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출 수 있는 길이라면 이미 멈추었을 것입니다. 가속도가 붙은 운명이라는 것을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을까요? 별이여, 그대는 나에게 꿈을 주고 내 심장을 앗았나봅니다.
옆자리 그 녀석이 이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진즉에 알아차리고 있었다.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따라갈 수 있었지만 묻지 않은 것에 대한 답은 하지 않으려 했다. 한 번 말을 하기 시작하면, 갑작스런 전학생에 대한 말만이 많아질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모든 교류를 끊을 것처럼 행동했다.
나와서 뭘 해도 괜찮으니 학교는 졸업해야 하지 않겠니.
글쎄요. 이미 나이는 지날 대로 지났고, 이제 와서 학교에 다시 다니기에도 힘든 상황에 놓인 것이 제가 아닌가요. 해마다, 학기마다 전 담임선생님은 전화했다. 너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회유했다.
너의 상심은 잘 알고 있다.
그래요, 아시겠죠.
네가 어떤 마음인 줄도 안단다.
그래요, 그럴 테죠.
그가 이런 너를 바라진 않을 거란다.
그것도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내가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저게 먹여주고 키워주고 재워줬더니. 너한테는 애비 애미도 없냐? 너한테 부모가 뭐야?”
저 사람 때문이에요.
머리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책을 선택한 것은 다른 이유가 없었다. 맨 앞의 200쪽. 다른 책이라면 이미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라는 소설의 5단계를 다 지났을 분량이 고작 도입부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길었다. 길디길어 지루했다. 지루한 만큼 또 어려웠다. 온 정신을 책에 집중해야만 오데뜨와 스완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었다.
책과 관련된, 또다른 책을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의 또래였던 세 명의 상처입은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도서였다. 그들은 독서 클럽을 만들어 마르셀 프루스트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했다. 대화를 통해서.
그러면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하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중요한 것은 억지로 나온 것이나마 자신의 의지가 확고함을, 그렇기에 자신이 이렇게나 무가치하다고 드러내는 것뿐이었다. 과거 총명하고 얌전한 자신은 이제 죽었다는 것을 보이는 것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행위의 의미였다. 그 날 이후로 손을 놓아버린 공부를 따라가려면 여태 해온 것의 몇 배의 노력을 필요로 했다. 노력하기 싫었다. 자신의 노력을 진심으로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아니 – 그저 들어주기만 해도 좋았다. 곁에 있어주는 사람, 나를 탓하지 않는 사람. 그래, 온전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세상에 둘 있을 리 만무했다. 운명 같은 것을 믿지도 않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 한 번 다가왔으니 이제는, 저세상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그였기에 노력도 무엇도 할 마음이 없었다.
숨이 멎는 날까지 적당히 살다가 말아버리는 것. 단 하나의 소원이 죽음인 삶은 얼마나 삭막한지 주위를 조여오던 호기심의 자루들을 틀어막았다. 고작 몇 시간 만에 그녀 주위에는 학교를 그만두기 전과 같은 적막함만이 남아 있었다.
누가 도시락을 까먹든, 누가 밥을 같이 먹자고 하든, 매점 같이 갈래, 묻든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같지 않으면 외면당한다. 같지 않으면 무시당한다. 같지 않으면, 조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제된다. 그것이 학교라면 있는 대로 없는 대로 아등바등 다닐 가치란 없었다. 그렇기에 모든 관심을 무시와 차단으로 일관했다. 원하던 대로 그녀는 혼자 있을 수 있었다.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옆자리의 남학생이 조금 특이해보인 이유였다.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아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목숨을 구해준 것과 같은 큰 손을 억지로 쳐냈다. 그리고 뛰었다. 곁에 있는 푸딩 머리 때문인지 그는 집요하게 저를 쫓아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묘하게 눈길이 갔던 것 같다. 이상하게 제멋대로 삐쳐올라간 머리카락에서 자신과 같은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었기에 괜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특이한 일이기도 했다. 어쨌든 눈에 들어온 이 녀석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도 찜찜해 그가 교실에 없는 틈을 타 쪽지만 하나 남겨두고, 교무실 옆에 딸린 상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남들이 말을 걸어와도 그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에게 별명을 붙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어서 쿠로, 라고.
여전히 학교라는 공간은 누구 할 것 없이 우르르, 이곳저곳 몰려다니는 곳이었다. 밀물처럼 반을 채우고 찾아왔던 아이들은 종례와 함께 썰물처럼 사라졌다. 학교란 곳은 정신없는 곳이었다. 교실은 어지러운 곳이었다. 인물 관계를 정립하느라 몇백 쪽 읽지 못한 책의 무게가 그제야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말소리가 시끄러워, 주위 공기가 역겨워. 그런 시간이 지나고 남은 것은 건너편에 앉아 있던 그 녀석뿐이었다. 이쪽 한 번, 책 한 번 보는 것이 뭐냐고 묻고 싶은 눈치였다. 책에서 눈길 한 번 떼지 않고 작가의 이름만 말해주었을 뿐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어디에다 넋을 놓고 있는지, 쿠로오의 모습을 보며 켄마는 혀를 끌끌 찼다. 그래서 그게 뭔데 아까부터 중얼거리는 거야. 고심하고 있는 쿠로오에게 공을 올리면서 켄마는 귀찮지만 쉬는 시간에 뭔지 검색이나 해볼까 하고 생각했다.
톡, 토톡. 휴대전화를 몇 번 두드리던 켄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작가? 웬 작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켄마는 작품 이름만 쪽지 귀퉁이에 대충 써주고는 사라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치 그 여학생의 모습 같았다. 잃어버린 시간. 못해도 몇 년은 되었다. 쿠로오는 배구에 가려져 빛이 바랜 기억 몇 개를 꺼내어 풀어놓기 시작했다. 켄마와 배구를 연습하던 날들, 어쩌다 보니 로드워크를 하다가 늦은 날. 한 번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던 옆집의 두꺼운 커튼 뒤 밝은 조명.
쿠로오의 동공이 미야기 현의 괴짜 속공을 처음 봤을 때처럼 졸아들었다. 그래.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삼 년쯤 전이었던가. 유독 아침잠이 오지 않아 학교를 일찍 가려고 등굣길에 오르던 날이었다. 앞을 걸어가던, 차분한 검은색의 긴 생머리 여학생.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색 니트 베스트가 예뻤더랬다. 등 뒤로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샴푸 향기가 코끝에 훅, 끼쳐 왔다. 넋을 놓고 따라가다 보니 네코마 고교로 등교할 뻔 했던 날이었다. 그 때도 여린 모습이었지만 지금보다는 아니었는데. 모든 것을 포기한 그런 발걸음은 아니었는데.
쥐 잡아먹은 것처럼 마구잡이로 잘라버린 머리카락은 무엇의 흔적이었던 걸까.
왜 삼 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이 자리에 붙박혀있는 걸까.
왜 여태 몰랐을까.
수없이 뛰어오르고, 공을 치고, 몸을 날리는 시간이 지났다. 스트레칭으로 마무리하고 샤워를 마치고 나왔음에도 제 교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왜일까. 쿠로오는 무엇에 홀린 얼굴이었다. 야쿠가 괜찮은 거냐고 물어옴에도 답하지 않았다. 성큼성큼, 교실로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바깥은 이미 짙은 어둠이 깔린 밤인데 교실만큼은 낮과 같았다. 벚꽃이 휘날리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들 만큼, 상대방은 그 자리에 붙박이인 듯 앉아 있었다. 뒷문도 아까 쿠로오가 열어두고 간 그대로였다. 우뚝, 그림자를 지고 선 쿠로오는 찬찬히 상대방을 뜯어보았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그 흑단 같은 머리카락에 있었던 아름다움이란 퇴색되어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잊어버리려던 것처럼 멋대로 잘라놓은 것 같았다.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토록 아름답던 사람의 뒷모습을 이리도 망가뜨린 것은 사람일까. 사람이 아닐 것이다. 사람이라면, 저토록 어여쁜, 고운 이를 다치게 할 수 없었다. 쿠로오는 다시금 제가 옆집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재구성했다. 어딘지 인상이 나쁘다던 아저씨. 초인종을 눌렀더니 화를 삭이지 못하던 사람.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소름이 끼쳤다. 나이가 꽤 들은 목소리였으니 아마도 아버지, 또는 그 연배의 누군가가 분명했다. 아름다움은 최고의 가치라고, 누가 이야기했는데. 그 아름다움을 망가뜨린 사람이 누구든 간에 쿠로오의 마음 한켠에 분노가 자리잡게 하기는 쉬웠다.
그 어린 날 반해버렸던 것이었다.
그 단순한 말에 담긴 감정은 복잡하게 얽히고설키어 견딜 수 없었다. 저 가녀린 어깨를 잡고 당신의 3년은 어디에 갔냐고, 왜 이런 모습으로 내 앞에 다시 나타났냐고. 그 날 이후로 다시 보이지 않을 거면 행복했어야지.
토해낼 수 없는 감정만이 하나둘 쌓여갔다.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묻고 싶었다. 왜, 이런, 모습이, 되었냐고. 묻고 싶은 것이 가득한데 쿠로오의 귓전을 때리는 것은 지난날의 그 목소리였다. 날카로운 절규, 그어버릴 거야. 죽어버릴 거야. 멈춰 서서는 움직일 수조차 없는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방은 그저 책을 읽을 뿐이었다.
쿠로오의 시선이 아까는 보지 못한 것에 닿았다. 책 위에 놓여 있는 철제 책갈피에 달려있는 빨간 꽃 장식. 몇 개의 꽃은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고, 몇 개의 꽃잎은 땅으로 내려앉는 빨간 꽃. 꽃무릇. 상사화. 빨갛고 위험한 그 꽃은 왜 여기에 장식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상대방에게, 무엇 하나 의미 없는 행동이 있기는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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