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숟가락으로 떠서 아침을 먹였다. 잘도 받아먹는 모습을 보자니 새끼 새, 아니 새새끼(이와이즈미는 어감이 이상하다는 것은 슬쩍 뇌리 한 켠으로 미뤄두었다)를 키우는 기분이 들어 흠칫했다.


 어떻게 간신히 떠지지 않는 눈을 뜬 (-)는 평소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씻고 나와서는 '이와쨩, 지금 몇 시야?' 라고 물어왔다. 평소엔 굉장히 빨리 출근하는 그니까 당연히 오늘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딱한 (-). 지옥 같은 연차인 줄도 모르고.


 10시다.


 이와이즈미는 0.1초 단위로 시시각각 변하는 (-)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뒤통수에 망치 맞은 얼굴을 하던 (-)는 딱 오 분만에 모든 옷을 갈아입고 튀어나갔다. 대견한 얼굴로 상대방이 하는 양을 바라보던 이와이즈미는 그녀의 수업 자료가 들어있는 보조가방 끈에 발이 걸려 엎어질 뻔했다.


 저 바보가...


 이와이즈미는 지하주차장으로 후다닥 달려가야만 했다. 도대체 뭘 놓고 가는 거냐. 요즘 혼자 나가는 연인에게 '날 두고 갔잖아!'를 하는 것이 유행이라던 쿠소카와 녀석을 발로 까 버린 게 어제 퇴근길이었는데 그 짓을 본인이 해야 할 참이었다.




# 3 . 지갑 with 마츠카와 잇세이


 미친 듯이 엑셀을 밟아 보조교재를 학원까지 배달해다 준 마츠카와는 돌아오자마자 이마를 짚었다. 어쩐지 아까 (-)이 자신을 보는 눈빛이 고마움 반, 폭소 터질 것 같은 표정 반이더라니, 제가 곱디고운, 예쁜, 프릴 앞치마를 입고 나갔었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아버렸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그는 '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도 좋지' 라고 애써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이 워낙 바쁘게 뛰쳐나갔기 때문에 집안 정리는 온전히 마츠카와의 몫이었다. 그는 연인의 체취가 많이도 남아있는 침대를 정리했다. 제 연인도 집안 정리를 못 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마츠카와는 그야말로 먼지 한 톨 남지 않게 탈탈 털어냈다. 


 어.


 가방걸이의 가방을 정리하던 마츠카와의 눈살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미쳐버리겠구만. (-)는 가방 두 개를 돌려쓰고 있었다. 학원에 출근할 때에는 보다 어깨에 부담이 덜 가는 백팩을, 친구들을 만날 때에는 간단한 숄더백을 썼다. 물론 지갑까지 두 개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기에 가끔씩 지갑을 빼놓는 것을 잊어버리거나, 휴대전화 여분 배터리를 잊어버리거나, 휴대용 손 소독제를 잃어버리거나, 양치도구를 빼놓고 가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마츠카와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하나도 아니고 셋씩이나 영혼을 빼놓고 간 (-)이 귀엽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했다. 무겁게도 한숨을 푹-푹 쉰 마츠카와는 어디 가서 지갑 놓고 왔다고 말도 못하고 쫄쫄 굶고 있을 연인 생각에 옷을 챙겨입었다. 오늘 수업이 열한 시부터 열 두시 반, 잠깐 쉬다가 세 시부터 저녁까지 주욱, 이라고 했으니 얌체처럼 과속운전을 하면 속은 채워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월차를 내 놓고도 운전대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자신의 반지갑과 연인의 장지갑을 잘 챙기곤 차에 앉았다. 그나마 운이 좋았는지 무식하게 밟을 필요 없이도 길이 뻥뻥 뚫려 있어 열두 시를 5분정도 남기고 (-)의 학원에 도착했다. 


 빵!


 학원 문 앞으로 아이들이 삼삼오오 나오고, 건물 안쪽에서 (-)도 나오기 시작했다. 아침잠에 취해 투정거리던 귀여운 모습과 대조되는 딱 떨어지는 선생님 차림의 (-)이 밤의 연인과도 대비되어 보기 좋았다. 아이들이 가는 모습을 보던 (-)는 낯익은 검은색의 차를 보고는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어쩐 일이야?

 타.


 미심쩍어하면서도 (-)는 점심 약속이 생겼다고 학원장에게 전화를 하곤 자리에 앉아 벨트를 맸다.


 뭐 놓고 간 거 없어?

 ...지갑?

 날 놓고 갔잖아.

 잇세이, 체했어?

 너무한 거 아냐? 오늘 저녁까지 쭉 출강이잖아. 점심은 어떡하려고.

 뭐.. 좀 모자라도, 기프티콘 결제하면 되거든. 핸드폰은 들고 왔어. 나 잘 했지?


 마치 칭찬해 달라는 것처럼 방긋방긋 웃는 (-)를 보던 마츠카와는 괜히 그녀가 괘씸해 학원에서 조금 먼 곳으로 차를 돌렸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식사가 끝난 뒤 마츠카와는 괜한 심술이 나 연인의 장지갑을 다시 집으로 들고 돌아가 버렸다. 홀로 돌아오는 길, 그는 오늘 밤도 각오하라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 4 . 헛걸음 with. 쿠로오 테츠로


 [보충 오늘이었어요?] pm. 6 : 51

 [헐 쌤] pm. 6 : 51

 [저 숙제] pm. 6 : 51

 [w조시ㅗㅇㅎㅂㅂ니다 ] pm. 6 : 52

 [아예 준비가 안 됐어요ㅜㅜㅜㅜㅜㅜ] pm. 6 : 53

 < 어쩔 수 없지... 알았어. 보충 한 주만 미뤄 줄게. 대신 또 까먹으면 숙제 두 배다. > pm 6 : 54


 (-)는 문자를 받고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이 되었다. 아니 어떤 얼굴을 해야 할 지 본인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뫄뫄야, 이 선생님이 울어야겠니 웃어야겠니.. 아까 그가 오늘 출강 오래도록 하니까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씹으라며 주었던 반건조 고구마를 입에 문 (-)는 오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펑크 문자에 온 몸의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가는 날이 장날도 아니고 이건 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일진 사나운 하루였다, 라고 이번 주 액땜이라며 넘어가기에도 전혀 기운이 나지 않았다.


 결국 (-)는 집에 갈 준비를 하며 자신의 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테츠 - 

 자기? 수업 있다며.

 스케줄이 꼬였나봐. 그때 정한 날짜랑 저장된 날짜랑.

 그래서 시무룩해요~? 오구구.

 응- 테츠네 자기 시무룩해요.

 얼른 집에 와. 맛있는 반찬 해 줄게.

 네에.


 십 분쯤 지나 삑삑, 삑 삐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쿠로오는 하루를 완전히 망쳐버린 (-)에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신발을 던지듯이 벗고는 자신의 품 속으로 달려드는 연인을 온 몸에 받아내며 쿠로오는 낮게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날이 소란해서 많이 속상했지? 쿠로오 씨도 우리 공주님이 걱정되어서 혼났어. 사랑스러운 말들을 쏟아내었다.


 차가운 몸이 코트 채로 따땃하니 덥혀지고 나서야 (-)는 웃었다. 나, 씻고, 옷도 갈아입고 올래. 테츠 보니까 이따만큼 기운 나. 연인의 밝은 얼굴이 사랑스러워 쿠로오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조용조용 입을 열었다. 


 자기야.

 웅?

 쿠로오 씨랑 식사 먼저 할래요?

 먼저? 다른 것도 다 듣고 생각할래.

 쿠로오 씨랑 목욕부터 할까요?

 !!!


 다음은 뻔한 소리일 게 분명했기에 (-)는 홱 몸을 낮춰 쿠로오의 품에서 벗어나곤 욕실로 냅다 달려 들어갔다. 문을 쾅, 닫으려다가 상대방의 악력에 제지되어 욕조와 쿠로오 사이에 갇힌 꼴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아니면.


 능글맞은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쿠로오의 얼굴을 보며 (-)는 감전된 것처럼 미동도 하지 못했다. 다음에 뭐가 나올 줄은 안다지만, 이렇게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지! 긴장 가득한 침묵 속에 꿀꺽, 침을 삼키는 연인을 눈에 가득 담은 쿠로오는 검은 색의 반팔 상의를 살짝 들어올려 복근이 잘 잡힌 배를 상대방에게 보여주었다.


 나한테 잡아먹히는 건 어때? 


잊을 수 있나요. 잊히던가요. 그저 웃게 되던가요. 혹은 그저 울게 되던가요.

 

그 순간의 절망감을, 그 나날들의 공허감을 자신 혼자만이 아는 것이라는 자만은 하지 않음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무기력감이 온 몸을 덮친다는 것. 세상은 하얗게도 보이다가, 그저 검다가, 색채 빠진 밋밋한 회색이 되어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알 것이다. 그 경험은 무엇보다 지독하다. 그 무엇보다도 농도 짙은 늪이며, 떨쳐낼 수 없는 무게추가 되는 것이다.

 

경험이 없는 이들만이 쉬이 말한다. 시간이 약이라고. 지금의 아픔은 잠시일 뿐이니 너는 네 인생을 즐기라고. 그마저도 알고 있었다. 뼈저리게 알고 있다. 느끼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물을 마시려다 컵을 놓쳐 깨었다. 흩어진 조각들을 보다 주저앉는다. 쓸린 몸에서, 이곳저곳에서 피가 배어나오지만 통각은 이미 잠들었다. 맨손으로 유리조각을 담는다. 갈증조차 느껴지지 않아 주저앉았다. 오늘은 또 며칠이나 갈까.

 

겨울이 지나면 해가 바뀐다. 돌아가야 했다. 마치지 않은 것이 왔다. 어차피 똑같을 것을. 돌아가거들랑 새로운 반, 새로운 사람들, 변하지 않는 자신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되었는지, 세지 않아 몰랐다. 자신은 그대로였다. 자그마치 5년을, 6년을 바라보는 감정의 톱니바퀴는 언제쯤 멈출까. 시간은 느리게 흐린다. 아니, 점차 느려져 간다. 아무리 몰입해도 한 시간이 지나지 않는다. 앞을 보다가 떠오르는 것은 단순히도 그의 미소뿐이었다.

 

그와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생겨나지 않았을까요.

 

혼란스럽다. 애정한다. 후회한다. 좋아한다. 그리워한다. 원망한다. 슬프다. 만나고 싶다. 만나러 갈까. 나빴다. 아니, 내가 나쁘다. 당신은 그저 가만히 있는데 이런 마음을 먹는 내가 나쁘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행복하길 바란다. 나는 이렇게 살아가지만, 당신은 그곳에서나마.

 

수도 없이 쏟아지는 감정들은 소용돌이여서 뇌를 쥐고 흔든다. 벗어나고자 하지도 않는다. 의미 없는 몸부림이었다. 그렇게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달도 별도 잠든 시간에 단 하나 바라는 구원이라고는 당신과 만나는 삶. 무겁게 가라앉은 잉크를 찍어 매일 마지막 편지를 쓰듯 깨어 있었다.

 

옆집의 불은 매일같이 켜져 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때로 이른 새벽까지.

 

커다란 창문을 나란히 맞댄 건너편의 집에는 누군가가 살았다.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둔 이가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웃에 별 관심이 없다가도 쿠로오는 저 방에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고민했다. 언제나 두꺼운 커튼으로 방 안을 가리고 있는 집이었다. 커튼 사이로 비쳐 나오는 불빛만이 반짝였다. 어린 켄마의 손을 잡고 나가 배구를 하고 돌아올 때도 하얀 불빛만이 바깥으로 새어나왔다. 흔한 그림자 하나도 지지 않는 창을 보며 누굴까, 쿠로오는 제멋대로 상상했다 지워냈다. 무례라면 이만한 무례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열 살 즈음부터 보았던 불빛은 고등학교 삼학년이 될 겨울에도 여전했다. 연습이 끝나고, 켄마를 들여보내고 집에 오는 길, 희끄무레한 옅은 불빛만이 흘러나오는 커튼 안에 그림자가 비쳤다. 쨍그랑. 이내 물건 깨지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꺼져. 꺼지라고, 그어버릴 거야, 다가오지 마. 악에 받친 소프라노 톤의 절규가 두꺼운 천 사이로 새어나왔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직감에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옆집 초인종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짜증 섞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

누구시냐니까요?
죄송합니다. 집을 착각했습니다.

 

그걸로 충분했다. 뭔지 몰라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방학이 끝나고 잠들었던 봄꽃들도 하나둘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올해는 해내고 싶은 것을 해내자, 라는 마음으로 나서는 등굣길엔 잠들지 않은 별들이 말간 하늘에 떠 있었다. 지난 밤 귀곡성과 같은 울음소리를 들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차게 식은 공기는 들이마시기 좋았다.

 

오야?

 

쿠로오는 어떤 광경을 보고 발을 멈췄다. 딱히 그의 생활 반경 내에 본 적 없는 여학생 하나가 제 학교의 교복을 입고 앞서가고 있었다. 학교에서는커녕 동네에서도 본 적 없는 뒷모습은 왜소했다. 말만 걸어도 입김에 날려 쓰러질 것 같은 형상을 하고는 온 몸이 그림자에 녹아든 것처럼 걷고 있었다. 등 뒤로 맨 가방이 지나치게 무거워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에는 별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바람이 불면 사라질 것 같은 모양으로 걸었다. 위태로운 느낌에 쿠로오는 옆에 선 켄마를 챙기면서도 앞의 여학생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우연과 우연이 겹치고, 또 다시 우연으로 만들어진,

결말이 빤히 보이는 것을 삼류 소설이라고 한다면

자신 역시 삼류 소설의 속의 인물일 따름이었다.

 

등골이 바짝 서는 느낌에 쿠로오는 두어 발짝 앞서 가는 여학생의 어깨를 세게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토록 힘이 없이, 나무토막처럼 끌려오는 몸은 차가웠다. 그리고 눈앞으로 쌩하니 오토바이가 한 대 지나갔다.

 

삶이 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행동임에도 여학생은 덜컥 짜증을 냈다는 점이었다. 차갑게 식은 종잇장 같은 손으로 힘도 없으면서 제 손을 덜컥 쳐내고 도망치듯 가는 것을 쿠로오는 지켜볼 뿐이었다.

 

지하철의 같은 칸에 타고도 불편함은 계속되었다. 켄마를 2학년 교실에 우선 데려다 놓고, 제 짐을 책상 위에 던져놓고 쿠로오는 부실로 향했다. 부 홍보도 홍보지만 연습이 우선이었다.

 

땀을 흘리고, 샤워를 마치고 돌아오니 책상 위에 작은 카드가 놓여 있었다.

 

[ごめんなさい。]

 

약하게 이어지는, 미묘하게 떨리는 글씨체에는 단 한 마디밖에 없었다. 딱히 누구에게 사과받을 일을 당했던가? 쿠로오의 머릿속에는 아침의 그 여학생 말고는 따로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종이 치고, 조례 시간에 담임은 웬 여학생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아까의 그 여학생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피한, 제멋대로 자란 검은 머리의 여학생. 손이라도 닿으면 그대로 부서질 것 같은, 가냘픈 인형 같은 여학생이었다.

 

(-). 잘 부탁해.


몸을 책상에 파묻고 잠시 쉬던 쿠로오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어버릴 거야.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 초인종을 눌러보곤 잊어버렸던 겨울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교실 맨 뒷자리, 비어 있는 책상 한 개. 쿠로오의 옆 라인이었다.

 

일단 저기 앉고, 불편하면 이야기해 주겠니? 앞자리로 옮길 수 있도록 할게.

괜찮습니다.

그래. 잘 부탁한다.


담임교사의 말에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조용히 움직인 여학생은 너무나도 고요하게 자리에 앉았다. 마치 눈을 돌렸다가 다시 바라보면 투명하게 사라져 있을 요정처럼.

 

# 네이버, 스즈카님 [ 한 프로젝트 ] 사랑 : 청불조 (아카아시 케이지, 쿠로오 테츠로, 마츠카와 잇세이)

# 왜 이렇게 길어졌지?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욕 주의





아카아시-”

, (-).”

스무고개 하자!”


지긋지긋한 시험이 끝나고 (-)는 기세 좋게 교실을 박차고 나갔다보쿠토보다 조금 먼저 아카아시에게 도착하기만 하면 잠깐 동안의 장난칠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머리카락을 가닥가닥 휘날려 다가선 2학년 교실에는 마침 아카아시가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다짜고짜 반으로 쳐들어간 (-)는 기세 좋게 아카아시를 붙잡고 스무고개를 하자는 말을 꺼냈다.

 

.”

.”

싫습니다.”

하자.”

싫어요.”

.”


몇 번이고 하네 마네 실랑이를 벌이던 아카아시는 결국 제가 졌습니다라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저 먼저 시작해도 됩니까물어왔다. (-)는 벙 찐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언제까지 합니까.”

답 맞출 때까지?”

평생은 안 됩니다.”

설마.”

그럼시작합니다.”


하나그것은 시선을 뗄 수 없는 그림입니다.

 

시선을 뗄 수 없는 그림? (-)는 전시회나 미술 교과서 속에서 겨우 몇 번 봤던 그림들을 떠올렸다그런 그림들의 제목을 아카아시가 주제로 던지지는 않을 것이다 – 라는 생각이 들어 볼을 부풀린 제 선배에게 아카아시는 답이 되는 단어를 생각하며 하나의 힌트를 더 내주었다.


그것은 곁에 두고 싶은 행운의 부적입니다.

 

그래서 이게 대체 뭔데?”

“(-)상이 맞추실 문제요.”

 

아카아시 케이지는 갑작스런 투어택을 성공시킬 때처럼 승리자의 웃음을 지었다.

 

못 맞추시면, (-)상 저랑 -------------- 하시는 겁니다.”

 

(-)는 아카아시가 입모양으로 한 말이 미치도록 뒤통수를 찔러댔지만 입을 삐죽이며 제 부실로 향했다수예부에서 만들고 있는 십자수 열쇠고리에 자꾸만 아카아시의 말들이 아른거렸다이게 뭘 말하는 걸까그림이고 부적이라는데글쎄어렵네아카아시 군도 참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부활동을 마친 (-)는 집에 가는 길에 올랐다.

 

아카아시.”

“(-)생각해 보셨습니까?”

도무지 모르겠어네잎클로버야혹시?”

아뇨그럼 힌트를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새장 안에 가두고 싶은 보석입니다.

 

학교 운동장 멀리까지 누군가의 절망에 찬 절규가 울려퍼졌다.

 

* * * * *

 

다음 날도 (-)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등교했다교실 제 자리에 앉아 스무고개 – 사실은 열 고개지만 를 위해 그가 준 힌트를 적어보고 곱씹어보아도 보석과 부적그림의 교집합을 알 수 없었다그렇다고 힌트를 또 달라고 하기는 자존심이 상했다펜까지 물어뜯는 (-)를 향해 옆자리의 야쿠가 불쑥 몸을 내밀었다쿠로오와 친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와 친하게 되어버린 사이야쿠는 고양이상의 얼굴을 하고 다가와 노트 귀퉁이를 보았다.

 

이게 뭐야?”

테츠랑 스무고개 내기 한 거.”

며칠까지인데?”
못 맞추면 평생이라는데.”

?”

농담이겠지?”

농담이어야지.”

근데 진짜 모르겠어.”

그림부적보석그러네물건 같은 게 아닌 거 아냐?”

그러려나?”

오야친구 찬스를 써도 된다고 한 적은 없는데.”

 

쿠로오 테츠로는 어느새 큰 키로 위압감을 자랑하며 머리 위에서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엄한 듯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는 (-)가 들고 있는 노트를 머리 위로 높게 들어올렸다.

 

이렇게까지 공부했으면 시험도 좀 더 잘 봤을 것 같은데.”

.”

힌트 하나 더 드리지 말까요, (-) ?”

.”

 

쿠로오는 노트를 빼앗아들고는 뭐라뭐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동글납작한 (-)의 글씨체 아래 그의 필체로 한 문장이 더 적혔다.

 

그것은 결코 감상을 멈출 수 없는 선율이야.

 

이게 힌트냐?”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싫으면 빨리 맞추든가쿠로오 상은 갑니다빠이빠이.”

 

볼멘소리로 이딴 걸 힌트라고 하지 말라고오망할 고양이 놈아으르렁거리는 (-)와 다 안다는 표정으로 한심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야쿠를 뒤로 한 쿠로오는 교실 맨 뒷자리의 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건 더 어려워졌잖아.”

 

하루 종일 고민하고도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쿠로오를 향해 마음속으로 가운뎃손가락을 날린 (-)의 머릿속에는 수업 내용도 들어오지 않았다하긴고민한다고 될 일도 아닌가함께 머리를 맞대 주던 야쿠도 물건은 아니고뭔가 비유하는 것 같은데.’ 라는 말만 남기고 부실로 먼저 향했다결국 (-)는 아직 가방을 싸고 있는 쿠로오에게 가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테츠힌트 더 줘… 아무리 봐도 모르겠어.”

오빠.”

?”

오빠라고 불러 주면.”

이걸 콱.”

힌트 필요 없어이 오빠는 바쁘답니다?”

.”

간다.”

오빠……새끼야!!!!!!!”

그걸 원한 건 아닌데… 어디친절한 쿠로오 상이 베풀지 뭐.”


다섯그것은 어둠 속에서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별이야.

 

-, 뒤질래?”


오야예쁜 입으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었습니다만?”

쿠로오는 능글맞게도 만면에 미소를 띠고는 몸을 훅 숙였다. (-)의 귓가에 숨결의 온도가 느껴질 만큼 다가서서는 낮은 목소리로 힌트를 하나 더 제시했다.


여섯.

그것은 시선을 맞추면 눈동자가 타버릴 것처럼 뜨거운 태양이랍니다.

 

이쯤 되면 정말 알 법도 한데.”

테츠 너무해.”

난 무 할게넌 배추해라.”


되도 않는 아저씨 개그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복잡한 (-)의 모습을 뒤로 하고 쿠로오는 부실로 향했다낯짝이 두껍다 못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법한 그의 귀 끝이 조금은 붉어져 있었다.

 

* * * * *

 

아오바죠사이통칭 세이죠의 배구 연습도 슬슬 마무리되어가는 시간이었다체육관의 불이 꺼질 때쯤학교에서 남은 일을 모두 마치고 나오던 (-)는 다시 메모지를 꺼내 읽었다하나부터 여섯까지뭐 하나 겹치는 것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문장들이 단 하나의 단어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었다문학 수업 그렇게 열심히 듣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느긋하게 눈을 반쯤 감아 웃던 옆 자리 마츠카와의 얼굴을 떠올리던 (-)는 괜히 분통이 터져 운동장에 굴러다니던 애꿎은 자갈을 세게 찼다.

 

속바지 보인다.”

잇세이.”

다 늦었는데 혼자 가려고 했어? 우리랑 같이 가자.”


슈크림을 좋아하는 만큼 닮은 하나마키의 제안에 (-)는 부실로 따라갔다깜깜한 밤길혼자 가기에는 두려운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십여 분쯤 부실에 놓인 의자에 앉아 기다리자 착 가라앉은 짧은 곱슬머리를 털며 마츠카와 잇세이가 먼저 샤워실에서 나왔다.

 

그거 아직도 풀고 있었어?”

어렵거든.”

문학 잘 하잖아.”

네 시적인 모습이 눈물나게 아프단다.”

힌트 하나 더 줄까?”


씩 웃으며 옆자리에 소리가 나게 주저앉는 마츠카와의 모습에 불안함을 느꼈지만 (-)는 어렵사리 대답했다마츠카와는 눈을 내려 감고는 소리를 죽여 웃었다. (-)는 순식간에 심장 박동 수가 두려움에 치솟는 것을 느꼈다하나마키가 빨리 나와서 자신을 도와주기만을 기도했다.

 

두 개 줄 수도 있는데.”


한 개든 두 개든 좋으니까상관없으니까 위험한 장난만은 치지 말아달라고, (-)는 속으로 외쳤다녀석에게서 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달큰청량한 샴푸와 바디워시 향기가 정신을 뒤흔들고 있었다.

 

머리 좀 말려 줘.”

?”

머리.”

 

마츠카와는 기분 좋게 의자에 기대어 앉고는 자연스럽게 수건을 내밀었다어색한 포즈로 수건을 받아든 (-)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츠카와의 등 뒤에 섰다그는 (-)의 생각이라도 읽은 것처럼 낮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라면 금방 맞출 것 같았는데.”

진짜 평생 걸리는 거 아냐우리 문학소녀 (-), 어떡하냐.”

그런데 너무 오래 걸리면나 못 기다릴걸.”

 

놀리는 것처럼 한 마디 마디 툭툭 끊어서 말을 하던 마츠카와는 머리가 대충 다 말라갈 때쯤 입을 열었다하나마키는 무엇을 하는지 아직도 샤워실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살려 줘하나마키제발… 안절부절 못하는 (-)의 모습을 즐기는지 마츠카와는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시를 읊듯 문장을 읽어주었다.

 

일곱그것은 깨어나면 사라질 것처럼 환상적인 꿈이고.

여덟그것은 가야 할 길을 고요하게 알려주는 나침반이야.

 

이제 힌트 두 개밖에 안 남았네못 맞추면 무슨 벌칙을 줄까.”

 

입맛을 다시는 마츠카와를 보며 (-)는 후회했다이럴 것 같으면 단판에 끝나 버리는 게임이나 해 버릴걸내가 왜 스무고개를 하자고 해서 이런 고통을 받는 거니과거의 나 머리 박아 빨리숱하게 소리 없이 절규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두어 골목을 사이에 두고 하나마키가 먼저 집에 들어갔다굳이 말하자면 마츠카와가 맡겨두라며 하나마키를 집으로 떠밀어 보낸 것에 가까웠다마츠카와는 자유분방하게 걸으면서도 곁눈질로 여전히 메모지를 보고 골머리를 앓는 (-)를 보고 있었다뒤에서 차가 다가오는데도 얼마나 생각에 빠져 있는지 알아채지 못하는 상대방의 어깨를 확 끌어당기며 코끝에 끼쳐오는 복숭아 향기의 로션을 맡아보기도 하고가녀린 어깨를 손 안에 넣는 감각을 느끼기도 했다.

 

퀴즈가 끝날 때쯤에나 저지르려던 일을 자칫 지금 당장 충동적으로 질러버릴 지도 모를 만큼 그것은 달콤한 감각이었다길가에서 조금 더 멀리 있는 (-)의 집까지 에스코트를 마친 마츠카와는 상체를 기울였다.

 

“(-).”

 

아홉.

그것은 하루를 삼 년으로 늘리고,

한 달을 일 초처럼 줄여버리는 마법이기도 해.

 

내일이면 답을 줄 거라고 생각할게.”

 

 

* * * * *

 

아홉 번째 힌트를 듣고서도 (-)는 답을 알아낼 수 없었다너무나도 추상적인 그것의 이름은 무엇인지도무지 알 수 없었다모든 감각들과 관련된 그것에 대해서 마지막 힌트를 구하고 싶었지만그 마지막 힌트마저 너무나도 추상적이라면 그가 말한 것처럼 평생’ 문제를 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일주일이 넘도록 괜한 머리카락만 괴롭히는 (-)의 모습을 보는 그(아카아시또는 쿠로오또는 마츠카와)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이 정도면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 복잡하고도 너무나도 쉬운 그 두 음절을 말해준다면 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소꿉친구였던같은 반의 친구였던그런 (-)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속을 끓이던 그는 결국 마지막 힌트를 먼저 주기 위해 점심시간에 체육관 앞에서 만나자고 먼저 말을 해버렸다.

 

체육관 앞의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열면서도 (-)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정말이지 고민하는 모습조차도 어여뻐서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게 하는 걸 들키지 않으려 얼마나 노력하는지, (-)는 모르는 모양이었다그는 기쁘고도 슬펐다벤치에서 도시락을 열다 말고 그는 (-)의 어깨에 슬쩍 기댔다.

 

왜 그래?”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상입니다.).

 

또르륵젓가락과 벤치 사이에서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났다얼이 빠진 표정으로 머리를 돌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린 (-)에게서는 오늘도 달큰한 복숭아 향기가 났다그는 자연스레 벤치에서 일어나 (-)의 앞에 눈높이를 맞춰 섰다.

 

이제 무엇을 말하는지알겠어?/아시겠습니까?”

 

나는 너를, ----------는 너, (-)를 언젠가부터 사랑으로 보고 있었음을.

For. Irene님 (@0notte0)

카게야마x린

* 서로 좋아하는 걸 자각하다

* 오리지널 드림주 설정이 등장합니다.

* 이벤트 참여 감사합니다. 늦어서 죄송해요!


 

손끝을 호호 불며 아침을 시작한다. 겨우겨우 일어나 지각을 피할 정도로만 맞춰 학교에 간다. 겨울, 추위에서 살아남기 위한 나무의 줄기 색을 한 머리카락이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다녀오겠습니다! 처음 내뱉는 말이 화창한 것을 보니 오늘은 아무래도 운이 좋을 모양이었다. 미술 시간을 위한 화구통도 잘 챙겼고, 교복 넥타이도 단정하게 매어져 있었다. 머플러도 예쁘게 묶였고, 첫 발걸음도 가벼웠다. 오늘도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행운을 만날 수만 있다면 남부럽지 않을 하루가 될 것이 분명했다.

 

언젠가부터 소녀는 아침에 그날 하루 일진을 점쳐보는 것을 취미삼아 하고 있었다. 머리가 예쁘게 잘 말리면 오늘은 중길, 학교 가는 길에 고양이와 마주쳐도 중길, 혹여 학교에 갔을 때 갓 연습을 마친 그 소년과 마주치면 대길, 이런 식으로. 친구들은 그게 뭐냐며 까르르 웃었지만 사실이었다. 그 소년 이라기에는 고개를 이만큼 쳐들어야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과 마주치는 날이면 까다로운 수학 교사가 문제 풀이를 오묘하게도 자신을 피해 부른다던지, 뽑기에서 꽝을 뽑지 않는다던지, 하는 아주 사사롭고 귀여운 행운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현관을 나서 골목 코너를 돌자마자 그녀는 첫 번째 행운과 맞닥뜨렸다. 집 근처에서 용돈을 몰래 털어 밥을 주는 귀여운 치즈색 길냥이와 마주했다. 반가운 것처럼 다가와 다리에 얼굴을 부비고 가는 녀석은 아침부터 웃음을 주었다. 귀여운 고양이의 존재가 마냥 즐거운 린은 콧노래를 부르며 학교로 향했다. 린은 등굣길에 두 번째 행운을 마주쳤다. 날이 차가워진 것이 이유인지 털이 한껏 쪄 부숭부숭해진 검은 양말고양이도 만나 정다운 눈인사도 했다. 오늘은 정말이지, 생각보다 괜찮은 하루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퐁퐁 솟아나 설렜다. 그리고 교실에 들어가기 직전, 오늘의 행운치를 극적으로 끌어올려주는 상대와 마주쳤다.

 

, 카게야마 군-!”

, , 안녕.”

 

평소에도 썩 친절한 표정이라고는 지을 줄 모르는 카게야마 군이었다. 활짝 웃으며 반갑게 인사하는 린에게 카게야마는 오늘따라 꽤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유가 뭐지. 카게야마 군이라면 역시 배구 때문인 걸까? 린의 머릿속에 퐁퐁 솟아오른 이런저런 생각들이 수업 종소리에 쫓겨 물거품 터지듯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첫 수업 시간은 미술이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린은 복도 반대편의 제 교실로 사라져갔다.

 

* * *

 

카게야마의 첫 수업은 수학이었다. 지난번 낙제 때문에 추가시험을 보느라 합숙에 늦게 참여한 것이 어찌나 아쉬웠던지, 카게야마는 적어도 수업 시간 내내 눈을 뜨고 있으려고는 했다. 또다시 배구 연습에 풀타임으로 참가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복잡한 수식과 미지수 앞에 선 카게야마의 머리는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어떡하면 히나타와 좀 더 공격적인 괴짜 속공을 선보일 수 있을까, 부터 시작해서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어떤 연습을 통해 채워나갈지, 점프 서브의 위력과 정확도는 어떻게 올릴지, 리시브 작전은 어떻게 짜는 것이 좋을지, 시선 페인트는 어떻게 할지. 수학이라는 학문은 이미 저 멀리 허공에서 떠돌아다니고 카게야마의 머릿속에서는 코트가 시뮬레이션되고 있었다. 자신의 머리가 채점을 마친 쪽지시험지 위로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카게야마는 배구에만 집중하고 말았다.


카게야마.”

카게야마 군.”

카게야마, 세수하고 오겠니?”


배구 생각에 온통 빠진 카게야마를 깨운 것은 담당 선생님이었다. 드물게도 눈을 뜨고 있는 카게야마를 보다가 문제 풀이를 할 학생을 지목하기 위해 별 생각 없이 날짜와 숫자를 조합한 교사는 내가 잘못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카게야마에게 찬 물에 세수를 권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카게야마는 90도로 인사하곤 복도 끝의 화장실을 향해 갔다. 복도에 발소리가 울리는 와중에도 그는 아까 생각하던 것들을 계속 머릿속에서 반복했다. 점프 서브도 좀 더 잘 하고 싶은데. 그는 아까 하던 생각을 이어 하느라 제 발이 어느 화장실로 향하는 줄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화장실처럼 생겼으니 화장실이겠거니, 하고 무심코 들어간 화장실에는 먼저 온 손님이 한 쪽 세면대를 가득 쓰고 있었다.

 

카게야마 군. 여기.”


엎질러진 화구통을 씻어내던 린은 깜짝 놀랐다. 커다란 그림자가 화장실 앞에 진 것도 모자라 그 커다란 그림자가 어느 하루 행운의 상징과도 같은 카게야마라는 것부터 여기는 여자 화장실이라는 것 뭐 하나 린에게는 놀라지 않을 것이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대길이었는데! 분명히 대길이었는데! 거하게 화구통을 엎질러 제출해야 하는 그림도 망치고 교복도 망친 참이었기에 대길은 무슨 대길이야, 라며 분노의 세척을 하는 와중이기 때문이었다.


, 미안.”

 

사과를 하면서도 왜 사과를 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표정의 카게야마의 얼굴에 이상한 무늬들이 그려져 있었다. 여자화장실에 들어온 이유는 둘째 치고, 얼굴에 묻은 저것들을 먼저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린은 말을 걸고는 유심히 상대방의 한 쪽 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 카게야마 군.”

?”


맹한 얼굴을 한 카게야마의 한 쪽 뺨에 남아있는 것들은 빨간 색 동그라미와 시험지의 일부분이었던 것이 분명한 글자 자국이었다. 린은 아주 잠시간 말을 해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 하루는 완전 망한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무심코 오늘 운세가 대길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해버렸다.

 

얼굴에 뭐가 묻은 것 같아.”


카게야마는 마치 히나타와 처음 하이파이브를 하던 것처럼 고장 난 표정을 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다고? 뭐가 묻은 거지 대체? 옆 화장실로 갈 생각은 않고 고개만 갸우뚱거리는 카게야마를 보는 린 역시 화구통에 넘쳐흐른 물이 제 교복 소매를 적시고 있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거, 시험지 자국 아냐?”

시험지?”


, 맞아. 오늘 쪽지시험 봤던 거 나눠주셨지. 카게야마는 그제야 납득하곤 비어 있는 세면대 쪽으로 걸어왔다. 여기 여자화장실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저만치 마음 속을 접어 만든 종이비행기에 실어 날려보낸 모양이었다. 린은 다른 사람도 없는데 어쩔 수 없나, 어깨를 으쓱하곤 제 물건들에 집중했다.

 

카게야마는 얼굴을 들어 거울을 보았다. 수학 담당 선생님이 세수를 권한 이유가 선명하게 뺨 한 가득 남아 있었다. 물을 슥슥 칠하는 것만으로는 사라지지 않을 흔적을 어떻게 닦아내지, 눈썹이 찡그려지는 카게야마에게 하얀 손이 불쑥 다가왔다.

 

이거 쓸래?”

 

카게야마가 고양이었다면 꼬리가 펑하니 부숭해져선 펄쩍 뛰었을 것이었다. 사나흘에 한 번 꼴로 아침마다 마주하는 소녀. 제 가슴께에나 겨우 오는 키를 가지고 있는 예쁘장한 갈색 머리의 소녀. 눈이 마주치거들랑 먼저 활짝 웃으며 안녕, 카게야마 군 반짝반짝 웃어주는 소녀. 어째선지 카게야마로서도 아침에 소녀를 보는 날이면 서브면 서브, 토스면 토스, 스파이크면 스파이크, 리시브면 리시브. 뭐 하나 잘 되지 않는 날이 없었기에 만나기를 내심 기대하며 학교에 온 지도 한 달쯤 되어가는 중이었다.


갑작스레 거리를 좁혀 들어온 하얀 손 위에는 튜브가 하나 들려 있었다. 교복 블라우스에 튀어버린 물감을 지우려고 가져 온 폼 클렌징을 선뜻 내어주는 소녀의 얼굴은 빛을 등지고 있어 색깔을 잘 알아볼 수는 없었다. 다만 카게야마의 눈에는 새하얀 손만이 빛나듯 보일 뿐이었다.

 

고마워.”

린은 화구통을 거의 다 씻어냈는지 정리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몇 번을 반복해서 씻어낸 뒤에야 말끔해진 얼굴을 할 수 있었다.

 

카게야마 군.”

?”

또 봐.”

너도.”

 

린은 예의 그 환한 표정으로 웃었다. 서로의 교실이 반대방향이었기에 린이 먼저 인사하곤 돌아섰다. 카게야마 역시 곧 돌아 자신의 교실로 향했다. 또 봐. 환하게 웃는 얼굴이 눈앞에 오버랩되었다. 소년은 순간 자신이 오이카와 토오루의 새 점프 서브를 뒤통수에 명중당한 기분이 들었다.

 

* * *


늦었잖아, .”

얼굴도 빨간데? 뭐야, 뭐야.”

화구통은 핑계고 누구 만나고 온 거 아냐?”

농담도 참.”


린은 차마 화장실에서 카게야마 군이랑 마주쳤어, 라고 말할 수 없었다. 말했다간 또 발그레한 얼굴을 한 자신을 신나게도 놀려 댈 자신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Short + 성인 AU 



요리 보고 조리 보고 아무리 생각해도 명절에 또 끌려갔다가는 엄청난 양의 음식과 허드렛일에 질려버릴 것이 뻔하다는 것을 떠올린 (-)는 그도 모르게 조용히 탈주 계획을 세운다. 연휴 첫 날, 너무도 당당하게 캐리어를 끌고 3박 4일치의 자유여행을 즐길 준비를 마치고 터미널로 향하는데 ......



 * * * 


 "함께 가시겠습니까, (-)상."

 

 어떻게 알았는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자신과 비슷한 양의 짐을 싸들고는 연하의 남자친구와 마주쳐버렸다. 그치만 나 여태 아카아시한테 한 마디도 말 안 했는데! 경악하는 (-)의 얼굴을 향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것이 아무래도 제가 이 정도도 모르고 있을 것 같았습니까, 묻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같은 버스에 올라타며 에스코트를 받고 나니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붙인 (-)를 유리창을 통해 보았다. 이윽고 자신의 눈도 슬쩍 감고는 렌트한 차와 미리 예약한 펜션을 떠올렸다. 이러나 저러나 행복할 수밖에 없는 계획이었다. 완벽한 자신의 계획과, 그 계획에 빠져서는 안 될 (-)를 생각하며 그 역시 잠시 눈을 붙였다. 


* * * 


 "모처럼 왔는데 어디 얼마나 컸나 볼까."


 도대체 어느 사이에 펜션에 렌트까지 마친 건지,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자신을 리드하는 남자친구와 함께 짐을 풀었다. 와중에 쿠로오 테츠로가 뭐라고 말했는데 (-)는 담담하게 '뭐가?'라고 받아쳤다. 능글맞게 웃는 쿠로오의 얼굴을 보며 얼굴이 새빨개지는 (-)를 향해 그는 '키가 얼마나 컸나 보자는 거지, 뭐라고 생각했어- 자기야.' 라며 놀릴 뿐이었다.


 결국 씩씩거리며 자신의 옆을 지나쳐 겨울 바다 보러 갈거다! 뭐! 흥! 저리 가! 변태 고양이! 삐쳐서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는 여자친구의 뒤를 성큼성큼 쫓아가 바닷바람이 차다며 자신의 외투를 둘러주고는 1초만에 어떻게 잡아먹을까, 궁리하는 쿠로오 테츠로가 있을 뿐이었다.


* * *


 "저녁도 들었고, 목욕도 했겠다. 이번엔 너?"


 겨울바다는 차고 눈부셨다. 여름과는 저녛 다른 모습을 간직한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돌아와 따뜻한 물에 목욕도 마쳤다. (-)가 목욕을 하는 사이 간단하게 저녁을 차린 마츠카와 잇세이는 밥을 먹을 때까지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출발한 탓에 피곤하기도 하고, 포만감에 나른한 데다가 따뜻한 방 안에서 노곤노곤, 정신이 풀어지는 (-)를 향해 마츠카와 잇세이는 바짝 다가앉아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그저 눈빛만으로 (-)를 유혹해내는 것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 성인이 된 후 



눈이 세상을 겉돈다. 하늘은 며칠 내내 가득 찌푸리고 있더니 하얀 눈을 흩뿌려댔다. 초점을 잃은 것처럼 허공에 뜬 시선이 안타까웠다. , 큰 일 났다. 뒤통수가 뻐근했다. 이걸 어쩐다. 머리카락을 북북 헤치며 등을 덮는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왜 그랬지. 어디에다 두었더라. 오늘 꼭 가지고 가기로 했는데 이맛살을 찌푸리곤 볼을 부풀려가며 고장이 난 것처럼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모습은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유키메의 불안함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분명히, 가지고 나왔는데!

젠장, 빌어먹을, 이런 썩을. 평소엔 굳이 하지 않았던 욕들을 입에 담으며 유키메는 온 가방을 뒤집어 바닥에 흩뿌릴 기세로 가방을 뒤졌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함께 같은 디자인의 물건을 산 뒤로 씻을 때 말고는 단 한 번도 빼어놓지 않았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씻을 때에도 눈 닿는 곳이되 실수로 쳐서 떨어뜨리지 않을 곳에만 두었던 유키메는 눈 내리기 시작한 하늘 아래, 버스정류장에서 미칠 듯한 기분을 감상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데이트인데.

 

유키메의 머릿속에 약 한 달간의 프로젝트가 파노라마 영상처럼 흘러갔다. 그녀가 다녔던 크지 않은,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회사 부서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 여유 인력을 두지 않았던 유키메의 해당 부서는 결국 다른 부서로부터 인원을 다섯 명 가량 지원받았고, 그 인원이 더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보름 정도는 회사에서 숙식을 하곤 했다. 그런 마당이니 애인이 보고 싶다고 프로젝트 중간에 데이트라도 나갔다간 아주 미운털이 박힐 것이 자명했다.

 

결국 쿠로오와 유키메는 그나마도 집에 들를 수 있는 날 잠깐잠깐 얼굴을 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얼굴을 보더라도 이미 회사에서 반죽음 상태로 돌아온 유키메가 꼴딱 쓰러져 잠들어버리는 날이 많았다. 프로젝트 때문이기는 했지만 한 달 내내 유키메는 그 점을 마음에 걸려 했다. 연락도 점심시간, 저녁시간에나 짬짬이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탓했다. 그럴 때마다 쿠로오는 어쩔 수 없지, 자기야, 기운 내. 오늘도 쿠로오 씨 생각 많이 하고, 라며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그래서결국 그 프로젝트 다 끝냈는데아악, 젠장할!!!!!!

 

가방을 뒤집고, 코트 주머니를 한바탕 뒤적이곤 지갑에 파우치까지 먼지 한 톨까지 찾아내겠다는 기세로 탈탈 털어대던 유키메는 버스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찬바람에 짧은 치맛자락이 좀 팔락였지만 그따위 것은 이미 유키메의 의식 밖에 있었다. 그녀의 신경은 원래대로라면 얌전히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어야 할 조그만 은빛의 반지에 쏠려 있었다.

 

-. 유키메의 환장쇼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적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얼굴을 푹 숙이고 이걸 어쩌지, 발끝만 보다가 집에 다녀오겠다며 약속 시간을 늦출 용기도 나지 않은 유키메는 시끄러운 줄도 몰랐다. 몇 번 더 경적을 울리던 차는 버스정류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췄다. 검은 색의 세련된 자동차에서 내린 남자는 곧장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왔다.

 

자기.

나는 바보야이걸 어떡해.

자기야.


쿠로오는 연신 유키메를 불러댔지만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둔 양 손을 보며 패닉에 빠진 유키메는 전혀 듣지 못하는 듯 했다. 쿠로오는 저만치 위에서 허허, 웃고는 유키메의 앞에 확 쪼그려 앉았다.


아가씨. 쿠로오 상이 불렀습니다만.

으응, 쿠로오. ? 테츠?

오야, 이제야 이쪽을 봐 주시는 겁니까.

언제 온 거야?

조금 전에. 부르는 소리도 못 듣고, 전화도 안 보는 것 같아서 와 봤지.

, 그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쿠로오는 조용히 입가에 검지를 대고 쉿, 웃었다. 꿍꿍이 따위는 없이 순하게 웃는 표정은 언제나 유키메의 마음을 말랑말랑한 구운 마쉬멜로우처럼 녹여버리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끼고 있었으니까, 오늘 준비하다가 집에서 빠진 걸 거야. 돌아가면 있을 걸.

 

듣는 사람마저 편안해지는 낮은 목소리에 안심이 된 유키메는 그제야 방긋 웃었다. 무엇보다, 한 달 만의 데이트인데 이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쿠로오가 이끄는 방향을 따라 걸어 차에 도착했다. 조수석의 문을 열고, 들여보내주곤 안전벨트까지 꼭꼭 매어주던 쿠로오는 쪽, 소리 나게 뺨에 입을 맞추고는 차 문을 닫아주었다. -. 추위에 발갛게 물들어버린 손에 입김을 부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쿠로오는 사람 좋은 얼굴로 휘파람을 불며 운전석에 앉았다.

 

못 만났던 동안 하지 못했던 데이트 일정을 하나둘씩 해치우며 쿠로오와 유키메는 여느 때보다도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식사도, 이야기도, 프로젝트 동안 자기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매일 연락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얼굴을 보고 해야 살아나는 이야기를 하고, 그동안 엄청나게 보고 싶어서 죽을 뻔 했다는 둥. 이야기의 샘은 마르지 않았기에 노을이 지기 시작한 저녁이 되도록 쉬지 않고 말소리가 오고갔다.

 

쿠로오는 저녁도 먹고 가자며, 행선지도 알려주지 않고 차를 몰았다. 차는 척 보아도 엄청난 건물로 향했다.

 

테츠?

 

유키메는 놀란 목소리로 이야기했지만 쿠로오는 자신의 연인을 에스코트해 호텔로 향했다. 호텔 고층에 자리한 전망 좋은 식당은 더 이상 덧붙일 수식어도 없이 고급스러웠다. 노을이 지고, 도시에 불이 켜지고, 하늘에 별이 총총 뜰 때까지 두 사람은 담소의 끈을 전혀 놓지 않았다.

 

쿠로오는 반지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것 같은 유키메를 보며 웃었다.

 

자기야.

?

손 줘 봐.

유키메는 고개를 갸웃대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쿠로오는 씨익 웃으며 왼손을 달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면서 유키메는 손을 내밀었다.

 

눈 감아 봐, 자기야. 쿠로오 상이 마법 보여줄게.

그게 뭐야, 실없이 웃던 유키메는 곱게 눈을 감았다. 쿠로오는 참 착하지, 우리 자기- 라고 하며 아까 귀걸이에 걸려 있었던 유키메의 반지를 내민 손 왼쪽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

유키메는 자신의 손을 보며 부끄러움을 참지 못했다. 쿠로오는 그저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었다. 앞으로 장난 칠 건수가 하나 더 생겼다는 재미와 애인의 귀여움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

 

그런데 어디서 찾은 거야?

귀걸이에 걸려 있던데.

나 죽을까……」

누가 보아도 안쓰럽다고 생각할 만큼 불안해하고 있었다. 기프티콘을 하나 구매하고는 SNS에 바코드를 잘라 사진을 올리며 면접을 잘 보고 오게 해달라고 마음을 모아 달라는 오랜 친구의 타임라인을 보며 켄마는 어깨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다고 더 잘 되는 건 아니잖아.”

팩트폭력은 그만.”

그런 것보다는 이 쿠로오 씨한테 파이팅이라도 바라지 그래.”

쿠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나게 해 줄 자신도 있는데.”

쿠로오!!”


역시 이 맛이었다. 쿠로오는 능글능글한 그만의 비웃음 짓는 표정을 지으며 제 친구들을 보고 있었다. 저놈의 파랑새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글을 올리는 녀석이 재미있었다.

 

켄마와 (-)는 모두 트위터를 하고 있다. 켄마는 가끔씩 게임 공략이나 해 본 게임 리뷰를 어쩌다 한 번-이라고 해 봐야 일주일에 한 번 꼴로 게임 목록이 갱신되었지만- 올리는 말 없는 유저였지만 (-)는 하루 한 번 이상 들어가서는 팔로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거나, 마음에 드는 그림 같은 것에 하트를 누르고, 리트윗을 하는 꽤나(?) 열성적인 유저였다. 가끔 근방에 사는 트친(쿠로오의 기억에는 대충 트친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들과 만나 수다를 떨기도 하고, 밥을 같이 먹기도 한다. 처음에는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고 말리던 쿠로오는 가끔씩 올라오는 (-)의 트친들의 아무말대잔치에 혀를 내둘렀다.

 

몇 주 패턴만 살펴보면 그 사람의 행동반경이나 신분 등을 쉬이 알 수 있을 만큼 온갖 일상을 다 트위터로 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몇 번이고 쿠로오는 (-)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그런 것쯤은 나도 알거든 그런데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하고 놀면 무진장 재밌다고. 이거 봐! 라며 애니메이션이나 켄마에게서 추천받은 게임을 하다 친해진 사람들과의 대화를 보여주는 (-)를 보고 있자니 요샌 쿠로오도 긴장이 풀린 참이었다.

 

어쨌든, 별 것 아닌 간식일 뿐인데 리트윗 수는 무척이나 빨리 올라갔다. 다들 면접이라는 말의 무게를 잘 아는 모양이네. 쿠로오는 곁눈질로 화면을 보다가 (-)의 어깨를 확 끌어당겼다.

 

!”

쿠로.”


적당히 좀 하라는 것처럼 켄마는 짜증 섞인 얼굴을 했다. 따땃하게 데워진 코타츠에 몸의 절반 가까이를 집어넣고 앉아 있는 이 불청객 아닌 불청객들은 주말만 되었다 하면 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켄마의 자취방에 모여 같이 게임을 하거나, 제 할 일들을 했다. 거절하고 내쫓지도 못하게 일주일에 한 번 커다란 애플파이를 사 오는 능글능글한 낯짝이나, 이거 공략하는 방법 좀 알려달라며 게임 CD를 들고 오는 작은 여자애나. 어릴 때 버릇을 여태 버리지 못한 두 친구가 반갑다가도 이런 식으로 티격태격하는 것은 별로 반갑지 않았다.

 

, 테츠가 정말 좋아, 라는 말만 듣지 않았어도 저 토닥거림 따위야 주위 환경의 소리를 음소거하듯이 무시할 수 있었을 텐데. 켄마는 다 알면서도 놀려대느라 바쁜 쿠로오를 보다가 눈길을 돌려버렸다.

 

적당히 좀 해, 쿠로.”


* * *

 

슬슬 해가 져 가는 시간이 되어 쿠로오와 (-)는 켄마의 집에서 나왔다. 내일 당장 면접이라면서 옷을 골라놓기는 한 건지, 일찍 자야 하는 건데 이래도 괜찮은 건지. 실컷 놀리며 발끈하다가 자신의 장난에 어버버거리는 귀여운 얼굴이 자꾸만 보고 싶어 장난을 치던 쿠로오도 조금씩은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데려다 줄게.”

됐어. 혼자 가. 얼마나 된다고. .”

자기, 삐졌어?”

안 삐졌네요.”

내일 입고 갈 옷은 정했나요, (-)?”

 

(-)의 발이 갈 길을 잃었다. 다 골랐거든. 말은 하지만 아까의 발끈함과는 다른 어조에 쿠로오는 어깨를 으쓱하곤 서둘러 가는 (-)의 옆자리에 맞춰 걸었다.

 

.”

옷 고르는 거 도와줄까 해서.”

다 골랐다니까?”

까칠하게 구시기는, 이래봬도 과 수석이었다고?”

그래서.”

한 번 점검한다 생각하자고.”

내일 아침에 일찍 나갈 건데.”

그러니까.”


지금. 자취방 앞에 다 도착해선 주머니를 뒤적여 은빛의 열쇠를 찾는 손목을 잡고 쿠로오가 말했다. 별 일이 다 있네. 알았어- 과 수석의 안목을 한 번 믿어보자고. (-)는 현관에서 비켜섰다.

 

블라우스는 지금 골라놓은 것보다 이게 더 좋을 것 같고, 하의는 지금 이대로도 좋겠네. 메이크업은. 이 색보다는 이게 더 좋을 것 같다. 립은 색을 조금 죽여서 그라데이션을 넣는 게 좋겠다. 그리고 너, 파스텔 톤 분홍색보다 코랄이 더 어울려. 알고 있지? 신발은 세련된 거 잘 골랐네. 좋아, 이 정도면 될 것 같고. 귀걸이는 너무 화려하지 않은 거. 목걸이는 이게 낫겠고. 가방도 괜찮네.

 

쿠로오는 옷장을 이리저리 열어보고 살피며 면접에 입고 나갈 옷들을 섬세하게 골랐다. 하여간 패디과 수석은 수석이다. 옷만이 아니라 화장까지 대강 연달아 설명하고는 다음날 (-)가 실수할 것까지 염두에 두곤 필요치 않은 물건은 전부 보이지 않는 곳에 정리해 넣은 쿠로오는 입꼬리를 비죽여 웃었다.

 

하여간 내일 잘 하고 와.”

, 고마워, 쿠로오.”

테츠로.”

?”

멀쩡하게 이름이 있는데 우리가 성으로 부를 사이인가?”

또 장난친다. .”

글쎄, 쿠로오 상은 언제나 진지하답니다?”

됐어. 농담은 그만 하고.”

“XXXX라고 했지?”

쿠로오는 능글거리던 입가를 순식간에 진정시키고 (-)를 쳐다보았다. 순식간의 표정 변화에 기가 눌린 (-)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면접 끝나면 전화해. 쿠로오 상을 좋아하는 만큼 잘 하고 오라고.”

 

새빨개진 얼굴로 뒤통수 맞은 표정을 짓는 (-)에게 쿠로오는 유유히 미소를 지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5분도 지나지 않아 쿠로오의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쿠로.] pm.10:29

[쿠로] pm.10:29

[쿠로오 테츠로] pm.10:30

[내일 면접ㅂㅎ러 가ㄴ ㄴ 애한테 무러 하] pm.10:30

[ㄴ 거야] pm.10:30

[미쳤어?] pm.10:31

 

[진심이야.] pm.10:32

 

쿠로오는 딱 네 글자의 단문 메시지만을 남기고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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