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디를 가니?
그는 그림자에서라도 솟아난 양 불쑥 튀어나왔다. 손가락 하나도 들어갈까 말까 한 가까운 거리에서, 그것도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혼마루의 주인은 안타깝게도 오이를 만난 고양이처럼 펄쩍 뛰었다.
이 영감탱 또!! 또!!!! 제발 기척 좀 하고 다니란 말야!!!!
얼마나 놀랐는지 주인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굉장히 높은 음을 냈다. 원인을 제공한 자는 여전히, 평소와 한끝도 다름없이, 나풀나풀 바람을 타고 흐르고야 말 것 같은 얼굴이었다.
으하하하하! 역시 재미가 있는 주인이로고.
그는 슬쩍 주인의 손에 있던 물건을 제 손에 쥐었다. 왼손에는 늘 들고 다니는 접선을, 오른손에는 주인의 작은 클러치 백을 들고 호탕하게 웃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어디를 가는 게냐?
대감마님께서 아실 일은 아니랍니다.
주인은 딴청을 부렸다. 여전히 골이 난 얼굴이니, 오늘‘도’ 놀림당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비죽이며 팔짱을 끼고 다시 뒤돌아 나가려는 주인을 ‘대감마님’은 또 불러세웠다.
외출하면서 가방도 들지 않고 말이다.
귀에 선명히 박히는 소리에 주인은 제 양손을 살펴보고 제정신을 깜박했던 모양이라고 발길을 180도 틀었다. 그렇게 깜박한 줄 알고 걸어가던 제 주인의 어깨를 대감마님께서 부채로 톡톡 쳤다.
아 또 왜! ――.
네 것은 여기에 있다만.
이치몬지 노리무네! 온 혼마루를 쩌렁쩌렁 울리고도 남을 법한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목청으로 주인은 저를 놀리는 도검남사의 본명을 외쳤다.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킥킥 웃던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현세를 벗어난 상점가를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
혼자 와도 된다니까.
원래 귀한 몸께서는 혼자 상점가를 걷지 않는 법이란다?
영감이야말로 그 요상한 곳에서 혼자 다녔으면서?
거긴 상점가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 몸은 은거하는 몸이라 말이다.
갖다 대면 다 말이지 그래―.
주인은 여전히 투덜거렸다. 지갑밖에 들어있지 않은 클러치 백은 얌전히 이치몬지 노리무네 저 영감탱의 손에 들려 있었다.
정말 가볍디가벼운 옷차림으로 상점가에 따라 나온 영감탱은 내가 뭘 하러 온 건지도 모르면서 따라 나왔겠지.
주인은 볼멘소리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저 속을 알 수 없는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랑 말을 섞는 순간부터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말려버리는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차라리 먼저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을 택했다. 이치몬지 노리무네 역시 그 경우에는 굳이 사니와를 먼저 건드리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심심하지 않은 동안에는. 그리고 상점가를 한참을 걸었으니 이제는 슬슬….
그런데, 어디를 가는 게냐?
두 번째 질문이었다. 주인은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흐응. 흰색에 가까운 엷은 청회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멋대로 따라나오기는 했지만 알려는 주어야지.
영감 팔러 가.
허어?
분명히 그만 물어보라는 의미에서, 입 다물라고 고른 표현이었는데 이게 오히려 이치몬지 노리무네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의 눈매가 점점 더 곱게 휘었다.
그것 참 재미있는 이야기로구나. 이 일만 냥의 보도를 팔아서 갖고 싶은 것이 있는 모양이로군.
부채 너머에서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보고 있을 그의 얼굴을 떠올린 사니와는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려 버렸다. 뭘 해도 쉽게 상대가 안 되는 영감이었다.
차라리 대꾸를 하지 말고 일이 끝난 뒤에 이야기하든가 해야지.
헤이안 시대를 살아왔던 진짜 영감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능구렁이 같은지 모를 일이었다. 이게 바로 전 수장의 관록이라는 것인지, 주인 되는 사니와도 놀려먹고 말로 구워삶아 찜쪄 먹고 아주 지지고 볶는 모양새가 누가 주인이고 누가 도검남사인지―아니, 누가 수하인지 헷갈릴 노릇이었다.
뭐, 팔 테면 팔아 보거라. 어린 것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은거하는 노인의 특권이지.
제 주인이 한참을 답하지 않자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부채를 접지 않은 채로 뇌까렸다. 그런 말을 들으면 팔고 싶어도 못 팔게 될 주인의 성정임을 다 알고 하는 말이었다. 정말이지 사회성 만렙의 여느 도검남사들이라고 해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말을 진지함을 백 배로 쳐서 받아치고 있으니 사니와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하필 나오는 길에 왜 이 영감탱에게 들켜서 이 모양이람.
머릿속에 피어오르는 생각을 속으로 삼킨 사니와는 상점가 끝에 있는 양과자점으로 향했다.
예약 찾으러 왔어요. 주문 번호는 *******입니다. 대금은 그때 완납했구요.
주문번호를 받은 점원은 예약 주문표를 한참 살피더니 주문품을 꺼내왔다. 서양에서 시작되었다던 날에 걸맞게 적당한 채도의 빨간색과 짙은 갈색 사이로 금박 문양이 들어간 고급스러운 포장 속에 담겨 있는 것은, 아마도 주인이 홀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 줄 것이라고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멋대로 생각했다. 혼마루에 기거하는 90명이 훌쩍 넘는 도검남사들에게 모두 돌릴 만한 양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는 배송 서비스로 신청하셨죠?
점원이 주인에게 한 차례 더 물었다. 주인은 예, 하고 짧게 대답하고 감사하다 인사했다. 그리고 그들은 5분도 지나지 않아 거리에 나와 있었다.
*
이제 돌아가려고?
응, 이제 하려던 일은 끝났어. 그리고 주말이잖아. 오늘은 쉴 거야.
그렇다면….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슬쩍 말끝을 흘렸다. 이 양반이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사니와는 그가 왜 그리 말하는지 알면서도 넘어가는 방법밖에는 몰랐다. 그의 제안은 언제나 구미가 당기는 매력적인 것들뿐인 탓이었다.
잠시 이 노구에 어울려주지 않겠는가?
응?
그래, 그 뭐냐. 데이트- 말이다. 데이트. 모처럼의 휴일이니 쇼핑이나 하자꾸나.
뭐? - ‘이 영감이 미쳤나?’
만화적인 표현으로 말풍선을 바꾸어 말할 뻔한 이치몬지 노리무네의 주인은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갑자기 말문이 막혀 아무 말이나 하고도 남을 것 같아 물리적으로 막는 게 나았다.
마침 선물을 주는 날이라니, 이 몸도 육신을 가진 이상 현대적인 전통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느뇨?
어, 그, 그래요….
그 파랗게 빛나는 눈을 10cm 거리에서 보고 부탁을 거절할 만한 인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주인은 오늘도 휘말려 곧바로 귀가하지 못하고 그와 어울리게 되었다.
*
거리는 부산했다. 주말이기도 하고, 기독교적 축일에서 시작된 그 명절을 즐기려는 이들이 많았다. 조합은 다양했지만 아까 본 얼굴의 동일한 얼굴도 곳곳에서 보이곤 했다. 중간중간 이치몬지 노리무네와 똑 닮은 다른 혼마루의 이치몬지 노리무네도 보였다.
시종일관 그는 주인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어떻게 봐도 연인일 게 뻔해 보이는 조합으로 허리에 팔을 두르거나 어깨에 팔을 두른 이들도 많았다. 정말이지 골목길에 들어가서 잘 보이지 않는다지만 길거리에서 저러면 안 될 텐데 싶은 눈꼴사나운 광경도 한둘 지나갔다.
그런데 노리 영감. 살 게 있어?
있다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아까 지나오다 봐 둔 가게가 있단다. 무엇인지 궁금한 겐가?
천 년이나 묵은 영감이 데이트니 쇼핑이니 하는데 놀라자빠질 뻔했으니 행선지도 궁금한 거지.
가 보면 안다. 가 보면 알아. 아하하.
국화꽃을 잔뜩 드리운 등이 웃음소리에 따라 흔들렸다. 호탕한 웃음이라 괜한 걱정도 없었다. 심지어 아까 말했던 당신 팔아버리겠다는 빈말도 이제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둘은 그렇게 가게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짤랑거리는 풍경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고, 이내 점원의 환영 인사가 들어왔다. 가게는 골목을 두어 번 돌아 들어와야 있는 자그마한 곳이었다. 이런 곳에 이런 가게가 있다니. 주인은 거의 6년 이상을 혼마루에서 살면서 이 상가를 이용하면서도 모르는 곳이었다.
골라 보시게나.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주인을 부채 끝으로 밀어 진열장 앞에 서게 했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각종 보석이 빛났다.
―영감?
일단 골라 보래도.
진열장에는 가격표가 없었다. 일단 무작정 끌고 와서 고르라는 말이 무슨 될 법한 말인가. 사니와는 어이가 없어 벙찐 얼굴로 이치몬지 노리무네를 한 번, 화려하다 못해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반짝이는 보석들로 가득한 진열장을 한 번 돌아보았다.
척 보아도 얼빠진 사니와는 10분 가까이 고르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게 다 얼마람. 보석 가격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사니와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숫자 뒤로 0이 최소 예닐곱 개는 붙을 것만 같은 모양새들이었다.
혼란과 혼돈 속에 빠진 주인은 그 뒤로 바짝 다가오는 발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다.
후―.
주인의 어깨가 팔짝 뛰었다. 살포시 짓는 한숨에도 반응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역시 고를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마음에 드는 게 없는 게 아니라, 또 이 영감탱이의 장난질에 당해서 말린 것만 같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못 고르겠다면 내가 골라 주랴?
그는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읊조리더니 점원을 불렀다.
진열장에 있는 것 말고, 더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은가?
예, 있습니다. 보여드릴까요?
이왕이면 붉은 계열로 부탁하네만.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점원은 잠시 가게 뒷방으로 향했다. 본능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요구하는 품목은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살 수 있는 종류의 물건들이 아니었다. 그런 것을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마치 일상용품을 구입하듯 입에 올렸다.
당신 미쳤어?
미쳤다니? 무엇이 말이냐?
당장 여기 있는 것들도 이렇게 화려한데?
진열장에 나와 있는 것은 기성품이란다. 누구나 살 수 있는 것이지. 그런 것을 고르게 할 수야 없지.
어이가 없어 입이 떡 벌어진 주인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한쪽 어깨를 잡은 채로 그가 답했다. ‘누구나 살 수 있는 그런 것’이라는 말에서 주인이 어떤 인지부조화를 느꼈든 그것은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점원이 몇 개의 케이스를 가지고 나왔다. 하나의 케이스 안에 한 알씩만 들어있는 붉은 빛의 보석들은 어떻게 보아도 이런 골목길에 있을 법한 물건들이 아니었다. 소더비에서나 등장할 법한 물건들이 아닌지, 라고 멋대로 생각하던 사니와가 떨리는 눈으로 이치몬지 노리무네를 흘겨보았다.
그는 더없이 진지했다. 감사관으로 일하면서도, 검을 잡으면서도, 자신이 직을 내려놓은 이치몬지의 이들 앞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눈빛으로 보석들을 하나하나 보던 그는 부채 끝으로 케이스 하나를 짚었다.
이것으로 하는 게 좋겠군.
세공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는 카탈로그를 몇 장 펼쳐보더니 역시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주인은 점원에게 손이 잡혀 손가락의 치수를 쟀다. 왼손의 다섯 손가락 치수를 물끄러미 보던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그 중 한 치수를 골라 주문서를 작성하곤 제 옷 어디선가에서 카드를 한 장 꺼내 내밀었다.
―?????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주인은 이치몬지 노리무네를 살펴보았다. 단순한 장난으로 넘길 만한 가격이 아닌 것을 아무렇지 않게 일사천리로 더 알아보지도 않고 결제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나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직접 받으러 간 양과자점의 초콜릿을 눈앞의 이 남사에게 주려던 것이었다는 사실도 깜박하고야 말았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잘 부탁하네.
당황스러운 외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주인이 양과자점의 초콜릿 주인이 누구인지 떠오를 때까지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고급 레스토랑과 디저트에 분위기 좋은 바까지, 제 좋을 대로 주인을 끌고 다녔다.
*
그로부터 열흘이 지났다. 그는 주인에게 찾으러 갈 것이 있다 하며 외출 신청서를 내밀었다. 그래, 다녀와. 내가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거잖아. 주인은 여전히 얼빠진 상태로 서류에 사인했다.
잘 갔다 와. 제때 돌아오고, 영감탱.
주인의 영혼 없는 인사를 받은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씨익 웃더니 주인을 어깨에 들쳐멨다.
아, 진짜. 일하고 있을 땐 건드리지 말라니까!!!
자네도 가야 하는데.
아 무슨, 저게 니 휴가 신청서지 내 휴가 신청서냐.
자네를 동반한다고 적었네만? 서류에 사인은 신중하게 하라는 교훈으로 알아들으라고. 으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는 주인을 끌고 상점가로 나갔다. 역시나 몇 번 골목을 거쳐 조용한 골목에서 그들은 일전의 보석상에 도착했다.
도착하셨군요. 주문하신 물품의 제작이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았군. 그럼…. 언젠가 또 보도록 하겠네.
*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치몬지 노리무네는 그 길로 혼마루로 돌아가지 않고 한적하고 경치 좋은 장소로 향했다. 벤치에 앉아 새 소리를 들으며 실없는 농담을 던지려나 싶었지만 그의 눈은 이미 사냥감을 눈앞에 둔 매처럼 단호했다. 얼굴을 가리던 부채는 내려놓은 채로 그는 케이스에 들어 있던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를 제 주인의 손가락에 곱게 끼워 주었다.
새들이 숱하게 짹짹거리는 겨울의 막바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