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니와 설정 등등을 빌려주신 솜님@uni_s_aria, 요지경님@abcd07m26d 타카@tkkn_kr 하리님@harisenbon9 아키라님 @D4WN_4_U 을 비롯해 청첩장을 받아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마지막의 가사는 Blackstar~theater Starless~의 곡 Beloved에서 인용했습니다. 

 

*

 

Amazing! 역시 내 피앙세로군.

 

익살맞은 억양의 감탄사와 함께 귀에 꽃피는 말은 그의 감탄사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를 보아도 단 한 치의 모자람도 없이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누구의 눈에도 아름답고 당당해 보였다. 물살을 가르고 하늘로 오르는 한 마리 당당한 용이라도 될 것 같은 영물 비단잉어의 색을 꼭 빼닮은 머리칼을 살짝 묶어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두상까지도 심미적라는 말이 어울린다면 할 말을 다 하지 않았겠는가.

 

, , 신부 감상은 여기까지. 신랑은 들어오면 안 돼.

깜찍하게 하얀 리본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한 미다레 토시로가 신랑을 밀어냈다.

아직 꾸미는 중이니까 본식 때나 보라고.

여기서 더 Beautiful해지면-.

아침까지도 함께 계시지 않으셨나요.

아니, 알았다. 알았다고.

 

아무래도 수행을 다녀온 단도의 진심을 다한 밀어내기를 이기는 어려웠는지 문 밖으로 그가 사라졌다. 하여간 팔불출이라니까. 신부 메이크업을 맡은 카슈 키요미츠가 가볍게 눈을 흘기고는 다시 하던 일로 돌아왔다.

 

주인, 주인 눈에서 눈물 나게 할 것 같은 놈은 아니겠지만, 정말 괜찮겠어?

주인이라고 불린 신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그렇게 신중하던 주인이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가는 건 말이지, 역시, .

더 하실 말씀이시라도?

카슈 키요미츠의 투정 섞인 말은 주인의 깔끔한 손톱을 화려하게 꾸미던 쿄고쿠 마사무네에 의해 막혔다. 카슈 키요미츠는 한 번 으쓱하고는 주인을 꾸미는 데 다시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

 

혼마루는 새벽부터 소란스러웠다. 주인의 취임 10주년도 곧이었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큰 경사를 준비하고 있어서일지도 몰랐다. 도검남사들은 시간정부로부터 미리 배정받은 부지에 원탁을 놓는다거나 의자를 배치하고 붉은 융단을 길게 깔고 손님 명단을 다시 확인하고 분주하게 보내고 있었다. 흰 장미와 백합을 필두로 축복과 행복의 의미를 지닌 꽃들은 후쿠시마 미츠타다의 손에 의해 곳곳에 장식되어 자태를 뽐내고, 각자의 역할을 맞춰보는 도검남사들도 여럿 있었다.

 

다른 도검남사들이 바삐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던 그림자 하나가 슥 빠져나가서는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등 뒤로 희고 검은 머리칼이 휘날렸다.

 

*

 

똑똑똑.

네에, 신랑이 아니시면 들어와도 된답니다~. 주인님 준비 끝났어.

신랑 아니야. 그럼 실례.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벙찐 표정으로 신부를 보았다. 마치 몇백 년 일생에서도 그보다 심미적인 것은 본 적 없었다는 듯이.

히메츠루?

자신의 이름이 불린 그의 낯이 다시 평소처럼 돌아왔다. 푸른 빙하가 굳어 만들어진 듯한 눈이 슬쩍 감겼다가 떠졌다.

잠깐 할 말이 있는데에.

 

평소처럼 말을 살짝 늘이며 그가 말했다. 카슈 키요미츠와 쿄고쿠 마사무네, 그리고 미다레 토시로의 시선도 신부에게 향했다. 신부는 엷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없어. 잠깐 바깥 공기라도 쐬고 올래?

문가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응응. 히메츠루, 5분이면 충분하지?

남을지도 모르고오.

신부 곁을 지키던 세 도검남사가 자리를 비우자 신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단둘이 하고 싶은 말이라면역시 그거야?

히메츠루 이치몬지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역시 난 이 결혼은 마음에 들지 않아.

신부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지금이라도 멈출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건 주인인 네가 행복해진다고 생각해서야.

정말이지.

조금이라도 마음이 바뀌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널 데리고 나갈 수도 있어.

그럴 리 없다는 것 알고 있어서 하는 말이지?

여전하구나아.

히메츠루 이치몬지는 몸을 신부 쪽으로 숙였다.

아프지 마.

신부는 정말 그를 무리라고 생각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렇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신경써줘서 고마워.

그럼, 이만. 오늘 참 예쁘네에.

 

히메츠루 이치몬지가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나갔다. 이윽고 밖에서 기다리던 세 도검남사가 들어왔다.

주인님, 별일 없으셨나요?

별일이라고 할 게 뭐 있을 리가. 그는 언제나의 히메츠루 이치몬지인걸.

그렇군요.

 

*

 

주인.

식장의 장식을 마쳤는지 후쿠시마 미츠타다가 대기실에 들어왔다. 잘 빗어넘겨 하나로 묶은 끝이 붉은 푸른 머리카락이 찰랑였다. 꽃을 돌보는 취미를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며 너스레를 떠는 훤칠한 키의 남자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것을 꺼넀다.

 

와아.

그가 가져온 것은 신부의 부케였다. 가장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들만 골라서 다듬고 다듬어 만든 부케는 천상에서 갓 내려와 축복을 전하는 아기천사의 날개처럼 보드랍고 사랑스러운 자태를 갖고 있었다.

우리 아름다운 신부님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치지만 말야.

겸손을 떠는 그에게 신부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부케라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주인님~ 한 번 일어나 봐.

어느새 미다레 토시로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후쿠시마 미츠타다는 신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거들었다. 에스코트는 익숙하다는 듯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신부의 치맛자락 등을 손쉽게 정리해 주곤 온전히 카메라에 신부만 담길 수 있게 자리를 옮겼다.

미다레 토시로의 셔터 소리가 여러 차례 울렸다. 평소에 사진을 찍는 건 내켜하지 않던 신부도 오늘만큼은 이 포즈 저 포즈를 즐겁게 취했다.

 

*

 

들어오세요.

카슈 키요미츠의 목소리가 들리고, 방문객들이 하나둘씩 신부 대기실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스스럼없이 신부를 언니라고 칭하는 이웃 사니와도 있었고, 이렇게 먼저 결혼해버리면 나는 외로워서 어떡하냐며 거짓 울음을 울며 장난치는 이웃 사니와도 있었다.

 

*

 

밖에서도 손님맞이가 한창이었다. 취임한 이래로 10년 가까이 혼마루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시간정부 직원부터 종종 만나곤 하는 이웃 사니와들과 그들이 호위로 대동한 도검남사까지 상당한 숫자의 사람, 혹은 사람 모습을 한 하객들이 모여 있었다.

신부 대기실에서 나온 이웃 사니와와 호위 역의 도검남사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앉았다. 신부 측, 신랑 측을 따로 두지 않고 6인석 원탁을 배치해 놓은 자리가 모자람 없이 들어찼다. 신부 측에게는 낯선 이들도 여럿 있었다. 아마도 신랑 측 손님인 듯해 보였다. 아마도 평소 외출해서 만나는 비즈니스 파트너겠거니 싶었다.

 

, .

 

훤칠하게 차려입은 카센 카네사다가 사회자 자리에 서선 마이크를 잡았다. 여느 때보다 더욱 온화해진 표정의 카센 카네사다는 유려한 목소리로 하객들 모두에게 자리에 착석하길 바란다는 말을 했다. 하객석이 분주했다. 본성의 도검남사들도 각자의 자리에 착석하고, 신부 대기실에 다녀온 하객들도 각자의 명패가 자리한 곳에 앉았다.

 

*

 

도요 이치몬지는 신랑 입장 대기줄보다 조금 더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본성에 몸을 의탁하게 된 순가부터 지금까지의 시시각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일과의 시작과 끝에 언제나 내가 있기를 바란다고 다소 침착하지 못하게 고백했던 날도, 나의 마지막이 당신이기를 바란다는 말로 프로포즈했던 날까지도 선명하게 기억 속에서 피어났다.

 

산들산들 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향긋한 장미와 백합 향이 자연 속의 라일락과 아카시아와 섞여 들어왔다.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신부를 꼭 빼닮은 아름다운 날이었다. 아름다운 꽃향기, 선명한 물빛의 하늘, 솜털 보송한 토끼 같은 공기까지 무엇 하나 여생의 주인을 닮지 않은 것이 없는 하루였다.

 

결혼. 일생의 언약. 나의 남은 생을 너의 남은 생과 하나 되어 살아가겠다는 약속을 나누는 일. 그런 일에 시큰둥했던 과거의 자신은 과거의 유산으로 죽어 없어지는 날. 그런 날이 성큼성큼 다가와 문을 열었다.

 

신랑 입장이 있겠습니다.

카센 카네사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꽃문을 지나 신부의 손을 잡으면, 반지를 나누면, 하객들 앞에서 충실히 당신과 미래를 함께하겠다고 약속하면, 서약은 성립된다. 무엇으로도 깨질 수 없게 이 약속을 단단하게 묶어버리기 위해 그는 자신 앞에 꽃으로 장식되어 있는 아치문을 건너 성큼성큼 걸었다. 특별한 관계가 되고 나서도 그러했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너무나도 당연히 모든 것은 이 생의 주인을 위해 써서 마땅한 시간이 오고 있었다.

 

세 걸음, 두 걸음, 한 걸음, 그리고 제로. 그는 늠름하게 주례석 앞에 섰다. 등 뒤로 싸늘한 눈빛이 여럿 느껴졌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신부는 누가 보아도 얼마든지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자신감 있게 섰다. 사회자석에서 카센 카네사다가 무어라 말하는 소리와 함께 발랄한 비트의 음악이 깔렸다. 반대편의 쭉 뻗은 카펫 위로 한 발 한 발, 신부의 드레스가 나타났다. , 이런. 자동으로 감탄사가 나올 만큼 햇살을 받은 신부의 모습은 눈부셨다. 언제라도 신부를 아름답지 않다 생각해본 적은 없었건만, 그의 눈에 비친 오늘의 신부는 그야말로 태양을 한 조각 강림시켜놓은 것만큼 눈부셨다. 영원히 나의 여왕님이 되어 달라며 반지 대신 선물했던 티아라에서 반사된 빛이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고, 분명히 작은 체구의 신부임에도 그 어떤 여신보다도 위엄있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당장 무릎을 꿇고 다이아몬드로 촘촘히 장식한 신발을 바치고 싶을 만큼.

 

꽃이 뿌려진 카펫 위로 신부가 걸어와 그의 앞에 섰다. 마법에라도 걸린 듯이 청명한 하늘 아래 오늘의 광경은 천 년이 더 지나 썩어 문드러진 칼이 되더라도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사랑스러운 신부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서 있는 완벽한 비즈니스맨을 떠올려본 적 없다면 지금에라도 떠올려보기를 바란다. 그런 그의 찰나를 끊은 것은 카센 카네사다의 목소리였다. 신랑과 신부는 나란히 미소로 눈인사를 나누고는 그의 말에 따라 주례를 향해 섰다. 한 줄기로 곱게 머리를 땋아내린 시치세이켄이 주례석에 서 있었다.

 

* * *

 

이왕이면 스몰웨딩이 좋겠는데.

피앙세가 원한다면 스몰 웨딩도 좋겠지만, 적어도 본성의 도검남사들과 피앙세의 지인들까지 더한다면 스몰 웨딩으론 끝나지 않을 것 같다만.

역시 어쩔 수 없나. 근교의 작은 교회라도 빌릴까 했거든.

평범한 인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군 그래.

그는 훗, 하고 웃었다. 본성의 식구만 백 명이 넘어가는데 스몰 웨딩은 불가능한 소리였다. 누가 하객으로 올지 다툼이라도 나면 곤란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두에게 자신의 신부임을 땅땅 못박아두고 싶은 그의 계산도 어느 정도는 섞여 있었다. 어쨌거나 본성에서 주인을 주인으로만 모시는 도검남사도 적지 않지만, 그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는 동료 겸 경쟁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동생이 스몰웨딩을 했다지?

남쪽 섬에서. 정말 작은 교회였는데아마 당신이 들어가면 우리 둘만 하는 결혼식이 될지도 몰라.

이 일은 나에게 맡겨 두면 안 되겠나, 피앙세.

당신 얼굴 보니까 스몰웨딩은 불가능한 것 같네. ,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맡길게.

그의 무릎에 기대 누워서는 손을 뻗는 피앙세는 무척이나 고왔다.

 

* * *

 

신랑은, 녹이 슬고 떨어진다 해도 신부를 사랑하겠는가?

.

신부는?

당연한 말씀을요.

그러면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은 이들의 약속을 잘 들었는가? 이의 있는 자는 앞으로. 그건 집어넣게.

새신랑이 된 도요 이치몬지는 이의 있는 자는 앞으로라는 시치세이켄의 말에 품에서 리볼버를 꺼내는 시늉을 했다. 하객석에 호위로 따라온 고케 카네미츠와 히메츠루 이치몬지가 자기 주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 . 어쨌든반지를 교환해야겠지.

목소리를 가다듬은 시치세이켄과 하객들이 보는 앞에서 둘은 서로의 왼손 약지에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를 끼워주었다.

이로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신들의 축복을 받은 두 사람의 결혼이 성사되었음을 선포한다는 말을 남기고 시치세이켄은 주례석을 떠났다. 이제는 신랑과 신부로 하나가 된 둘은 사회자의 말에 따라 하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

 

마지막은 결혼식 촬영이었다. 자리를 메우고 있던 이들은 각자 신부와 신랑의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새신랑인 도요 이치몬지의 키가 너무 커서, 자리를 배치하는 데 조금은 애먹었지만.

 

사진 촬영을 마치고 화려하게 꽃핀 부케가 신부의 손을 떠났다. 부케는 놀랍게도 다른 혼마루의 도검남사에게 떨어졌다. 보랏빛 긴 머리카락이 찰랑이는 그의 손에 부케가 잡혔다. 모두의 환호가 이어 터졌고, 부케를 잡은 하치스카 코테츠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

 

하객들은 하객용 원탁으로 돌아갔다. 신랑과 신부는 그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융단 위로 퇴장할 순서였다.

 

허니.

왜요, 달링?

 

도요 이치몬지는 너무나도 쉽게 신부를 양팔로 들어안았다. 이 순간을 놓치기 싫었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자신의 태양을 눈에 새기고 싶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싱그러운 향기를 품고 나부꼈다. 떠들썩한 하객석의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멀어졌다. 하루라도 모닝키스가 빠지면 서운한 사이지. 그는 마치 처음인 것처럼 입을 맞추곤 떨어졌다. 세상 어디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날은 없을 터였다.

 

見つけたよ, Beloved―.

 

Image By Bluesky @s4hu.bsky.so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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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사귑니다.

 

.

퇴근하려고 나오는 길에 서 있는 차가 작게 경적을 울렸다. 는 처음 보는 차이기도 해서 자신을 불렀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차를 지나쳤다.

 

..

경적이 두 번 울리더니 차가 근거리까지 쫓아왔다. 말로만 듣던 납치인가? 의 걸음이 빨라졌다. 커다란 차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지만 탁, 문 닫히는 소리에 이어 는 낯설지 않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얼굴 보기 힘들군.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

네가 부르지 않았나.

 

그야 부르긴 불렀지만. 그냥 SNS에 적은 푸념이었을 뿐인데 당신이 진짜로 등장하면 놀라지 않겠냐는 말은 삼켰다. 차에서 내린 남자 쪽에서도 할 말은 있었다. 네가 불렀으니 오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고.

 

늦은 시간이니 빨리 타라.

기다린다면서 본인은 안 오고?

일단 타라.

 

채근하듯이 그는 를 이끌어 차에 태웠다. 안전벨트를 채우는 것까지 돕지는 않았지만 차 문을 닫아주곤 반대편으로 돌아가 운전석에 소리없이 앉았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된 일이지, 는 긴장감에 꿀꺽, 침을 삼키곤 곁눈질로 백미러를 들여다보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여기까지 다 오고.

.

 

그는 답하지 않았다. 운전할 때는 운전에 집중하는 것이 미덕이었으니까. 차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지나 쫙 뻗은 십자대로에 들어섰다. 교차로에서 그는 방향등을 오른쪽으로 켰다. 깜박깜박. 꾸벅 졸았던 는 방향등의 방향을 보고 잠이 확 깬 느낌을 받았다.

 

방향이 다르지 않아?

잠시 갈 곳이 있다.

. 당신 말대로 늦었지만, 당신이 있으니까 걱정할 일은 없겠지.

. 피곤하다면 잠시 눈을 붙이도록.

거리, 멀어?

그렇게까지 걸리진 않을 거다.

 

닛코 이치몬지가 퇴근길의 를 데리러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른 남사의 차를 얻어 타 본 적은 있지만, 그가 직접 나왔다는 예상치 못한 사태에 이 늦은 시간-보통 퇴근 시간은 열 시가 넘었다-에 갈 곳이 있다고까지 하는 닛코 이치몬지의 말에 가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는 눈을 감았다. 승차감이 편안한 것도 있지만 시간을 맞춰서 틀어놓은 것처럼 등받이가 따뜻해서 사르르 졸음이 몰려오기도 했다. 꾸벅. 고개가 까딱거리는 것을 본 닛코 이치몬지는 차의 속력을 줄였다. 조금 늦게 가도 목적지까지의 시간은 삼십 분 이내였으니 거기서 조금 더 시간이 든다고 해도 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오늘 밤은 한참 남았으니.

 

다 왔다.

 

일부러 고속도로를 피해 삼십 분가량을 저속으로 운행한 닛코 이치몬지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는 느릿하니 눈을 떴다. 낯선 풍경이 눈가에 들어왔다. 차의 전조등도, 실내등도 끈 채로 어둠 속에서 눈을 뜨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어둠 속에서 더 짙게 내려앉은 그의 그림자였다.

 

닛코? 여기가 어디야?

잠시 내리도록 하지.

아니, 자기 할 말만 하지 말고.

 

는 눈을 끔벅이며 어둠에 익숙해져 갔다. 그림자가 가벼워졌다. 그는 차에서 내려 반대편으로 걸어왔다. 바닥에 깔린 자갈들로부터 다각다각 발소리가 전달되어 왔다. 그리고 이쪽의 문이 열렸다. 탈 때와는 다르게 그는 몸을 굽히더니 안전벨트를 직접 풀어 주었다.

 

순간, 뺨이 스치는 것만 같았다면 착각이었을까.

 

가깝게 느껴지는 향기에 순간 의 숨이 멈췄다. 무슨 일이지? 닛코 이치몬지의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는 언제 몸을 굽혔냐는 듯이 반듯하게 서 있었다.

 

는 그를 더 기다리게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저이가 나를 데리고 꽤나 먼 곳까지 온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니 머리는 금세 맑아졌다. 에게 지금 닥친 문제는 하나뿐이었다. 자갈 위를 로퍼힐을 신고 걸으려니 안 그래도 느릿한 걸음이 배로 느려졌다. 앞서 걸어가던 그는 이윽고 돌아와선 팔을 내밀었다. 잡아도 되는 거였구나. 단단한 그의 손목을 잡은 는 조심조심 중심을 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자갈밭을 지나, 나선계단을 여러 층 오르니 탁 트인 옥상이었다. 그들은 산 정상에 지어진 건물 옥상에 올라가 있었다.

 

……. 예쁘네.

 

하늘을 가리키는 닛코 이치몬지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새카만 밤하늘에 휘영청 큰 달이 떠 있었다. 저 달이 이렇게 아름답게 보일 일이던가. 큰 달의 배경처럼 아름답게 보석 박힌 밤하늘이 펼쳐진 밤은 얼마나 꿈꾸어 온 것이었던가. 저 별 중엔 아마도. 아마도.

 

하늘을 꿈꾸어 온 인간에게 별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고독한 존재였던가. 이 우주에서, 나와 눈이 마주친 너라는 별과 나는 언제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에게 오늘의 밤은 어릴 적 천문대에 방문해 보았던 밤하늘과 다른 바가 없었다.

 

고마워.

 

휘황찬란하게 펼쳐진 저 별빛을 보니 왜 눈물이 날까. 선연하게 펼쳐진 밤하늘이 물기로 번져갈 때쯤, 달그림자는 그로부터 쪽으로 져 왔다. 저 하늘의 별빛을 다 잡아먹을 것만 같은 신도시의 밤만을 십 년 가까이 보다가 어깨를 펴고 보는 하늘의 별빛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두목께서 기다리고 계시다만.

 

는 그답지 않게 말이 길다고 생각하면서 별빛이 총총대는 밤하늘 아래에 그의 얼굴에 지는 그림자로 눈길을 돌렸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기에 먼저 실례했다.

 

그의 안경 렌즈에 반사되는 눈빛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면, 이 또한 착각이었을까.

 

한다.

 

앞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입모양만 달싹였다. 가 분명하게 들은 것은 뒷말뿐이었다. 는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이 낯설었다.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도 이렇게 따뜻하게 느껴질 일이었을까.

 

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별들 때문이어서도 아니고, 달싹이는 그의 입술 탓도 아니었다. 그저, 이 밤이 가져온 어떤 낭만적인 파도가 잠시 가슴을 휩쓴 탓이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지.

 

닛코 이치몬지는 천문대 옥상 바닥에 작은 손전등을 밝혔다.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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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AU / 관제사님과 마님의 짧은 불면의 밤 이야기

 

* * *

겪어본 자만이 안다. 내 의지로 잠들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가를.

겪어본 자만이 안다. 무엇을 해도, 아무것도 않아도 잠들 수 없는 것이 얼마나 공포인가를.

겪어본 자만이 안다. 귓속에서 빽빽하게 꽉 짜인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로 풍성하게 울리는 노래가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를.

 

며칠을 운신도 제대로 못 할 만큼 아팠던지라 오늘만큼은 조금이라도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아닌 모양이었다. 는 귓속에 노래벌레라도 사는 듯이 귀를 막아도 속에서 올라오는 노랫소리에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냅다 발로 걷어차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입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도 깨어났다. 그야 옆자리에서 풀썩 소리가 날 정도로 이불을 울리는데 늦게 들어온 그가 깨어나지 않을 도리야 없었겠지. 안 그래도 3교대 근무를 하는 관제탑의 관제사이면서 에 대한 잔걱정도 많은 그가 깨어나지 않을 리가 없다.

 

, 미안해요. 당신을 배려하지 못했어요.

미안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도 잠이 오지 않으시는 건가요?

이제 정말 잠들고 싶은데 말이죠.

 

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양 뺨이 손에 가려질 만큼 체구가 작은 그의 작은 마님이 괴로워한다. 삶을 함께하겠다고 이번 생에 서약하기 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불면증이었건만 바로 곁에서 사람의 몸을 갖고 사람의 생을 갖고 바라보는 불면증은 이렇게까지 사람을 괴롭게 만들 수 있구나, 생각하던 그는 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늘 먹던 약을 먹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네요. 당신도 내일 일이 있고.

 

그럼, 잠깐 실례할게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거실로 나가선 약하게 전등을 켜곤 전기 포트에 물을 끓였다. 이윽고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는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앉아 그가 하는 양을 얌전히 듣고 있다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고양이 얼굴이 그려진 슬리퍼에 발을 실었다.

 

나오셨나요? 침상에서 기다리셔도 괜찮은데.

당신이 일어나 있는데 제가 어떻게 누워서 기다려요.

곧 준비되는데도 말예요.

 

그가 준비하는 것은 휴식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캐모마일 차였다. 그새 티백을 건져내고 한 김 식힌 데다가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를 위해 약간의 냉수를 더해 마시기 적정한 온도로 만들어놓은 캐모마일 차. 단 한 잔에도 그의 배려심이 물씬 느껴질 정도였다.

 

매번 배려받기만 하니 미안해서 어쩌죠.

그런 말씀 마세요. 당신이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예쁜 찻잔에 담긴 캐모마일 차 두 잔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천천히 드세요. 저도 마실게요. 함께 마시면 조금 더 효과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사과보다는 감사의 말이 조금 더 듣기 좋습니다. 살포시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에 는 새벽임에도 펄쩍 뛸 뻔했다.

 

매번 잠들지 못할 때마다 이렇게 준비해 주시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를 거예요. 마치마치 당신의 삶을 절반은 꿈을 위해서, 남은 절반은 나에게만 다 쓰게 하는 것만 같아서 미안함이 컸나 봐요.

 

그가 의 맞은편에 앉았다. 얼마나 반듯한 사람인가. 내가 무슨 좋은 일을 했다고 이런 사람과 짝이 되어 있을까. 는 잠시 움츠러들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 넓은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지금 내가 당신에게 해드릴 수 있는 일은 당신의 꿈이 이뤄지기를 기도하는 것밖에 없네요.

곁에 계신 것만으로도 충분한 일입니다. 여태까지의 당신이 계셨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건데도요.

 

은 그의 뺨과 뺨을 맞대었다. 얼핏 보면 굉장히 차가운 인상의 그에게 끌린 것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아니, 더없이 평범한 것만 같은 이 그의 눈에 들은 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를 묻는 것이 먼저일까? 함께 공부하면서 가벼운 데이트도 즐기던 철없는 대학생 시절을 떠올린 는 풋, 웃어버렸다. 과거는 어찌됐든 좋았다. 그가 관제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내보였을 때 누구보다 앞서 당신의 꿈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면서 그의 공부를 물심양면으로 도우려고 애쓴 것도 자신이었으니까.

 

당신이 당신이라 참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많이 사랑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는 서툰 고백을 하곤 자리로 돌아와 그의 선물을 입안에 머금었다. 달큰한 캐모마일의 향기 속에 연한 사과 맛이 느껴졌다. 불면의 밤이 길다 보니 집에 준비해둔 차 중에선 캐모마일이 제일 빨리 비워지곤 했다.

 

다음번에는 당신에게 즐거움으로 가득한 티타임을 선물하고 싶어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는 어서 차를 마시라는 둥의 재촉은 하지 않았다. 그의 찻잔은 이미 비어 있었는데도. 그저 자신의 작은 마님이 하는 양을 따스함이 담긴 한색의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랑스럽고 따스한 새벽의 풍경 속에 괴로움도, 공포도, 미칠 것 같은 시간도 점차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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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잠들었다. 어젯밤 잠든 채로 그렇게, 자는 체라도 하는 듯이 미동도 없이 잠들었다. 영롱한 은빛 눈이 발하던 빛이 뜨지 않은 채로 잠들었다. 물렛바늘에 손이라도 찔린 듯이 잠들었다. 손끝에 찔린 자국이라도 있는 걸까, 가슴 위로 곱게 포개진 손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숨을 쉬고 있을까, 가만히 인중 위로 검지손가락을 포개보았다. 옅은 숨이 들고나는 것이 느껴진다.

 

남자는, 조용히 그 머리맡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어딜 보아도 전통 일본식 건물과는 크게 어울리지 않는 이국의 공주님이 쓸 법한 침대에는 네 개의 높은 기둥이 있고, 베일이 내려와 있었다. 그 베일 안에 들어와 안부를 확인하는 것도 근시…로서 할 수 있는 일이겠지. 남자는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 작정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깨어 있을 때는 이렇게 주인을 섬세하게 자세히 바라볼 수 없었다. 일자로 반듯하게 조각된 듯한 하얀 이마 위로 흩어진 은빛 비단실 같은 머리칼이 몇 자락 내려와 있었다. 이마와 눈 사이에 가지런히 정돈된 눈썹이 느긋한 여덟팔 자를 그렸다. 가녀리지만 강단 있는 콧대를 사이로 아름답다고밖에 할 수 없는 눈이 감겨 있었다. 그 아래로…결코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던 발그레한 뺨이, 그리고, 입술이 있었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멈춰 있었던 입술에서 간신히 눈을 뗐다. 저 자그마한 입술 새로 나오는 명령 하에 혼마루의 모든 도검남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글쎄. 비행장도 하나 만들어 볼까? 허가 얻는 거야 어렵지 않을 거야. 내가 여태껏 한 게 있는데. 응.

 

죽은 듯이 잠이 든 주인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던 말이 생동감 넘치는 목소리와 함께 귓가에서 재생되었다. 당장 답하지는 못했다. 왜였을까. 저 드넓은 하늘은 나는 것이 꿈이 아니게 될 것 같다는 생각. 누군가와 힘을 합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 가능할 것이라는 그 믿음이, 왠지 이 사람 앞에서는 행해질 것만 같다는 어떤 믿음이 피어올랐었다.

 

그런 주인이 잠들어 깨어나지 않는다.

 

어젯밤 늦게까지 다른 도검남사의 방에서 회의가 있었다더니 그 때문에 오랫동안 주무시는 것입니까. 제가 깨어나시도록 무엇이라도…. 아니, 이대로 피로를 푸시게 두는 것이 올바른 도검남사의 일일까요.

 

남자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가슴께가 고르게 오르내리는 것이 큰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 듯 보이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잠들어 계실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같은 말을 굳이 더하진 않았다. 잔걱정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어디 다친 것도 아니고, 물레에 손을 찔린 것도 아니고, 그저 단잠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믿었다. 눈을 뜨고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는 그 시선이 너무나도 올곧고, 싱그럽고, 생동감 넘치고, 그리고 아름다웠기에. 꿈꾸는 자의 눈빛을 갖고 있었기에.

 

남자는 책자를 펼쳤다. 이곳에서의 생활 규칙을 담아 신입 도검남사들에게 배포된 매뉴얼이었다. 꼭 항공기 운항 전의 체크리스트 같아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몸을 가진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하늘을 나는 꿈을 이뤄줄 것만 같은 주인을 만났다는 점이 행복했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주인의 포개진 손을 제 손으로 포갰다.

 

검을 쥐는 단단한 손과 싸움이라고는 모를 것 같은 보드라운 손이 포개지며 손목이 닿았다. 의도하고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변명 아닌 변명을 쏟아냈다. 일부러 잡은 것은 아니라는 것처럼.

 

…아무런 사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습니다만, 걱정하는 사이에서 이 정도는 괜찮다고 알고 있습니다. 깨어나시면 부디 용서를.

 

그의 손길은 그가 잡고 있는 보드라운 손보다도 더 깃털 같았다. 한 손으론 책자를 펼치고, 한 손으론 손을 잡은 채로 그는 책자를 읽어내렸다. 운항에 있어 실수는 목숨과도 직결됩니다. 모든 경우의 수를 숙지하고 있어야겠죠. 그는 찬찬히 책자를 읽어내려갔다. 내용에는 특별한 것은 없었다. 사고를 조심하라는 것이 대다수였으니까.

 

다만, 자꾸만 손목의 고동이 두근거리는 것이 신경이 쓰였다. 긴장이 더해지는 것일까. 잠든 이에 맞춰서 자신의 이 박자를 맞추는 것이 느껴지자 남자는 제 귀 끝이 저도 모르게 조금씩 화끈거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맥박의 고동이 톱니바퀴처럼 돌고 돌았다. 주인이 한 번, 남자가 두 번, 주인이 두 번, 남자가 네 번. 남자의 얼굴도 천천히 상기되고 있었다. 무방비하게 잠들어서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잠든 혼마루의 여주인, 그리고 베일 속에 홀로 앉아 있는 남자. 그 사이에 돌고야 말아버리는는 일말의 긴장감.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은 긴장감 속에서 남자는 결국 책자를 소리없이 덮었다.

 

당신을 곁에 두고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제 마음을 읽는 것보다 어렵군요.

 

그는 오랜 시간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건장한 체격은 침대의 끝에 닿을 것만 같았다. 책자는 협탁에 놓이고, 손은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아까와 다른 점이라면 이제 양손이 모두 깍지를 낀 채라고 하면 되었을까.

 

남자는 심호흡했다.

 

주인께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동화 속에서 본 장면이라도 재연해 보아도 되겠습니까. 이 불타는 마음에 대한 추궁은 일어나신 후에 받겠습니다.

 

깍듯하게도, 그는 고개를 숙였다. 가지런히 펼쳐진 머리카락의 수를 셀 수 있을 만큼, 어디서 불어왔는지 모를 바람이 흔드는 촛불이 살포시 흔드는 속눈썹에 일렁이는 불빛을 셀 수 있을 만큼. 그렇게.

 

 

- DMM 점검중이었습니다★ 구름씨, 놀라게 해서 미안. -

 

섬세한 손끝이 사락사락 움직인다. 마치 비익조가 제 짝을 부르듯 하는 부드러운 손길에 상대방이 끌려 들어가듯 그 옆에 가서 선다. 일상의 풍경이다. 멀리서 보아도 상당한 거구의 흰 코트 자락 안으로 폭 싸여 있을 모습을 상상하긴 어렵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의 상사 두 명은 그런 관계니까 사이좋은 봉황 부부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다. 그와, 남자 쪽의 목적을 위해서도.

 

뽀득, 뽀드득.

 

먼지 한 알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그는 정성스럽게 포도 한 송이를 손에 잡고 알알이 닦아내었다. 본성의 날씨가 충분히 추워져야만 수확할 단 한 종류의 품종. 술꾼 동생이 눈독을 들여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면서 불가하다고 말하게 하는 한 그루의 나무였다. 혹시나 새가 쪼아 먹을까, 혹시나 벌레라도 먹을까, 그의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자란 포도나무는 그 위용조차 남다르다고 할 만했다. 혼마루의 토양이 좋은 것인지, 나름대로 신의 이름을 지닌 그의 손이 닿은 탓인지 실한 포도가 알알이 말 그대로 아름답게 매달려 있었다.

 

닛코 이치몬지는 포도알을 닦으면서도 신경이 온통 저편으로 쏠려 있다는 것이 불편했다. 몸을 갖고 이 혼마루에 처음 현현해 보았던 풍광벚꽃잎이 휘날리는 꽃잎의 폭풍 속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자신을 바라보던 주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 불편했다. 자신은 일개 부하에 불과할 뿐인데. 사니와의 장기말 중 하나일 뿐인데. 전장에서 죽으면 죽는 대로 그것이 영예일 뿐인 부려지는 물상신에 불과할 뿐인데. 수장 산쵸모의 양날개 중 먼저 현신하여 이치몬지의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고, 사니와인 ――의 여러 일들을 처리하는 입장에 선 자신이 주인의 사생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신경이 쓰인다는 점이 불편했다.

 

혼마루의 부지를 조금 써도 되겠나?

닛코가 부탁하는데 거절할 필요가 있겠어요?

 

사니와는 환하게 웃었었다. 자신의 이름이 깃든 그 태양 같은 미소가 원인이었을까. 심장이 울렁거리는 소리가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간단히 목례만을 올리고 나오자마자 그는 쿠와나 고우의 밭 주변의 흙을 맛보기까지 하면서 포도를 키우기 좋은 땅을 골라 영역을 표시하고 상점가에서 모종 몇 그루를 사 왔다.

 

그렇게 포도를 키운 지 몇 년이 지났다. 간혹 병충해가 걱정이 될 때면 쿠와나 고우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곤 했다.

 

주인에게 주려는 거지? 그럼 우린 동업자야.

.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라고. 같은 주인을 섬기는 입장이잖아?

 

포도는 적당히 자랐다. 이제 영하 7도에서 10도의 날씨가 며칠만 계속될 수 있기를 바라면 그만이었다. 건포도에 가까울 정도로 쪼그라든 얼음 같은 포도를 강한 추위 속에서 직접 손으로 수확해 소량의 포도즙을 짜내어 발효해 만드는 아이스 와인. 나무 한 그루에서 일반 와인병의 절반 정도인 375ml밖에 만들 수 없는 귀하디 귀한 아이스와인이 만들어지기까지 가장 중요한 재료가 갖춰지고 있었다.

 

주인과 수장은 종종 같이 혼마루 경내를 거닐었다. 때로는 쿠와나 고우와 닛코 이치몬지의 밭 근처를, 때로는 별채가 있는 후원을, 때로는 연못이 있는 정자 근처를 거닐면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아니, 정정한다. 주로 이야기를 하는 쪽은 주인이었다. 그의 수장은 주인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거나,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면서 그 목소리의 독특한 음과 리듬을 감상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왜인가.

 

가슴이 콕콕 쑤셔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선가. 수장과의 사이를 갈라놓을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선택지에, 아니 깊은 무의식에조차 없는 것이 그라는 도검남사였다. 그런 그임에도 주인의 반대편, 왼쪽 자리에 서고 싶어지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쨌든 날씨 운은 나쁘지 않았다. 주인이 겨울을 좋아했기 때문에 더욱 농사는 성공적이었을지도 몰랐다. 잘 익고, 잘 얼어서 잘 따인 포도들은 바스켓에 얌전히 담겨 있었다. 닛코 이치몬지는 작업을 하던 목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정갈하게 넣었다. 이제 이 포도들을 가지고 양조장에 들러 최상급의 아이스 와인을 만들기만 하면 올해의 일과도 하나 끝이 날 일이었다.

 

잘 부탁한다.

 

누구를 위한 것이라곤 말하지 않았다. 양조장에는 간혹 다른 혼마루의 농업 담당 남사들이라든가가 얼굴을 비추었다. 개중에는 니혼고나 지로타치 같은 술을 좋아하는 남사들도 있었다.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닛코 이치몬지는 자신이 가져온 포도들의 공정 과정에 집중했다. 혹시라도 바뀌기라도 하면, 혹여라도 다른 마음을 품은 자들이 바꿔치기라도 하면 곤란했으니까.

 

왜 이렇게 신경을 쓰는지는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한 뼘 붉은 가슴이 조금 어지럽기에 시작한 포도 농사가 여기까지 와서도 욱신거리는 가슴 속을 채우고 있을 줄 몰랐다.

 

양조장의 시간은 마법처럼 흘러갔다. 마치 영력을 가득 담아 놓은 도움패를 사용해 그들의 상처가 순식간에 나아 버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포도가 압착되고, 발효되어 와인으로 만들어졌다.

 

양조장의 직원들이 시음해 보라며 반 잔 정도를 건넸다. 단정하고 감정 변화 없는 얼굴에서 눈꼬리가 꿈틀했다. 처음 만든 것치고는 나쁘지 않았다아니, 가히 성공적이라고 할 만 했다. 통상의 핏빛이 아닌 맑은 붉은 빛이 영롱하게 사람의 마음을 빼앗기 충분했다. 자연산 꿀의 향과 제비꽃의 향기, 포도에서 어떻게 추출되었는지 모를 딸기와 라즈베리, 블루베리의 향이 입안에 감돌았다.

 

좋군.

 

수고했다. 보수는 현찰로 지급하지. 닛코 이치몬지는 한 손에 고급스럽게 포장된 아이스 와인을 들고 상점가로 나왔다. 간단한 메시지 카드를 쓰고 싶었다.

 

주인은 아름답게 꾸며진 테이블 앞의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수장 산쵸모의 현현일을 기념해서 매해 열리는 주인과 이치몬지의 크리스마스의 선물 교환식이었다. 닛코 이치몬지는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의 수장은 그의 주인에게 아름다운 보석으로 치장된 귀걸이를 선물했다. 플래티넘 위에 세팅한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촛불의 희미한 빛으로도 밝게 빛났다.

 

와인이 한 차례 돌았다. 그의 차례가 돌아왔다. 주인은 닛코를 향해 싱긋 웃고는 붉은 빛의 공단 레이스로 장식된 작은 케이스를 건넸다.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설레고야 말아버린 얼굴빛을 다급히 숨겼다. 수장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렇지 않게 얼굴빛을 숨긴 닛코 이치몬지는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주인에게 건넸다.

 

부디.

 

어떤 말을 더해야 할까, 숱하게 생각했건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말은 그 한마디였다. 더는 더할 것도, 덜어낼 것도 없는 그만의 고백이었다.

싫은데?

넌 사람이 말을 하는데 제일 먼저 할 말이 그것뿐이야?

납득할 수 없는 말이니까, 아니겠어?

 

틀린 말은 아니다. 아주 조금 전까지, 그러니까―저 발언이 있기 전까지 둘은 누구라도 알아줄 만한 사이였‘었’을 테니까 갑작스러운 통보가 달가운 쪽은 없을 수밖에 없겠지. 그것도 여태까지의 관계를 갑자기 무로 돌리자는 말이라면, 더더욱.

 

멋대로 좋아하고 멋대로 헤어지자고 하고, 지금 이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

사람이니까 마음이 변한 건데.

나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신과의 약속은 꽤나 무거운 일이었을 텐데.

덥석 받아들여 놓고 뭐가 무겁다는 거야?

적어도 이 관계가 나한테는 진심이었다는 얘기지.

 

얼굴 위로 서늘하니 그늘이 진다. 차가운 그늘. 늘상 제비꽃잎처럼 따스한 보랏빛을 띠던 눈이 차갑게 언 자수정 같은 빛을 보인다. 몸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눈만 형형하게 반딧불이마냥 빛이 난다. 그럼에도 먼저 할 말이 있다고 했던 쪽은 아무렇지 않게 그 눈빛을 마주 쏘아본다.

 

질렸어. 네가 이러는 게 질렸다고. 언제나 마음대로 날 휘두르려고 하지 내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자고. 그만두고 싶어.

나는 아직 안 질렸어. 그리고 내가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했다면 넌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지.

 

왜냐하면 내가 ―로 데려갔을 거거든. 누가 봐도 거구의 남자는 뒷말을 삼켰다. 몇 번이라는 수식어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아니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을 다른 것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마다 자신만 볼 수 있게 만들어버리고 싶다는 소유욕을 참아냈는데 그 결과가 고작 이런 통보라니. 그것도 현세에 며칠 휴가 명목으로 다녀와서 말이다.

 

솔직하게 말해. 현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다시 말하지만 아무 말 없었어.

너 지금 거짓말하고 있잖아.

아닌데, 솔직한데.

내가 몇 년을 너와 함께 먹고 잤는데 그깟 거짓말 하나 못 알아차릴까봐?

 

남자는 계속해서 상대방을 닦달하고 몰아세웠다. 인간의 육신을 얻고 연인이 되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고작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믿음을 주고 자신을 좋아한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써도 애쓰는 소용조차 몸부림뿐인 인간에게 마음 한 켠을 내어주지 않는 신이기에는, 그는, 너무 다정했다. 겨우 닿은 손끝에서, 맞잡은 두 손에서, 그리고 마주닿는 입술에서,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것을 서로 공유했던가. 비밀조차 없는 사이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실컷 사랑을 논하곤 주인의 현세로 며칠 떠났다 온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몇 년을 식지 않은 정열이 새파랗게 얼어 버렸단 말일까.

 

주인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할 때면 도로록 눈을 굴리는 것도.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할 때면 손톱 옆 거스러미를 슬쩍슬쩍 손톱으로 긁어내는 것도. 모두 두 눈도 필요 없을 만큼 한눈에 보이는 정도의 수준 낮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그의 눈에 빤히 보였다.

 

너 말이야.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제야 옆으로 굴러갔던 눈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분명한 거짓말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 남자는 몸을 숙이고 눈을 치뜨고 상대방의 은빛 발하는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날 속이기에,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딸꾹. 주인의 입가가 사시나무 떨듯이 덜덜 떨린다. 뭔가 말하려는 듯이 달싹이다가 다시 입을 다문다. 그래. 분명히 넌 현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남자는 치뜬 눈 그대로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주인과 검의 관계. 신과 인간의 관계. 연인의 관계. 그 모든 것이 얽혀서 동고동락한 7년이 넘는 시간을 우습게 본 인간의 패배였다.

 

자, 솔직해지자.

 

귓가에 입김을 훅 분다. 어떤 자리에서든 이렇게 입김을 불면 꼼짝 못하고 하던 장난도 그만두고 사실대로 말하는 너였지. 그래. 그러니까 이번에도 솔직하게 말해 봐. 남자의 속마음이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같이 웃었다.

 

어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숨결이 닿는 감촉에 잠시 움츠렸던 어깨가 다시 펴진다. 그의 입에서 나온 답은 남자의 예상 밖이긴 했지만.

 

싫어. 그리고 우리 이제 아무 사이 아냐. 이거 놔.

난 아직 헤어진다고 한 적 없다? 못 놔.

 

싱글싱글 웃으면서 남자는 힘으로 손깍지를 꼈다. 콩콩 울리는 맥박이 두근거리는 순간까지 단 삼 초. 여전히 자신과 같은 속도로 뛰는 맥박을 느끼면서 남자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맥박 소리가 귀를 울린다.

 

너, 아직 나 못 놨잖아. 그치?

….

나를 손에서 떼어놓으려고? 그건 안 되지요. 자. 기. 야.

 

일부러 한 음절씩 뚝뚝 떨구며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불러본다. 한 음절마다 상대방의 심장이 덜컥거리는 게 느껴졌다.

 

…빨리 놔. 명령이야.

안 들을 거예요.

소리 지를 거야.

질러 봐. 오늘따라 거짓말도 심하고, 반항도 심하네, 자기.

 

꼭 어딘가로 데려가 버리고 싶게 말이야. 남자는 계속해서 뒷말을 삼켰다. 말로 하고 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자꾸만 목이 간질간질하니 튀어나오려고 했다. 등에서, 꼬리뼈에서, 손에서, 목에서 간신히 숨겨 온 수성(獸性)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당장 이 품속의 인간을 씹어삼켜버리고야 말 것 같은 짐승 이름을 가진 것의 숨겨놓은 품성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막기에, 오늘의 그는 조금 자제력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 들어야지 나도 판단하지.

….

말 안 하면 정말 이대로 몇 시간이고 있을 거야. 나 알지?

…. 일단 놓고 얘기하면 안 될까?

놓으면 도망갈 거잖아. 나 지금 많이 참고 있어.

 

스르륵 잠힌 손에서 힘이 풀린다. 남자는 더욱 굳게 손을 잡고, 한 팔로 기어이 허리를 감았다.

 

어서 말해줘. 내 참을성, 보기보다 별로니까.

 

주인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첫마디를 꺼내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는지 목소리가 꾹 잠겨 있었다.

 

장례식에 다녀왔어.

응.

가까운 사람도 아니었지만 먼 사람도 아니었어서.

응.

조금…힘드네.

그런데 그게 왜 나한테 헤어지자는 이유가 되는데.

나도 언젠간 죽을 테니까. 여긴 전장 한가운데잖아. …너한테 더 큰 슬픔을 주기 싫었어.

하?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한 소리를 냈다. 전장 한가운데에서 죽을지 모르니까 나한테 더 큰 슬픔을 주기 싫다고? 이 인간이 지금 뭐라는 거지? 그렇게 따지면 칼을 본체로 두고 있는 나야말로, 이 본체가 부러지면 끝인 하루살이 생명일 텐데?

 

아, 너 정말 안 되겠네.

 

남자는 목덜미에 기대고 있던 얼굴을 들어 상대방의 귀를 깨물었다.

 

헤어지자는 말을 그따위 이유로 하다니, 내 주인이지만 너무 나약한 소리를 하네. 역시 내가 데려가야겠어.

뭐?

자, 여기 보세요. 자기야.

 

남자는 달콤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곤 숨결까지 느껴질 위치에서 똑바로 제 주인의 눈을 보았다. 그의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조금 더, 조금 더 가까이 점점 다가온 얼굴에 홀린 듯 입술이 열렸다.

 

나랑―――.

 

오전 0시 정각. , , . 단 세 번의 노크 소리와 함께 하루 업무가 끝난다. 전쟁에 낮과 밤이 어디 있겠는가. 무기로 만들어진 이들에게 평화는 사치고 그 무기를 통솔하고자 하는 이에게도 안온함은 사치였다. 세 번의 노크. 혼마루에 아무 일도 없다는 신호. 다행이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시작할 수 있겠어. 육중한 문을 열어젖히는 손을 생각하며 주인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야 어느 성인데. 몇 년의 세월을 갈아서 결계를 보강하고, 채우고, 단단하게 만든 성인데 쉬이 시간역행군의 침입을 허락할 일도 없거니와 이쪽으로 오는 괴이들도 물리칠 수 있게 만든 성인데. 그렇게 쉽게 뚫릴 리야 없지. 라는 생각을 하며 주인은 미소지었다.

 

코토리, 오늘 밤도 이상 없다. 걱정 없이 푹 자도록.

오늘 야경은 카시라 차례였구나. 믿고 맡길게요.

무슨 일 없도록 잘 지키마.

 

카시라, 라고 불린 남자는 그날의 보고를 간단히 마치고는 목례하고 자리를 떴다. 별채를 감싸고 있는 영력의 경계에 서서 밤을 지새우는 불침번이 그의 차례인 날. 후원의 연못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개굴개굴 울려퍼졌다. 시커멓게 먹색으로 물든 후원의 풀잎 하나하나마다 고요함이 자리하고, 별이 아름답게 흩뿌려진 하늘 아래 구름 한 점 없는 가을날이 부쩍 다가온 듯했다.

 

* * *

천고마비의 계절.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계절.

낮은 여전히 푹푹 찌듯 더워서 시간역행군조차 활동을 멈춘 이상한 가을이지만, 높이높이 날아가는 구름 한 점은 가을의 위용을 뽐내기 충분히 아름다웠다.

 

- 곧 있으면 5주년이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5년이었다. 인간의 육신을 갖고 주인을 위해 직접 검을 휘두르는 육체를 가진 지는 5년이니, 그 때부터 센다면 긴 시간일 것이고, 불과 철에서 태어난 몸이 형상을 갖춘 것은 까마득히 오래 전이니 그에 비하면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다. 5년을 유독 특별하게 만든 것은 주인의 태도였다. 해마다 그가 육신을 얻고 주인의 검으로서 충성을 맹세하게 된 1225일이 돌아올 때마다 주인은 특별한 시간을 준비해 주었고, 남자는 그로 인해 해마다 돌아오는 그 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다섯 번째 해가 되는 올해는 조금 더.

 

늘 작은 새 쪽에서 먼저 준비를 했다면 올해 한 번쯤은 나도 깜짝 놀라게 해 주어야지.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미리 주문한 내역을 떠올리며 흐뭇한 감상에 젖었다. 개굴개굴. 개구리는 여전히 울고 하늘에서 별은 반짝였다.

 

* * *

 

굳이 말해야 할까? 주인은 방 안에서 후다닥 닫았던 서랍을 열고 선물 케이스를 꺼냈다. 해마다 그에게 선사했던 특별한 시간.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전장에서의 만남. 고맙게도 주인이 원하던 대로 남자의 활약은 눈부셨고, 그에 준하는 포상도 매번 할 수 있어서 기쁜 참이었다.

 

그렇다면, 올해는 다섯 번째 해니까 조금 특별하게 보내야지.

 

소년의 장난기를 품은 은빛 눈에 케이스 안의 물건에서 반사된 것이 빛났다. 부토니에 핀. 언제 스러질지 모르는 생화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영원을 간직한 플래티넘으로 만든, 특별한 꽃 한 송이가 빛을 반사해 그 눈에 새겼다. 이번 여름이 지나면. 이번 가을이 지나면 꼭 할 거야. 어디서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큰 불행이 닥친다고 하지만 그런 미신 따위로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이미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 주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서랍을 잠갔다.

 

코토리, 아직 자지 않는 거니? 시간이 꽤 늦었단다.

. 이제 잘 거예요, 카시라.

 

누가 타치더러 밤눈이 어둡다고 했는가? 적어도 주인에 대해서만큼은 저 도검남사를 속일 수는 없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주인으로서 안 잘 수는 없지. 주인은 기분 좋게 불을 끄고 별채 내부의 별실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이 선물을 받으면. 기뻐하겠지?

 

* * *

 

가을은 나그네처럼 떠났다. 잠시 엉덩이나 붙이고 앉아 낙엽으로 장난 한 번 겨우 치고 밥도 한 끼 먹지 않고 떠났다. 밤이슬은 서리가 되어 내리고, 숨을 뱉으면 수증기가 되어 김이 서렸다. 남사들은 매복을 위해 얼음을 물고 출진하고, 단도들이 원거리 전투를 상정한 눈싸움을 과격하게 즐기는 계절이 돌아오고야 말았다.

 

여전히 주인의 금고에는 꽃핀이 어둠 속에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스웨터 한 장에 긴 치마를 걸친 주인이 툇마루에 내려와 앉으니 작은 남사들이 쪼로록 몰려들었다.

 

아루지! 아루지사마! 대장. 와글와글 모여든 단도들을 저마다 한 번씩 품에 꼭 안아주고 야겐한테는 안기는 모양새였지만 주인은 밭으로 건너갔다. 겨울에만 자라는 품종을 키우기 위해서 밭을 넓혀달라는 쿠와나 고우의 요청을 들어주었더니 몇몇 도검남사가 자발적으로 그를 도우러 갔다. 그 옆 포도밭에는 닛코 이치몬지가 산쵸모와 함께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껑충 뛰게 큰 그들의 키 때문에 포도밭이 아담하게 보였다. 정작 들어가면 그 포도나무들의 키가 꽤 컸는데도.

 

으음. 올해도 다들 다부지게 보내고 있구나. 좋았어.

 

주인은 별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내린 눈이 뽀드득 밟히는 소리가 사랑스러웠다. 이 눈밭을 그와 함께 걷게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 주인은 뜻모를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별채로 향했다.

 

, , .

12시 정각을 울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아무 일 없었던 모양이다.

,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그러면 밤을 부탁해.

 

* * *

 

공기가 차가워질수록 남자의 마음도 초조해진다. 오죽했으면 달력을 개인실에다가 걸어놓고 하루하루 날짜를 세고 있을까. 그 아이의 눈은 분명히 나를 향하고 있다. 알고 있는데도. 알면서도. 그럼에도 혹시라도 한 혼마루를 이끄는 주인과 그를 보좌해야 할 신하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지는 않을까, 초조하게 얼굴을 그려볼 때마다 점점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편지로 전할까?

이렇게 중요한 것마저 부끄럽다는 이유로 편지로 전한다고?

실수하는 것보단 낫지 않나?

그 아이를 생각해선 절대 그럴 수 없다.

 

반짝이는 주인의 은빛 무지개 같은 눈을 떠올린다. 절대로 편지 따위의 투박한 것으로 전달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선물을 준비해 놓고 선물과 편지만 두고 나오는 것은 그의 성미에 차는 일도 아닐뿐더러, 자신과 주인 모두에게 충성을 다하는 그의 왼날개에게도 못할짓이 될 게 뻔했다. 그래, 대면하자. 마주하고 이야기하자. 결심을 굳히는 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정말 실행할 때가 왔다.

 

 

* * *

 

식신 전서구가 다섯 명의 방을 두드렸다. 올해도 올 것이 왔군. 으하하, 올해는. 알아서 잘 입고 오라고? , 주인 아씨가 참 배려심이 깊구만. 우하하하! 산쵸모의 방까지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주인의 배려로 이치몬지 일가의 다섯 명 중 네 명의 방은 붙어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고케 카게미츠의 방에 좀더 가까이 있었다. 나름대로 껄끄러워 하는 그를 위한 배려였지만 이런 행사에는 얄짤없이 그를 부르는 것도 주인이기는 했다.

 

이 모임에 나는 끼지 않아도 괜찮은데 말이지이. 이왕이면 나도 제대로 된 현계일에 불러줬으면 하는데.

 

불만 가득한 얼굴로 적당히 차려입은 히메츠루 이치몬지가 먼저 별채로 향했다. 오늘은 이치몬지 현 수장의 현계 기념일. 특별히 마련한 자리에서 다함께 만찬을 즐기고, 나름대로 컨셉을 맞춰서 기념사진을 찍는 게 전부였건만 올해는 전서구의 쪽지에 의상 컨셉이 적혀 있지 않았다.

 

알아서 입고 와. 장소는 언제나의 파티 룸. 알죠?

 

별채 뒤에 있는 후원에 꽤 넓은 파티룸을 증축한 지도 벌써 한참이라고 했다. 가끔 도파별로 모여서 식사를 하고, 혼마루에 대한 의견도 듣고, 주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용도로 지었다는데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열리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이치몬지 일가는 매년 수장 산쵸모의 현계일이 되면 그 곳에 모여서 특별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작년에는 파티, 재작년에는 정장. 올해에는 특별히 적힌 메모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알아서 입고 오라는 뜻인 모양이었다.

 

* * *

 

카시라는?

아직 오지 않으셨다. 내가 다녀오면 되겠나?

아니, 그럴 것까지는 없어.

우하하, 녀석도 호랑이긴 한 모양이구나. 저기 오지 않느냐.

 

별채에 가장 늦게 도달한 것은 의외의 산쵸모였다. 제각기 달리 입고 오긴 했지만 누가 이치몬지 아니랄까봐 가장 포멀한 흰 자켓을 입고, 와이셔츠로 자신의 색깔을 내는 것이 그들다웠다. 그리고 저 뒤로, 가장 특별한 날을 가장 평범하게 보낼 작정인지 갑주를 해제한 정복 차림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산쵸모가 있었다.

 

? 두목?

호오? 이건 또 새롭네에?

 

산쵸모의 귀에만 들어가지 않을 뿐 놀람이 여실히 보이는 표정으로 난센과 히메츠루가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름대로 당번을 설 때조차 금목걸이와 발가락찌를 잊지 않는 현 수장이 잔뜩 꾸민 공작새처럼 나타나도 모자랄 날 정복 차림으로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재간은 없었다.

 

카시라?

기다리게 했다, 작은 새여.

아직 정시까지 조금 남은걸요? 5주년, 축하해요.

잠깐. 들어가기 전에 할 말이 있다.

 

숱하게 편지를 썼다 찢어버렸다.

숱하게 연습을 하다 잊어버렸다.

저 빛나는 눈에 모든 말이 다 녹아 사라져버렸다. 마치 수은에 담근 것처럼.

 

,

 

그는 냅다 한쪽 무릎을 꿇고는 양 손을 내밀었다. 아주 작은 은빛 케이스에 고급스럽게 이치몬지의 문양이 아닌 주인의 인장이 박혀 있었다.

 

?

 

영문을 모르는 주인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부디 받아주겠니?

 

어떤 말도 그보다 파괴력이 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말도 딸깍, 하는 작은 소리보다 크게 파문을 일지는 못했을 것이다.

딸깍, 하고 케이스가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안에서는 화려하게 반짝이는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어둠 속에서 처음 빛을 받고 화려하게 반짝이는 그 보석. 한 줄기 빛만 있어도 파이어를 내뿜는 브릴리언트 컷의 보석이 무지갯빛 광채를 내뿜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얼굴에 놀람이 물들었다.

 

, , 카시라? 이게? 무슨 말이에요?

 

한참을 놀란 표정으로 얼어있던 주인의 뺨에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거, 내가 생각하는, 아니 내가 아는 그거 맞죠?

 

주인의 눈에 샘이 고이듯 물방울이 반짝였다. 아마도, 오랫동안 나홀로 상상하고 생각해온 꿈이라도 이루어져 온 것마냥, 주인의 소리없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나도 조심스럽게 보였다.

 

, 나도 좋아했어요. 아니, 좋아해요. 내일은 더 사랑할게요!

 

주인은 이치몬지 일가의 모두가 이쪽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것처럼 다가갔다. 그의 속눈썹 개수까지 셀 수 있을 만큼.

, 그럼. 선물 교환해요 우리! , 하하하하! 얼른!

 

주인은 한 해를 치하하는 절차도 깜박하곤 후원의 파티 룸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아름답게 차려진 만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선물 교환식이 끝났다. 주인의 손에는 다이아몬드 링이, 산쵸모의 가슴에서는 은빛 다이아몬드 꽃이 빛나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식장부터 알아봐야겠구나, 껄껄껄! 히나야, 다른 건 내가 준비해 두마. 우하하하!!

오늘, 작은 새를 날려보냈다.

작은 몸이 부서져라 가루가 되어서 날아가는 모습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아주 지독한 꿈이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뺨을 꼬집어 보았다. 작은 새가 볼을 쪼는 것처럼.

아아, 너는 날아갔구나. 날아갔구나. 날아갔구나.

――. ――. ――.

세 번을 연달아 불러도 결국 너의 숨은 돌아오지 않는구나.

너의 발그레한 뺨은 돌아오지 않는구나.

너의 마음 한 켠에 자리잡았던 나조차 떠나버릴 것만 같구나.

 

 

며칠이나 지났는지 모른다. 혼마루는 고요에 싸였고, 아무도 방 밖으로 쉽사리 몸을 꺼내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그게 마지막 광경이라면 광경이었다. 세 번, 지붕 위에서 너의 이름을 부르고, 너의 이름을 또 부르고, 너의 이름을 다시 부르며 돌아오지 않는다고 확인하는 것이 마지막이었다. 영광스럽게 싸웠던 혼을 치하하는 정부의 상패쪼가리조차 그들에겐 불구덩이에 같이 넣기 아까울 정도로 낡은 유습의 일부였다.

 

돌아오지 않는구나.

 

시간 개념이라곤 없는 곳. 이제 산산이 부서질 개념상의 공간. 자신들의 존재를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의 죽음. 어디까지나 관념상의 계절이 존재하던 곳은 이제 새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만 했건만 여전히 무거운 슬픔에 잠겨 있었다. 이상하게 현실 세계로 나들이가는 날이 잦다고 느꼈던 것 자체부터 이상함을 느꼈어야 했다.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 조치를 취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그들에 비하면 무척 어린 사니와였으니까. 현대 인간의 수명에 따르더라도 무척 젊은 나이였으니까. 그렇게 떠나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 패인이었을까.

 

남자는 여전히 위패를 끌어안고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먼저 죽으면 아니, 먼저 떠나면 그땐 혼마루 곳곳에 뼛가루를 뿌려서 남겨줄래?

 

전쟁의 한가운데다. 만약이라도 씨가 될 만한 말은 입을 막아야 했지만 너무나도 뜬금없는 시각, 뜬금없는 상황에 했던 말이어서였는지 그냥 껄껄 웃고 넘어간 것이 실수였다. 이미 그때부터 죽음의 싹은 심어져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어디까지가 죽음이고, 어디까지가 삶이란 말인가. 몸은 죽었다 한들 너의 위패는 아직도 이렇게 따뜻한데. 내가 데워주면 그만인데. 여전히 영정사진 속의 주인은 밝고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고 그 앞에서 남자는 무릎을 꿇고 정좌를 한 채 위패만 끌어안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직도 그러고 있는 게냐?

 

밖에서 뭐라뭐라 말을 하지만 그의 귀에는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도 숨이 붙은 것의 온기가 느껴질 것만 같은데, 당장이라도 저 영정 속에서 손을 뻗어 나와선 깜짝 놀랐지? 이벤트야! 그러니까 날 좀 더 소중히 대해주길 바라! 하고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기만 한다면 사실 남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서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신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무 곳에나 씨앗을 뿌리고 다니는 죽음이라는 것의 싹을 실컷 잘라낼 자신조차 있었다. 다만 그를 미리 포착하지 못한 것에 더없이 후회하며 바닥을 적시고 있을 뿐.

 

가련해라. 가련하여라. 불쌍한 것.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말은 온통 그에 대한 찬사뿐이오, 머리를 채우는 것은 온통 그에 대한 생각뿐이리라. 남자의 손에 여전히 세게 쥐어진 위패 속 이름을 가진 이는 영원한 고요 속에서 웃고 있는데 남자는 그럴 수 없었다. 차마 웃을 수 없었다. 네가 있어야만 나는 완성되는 것이다. 네가 있어야만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있다. 어찌 이렇게 날 두고 혼자 떠날 수 있단 말이냐. 머릿속이 꽉 차서 어지러웠다. 어디에 견주어도 이 터져나갈 것 같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이제 그쯤 하거라. 보낼 땐 보내야 하는 것이야.

 

당신도, 그러는 당신 역시 목소리에 울음이 배어 있습니다, 어르신.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을 아는 이가 사랑을 잃은 자의 목소리를 논하다니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디에 견주어도 이 슬픔만큼은 대어놓을 곳이 없습니다. 사랑은 부두에 던져진 밧줄을 잡는 것으로 시작하여 배가 들어오는 것 같다더니, 떠날 때에는 밧줄을 끊어 버리고 종적이 없습니다. 닻을 언제 올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은 새가 말했던 온갖 사랑의 말들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찢어놓고 갈래갈래 불사르고 있습니다.

 

남자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들을 되뇌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작은 새의 흔적뿐이었다. 이 자리에서 나누었던 전략 회의 속의 냉철함이, 이 자리에서 나누었던 밀어의 달콤함이, 이 자리에서 나누었던 온기의 잔인함만이 남아 그를 채워갔다.

 

행복해요, 부디 행복해 줘요, 행복에 겨워 눈물이 나도록 행복해요.

너무나도 행복해서 내가 생각나지 않을 만큼 행복해도 좋아요.

 

그래, 넌 그렇게 말했었지, 작은 새여. 그 말이 복선이 될 줄은 몰랐단다. 혼잣말이 머리를 채우고 가슴을 태운다. 머리에서 나온 수많은 말들과 숱한 추억들이 머리에서 척수를 타고, 신경을 타고 뜨겁게 흘러내린다. 당장 녹아버린다고 할지라도 좋을 만큼 그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

 

어딘가에서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만 그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할 뿐이다. 어딘가에 갇혀버린 생각이 더는 생각을 거부하고 감각을 거부하듯이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유골을 혼마루 경내에 흩뿌렸다곤 하지만 그 탓으로 조금이라도 구천을 떠돌기라도 한다면 저승사자의 멱살이라도 잡아서 때려눕혔다는 이방의 신처럼 할 자신이 그에게는 있었지만, 저승의 신조차 눈을 감은 지금에서야 그럴 도리가 없었다.

 

. 인간의 욕망을 먹고 자라는 신. 인간의 사랑을 받아야만 신.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는 신. 그런 신위를 가져보아야 무엇하는가. 죽음의 수레바퀴는 되돌리지 못하는 것을. 운명의 배는 한 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 것을.

 

그는 진하게 후회했다. 숱하게 속삭였던 그 감정을 조금이라도 더 속삭였다면, 차라리 이 흘러넘치는 감정을 담아 새장을 만들어 작은 새를 안전하게 새장 안에 넣어두었다면. 그랬다면 사신의 눈이 신의 흔적이 진한 이 혼마루를 비껴 가지 않았을까. 그 명부에 이름이 올라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온통 아픔 뿐이다. 온통 슬픔 뿐이다. 남자는 한참을 짙게 흘러가는 후회의 늪에서 허우적댈 뿐이었다.

 

 

이쪽이 별채이네만, 들어가지 않는 것을 추천하지.

무슨 이유에서죠?

낯선 이의 방문을 꺼리는 이가 하나 있어서 말이네.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지요.

기다린다고 열릴 문이 아니네. 당분간은 여기에 오지 않는 것을 추천하겠네만.

 

두런두런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린다. 발소리가 들린다. 혼마루에서 들어본 적 없는 발소리다. 주인이 여태 일구어 온 혼마루의 전력을 시간정부는 흘려보낼 리가 없었다. 그들은 어쨌든 정부니까. 효율을 우선시하는 집단이니까. 어쨌든 역사를 사이에 둔 전투는 어디서든 벌어질 것이고, 누군가는 그 일을 이어받아서 해야만 하니까. 당연한 논리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별채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검남사는 먹는 존재가 아니다. 도검남사는 자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에겐 인간의 어떤 일련의 삶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완성체인 채로 검에서 육신을 입고 태어나 부러지면 다시 자신이 왔던 신위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이전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새롭게 불리면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그만이다. 다만, 기억의 힘이 있기에. 사람의 감정이 주는 힘이 있기에 새로이 불리는 것보다는 이전의 개체로서 살아가는 것이 더욱 강력한 힘을 지닐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시간정부는 주인 잃은 젊은 혼마루에 새 주인을 부임시키는 것을 택한다고 했다. 반대할 이유는 감정적인 것뿐이었다.

 

작은 새야, 작은 새야. 너 말고 다른 작은 새를 내 둥지에 들일 수는 없지 않겠니.

 

남자는 울면서 웃었다. 여전히 생전의 기억이 고스란히 그에게 주는 아픔이 깊었다. 전장에서 구르며 몸이 다치는 감각도 생경했지만 심장이 뽑히는 듯한 아픔을 느낀 것은 팔이 한 쪽 날아갔어도 수복하면 그만이었던 것과 달랐다. 나을 수 없고 낫지 않는 상처와도 같았다.

 

.

 

그래. 부서졌겠지.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 문제겠니.

사람의 사랑을 얻은 검이 주인을 잃으면 남에게 잡히는 것이 도리건만, 인간의 육을 입은 이상 그 사랑을 잃고 다른 자의 손에 쥐이면 더욱 불살라 스러지는 것만도 못하다고 느껴지는구나.

 

남자는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스스로를 부러뜨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작은 새가 원하는 결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주인을 나 자신으로 거부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한참을 그렇게 생각했다.

 

 

덜컥.

삭아가는 듯하던 건물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문짝이 날아와 그의 뒤통수를 정통으로 맞혔다. 여전히 그는 무릎을 꿇고 위패를 안은 채였다. 다만, 조금 낡아버려 금이 간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상복 어깨에 쌓인 먼지가 그가 얼마나 그 모양으로 있었는지를 증명하며 하롱하롱 빛을 받아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히나야, 그 꼴이 무어냐.

.

내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구나, 히나야! 내 너를 그리 가르쳤더냐?

.

네녀석이 살아 있어야 그 아이를 기억하는 이가 하나라도 더 있지 않겠더냐?

?

이런 바보같은 자식.

 

금발의 남자가 씩씩대며 그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나왔다.

 

이 멍청한 녀석아. 네녀석이 그렇게 신위로 다시 돌아가면 퍽이나 그 아이를 기억할 듯싶더냐?

?

 

몇 달을 말하지 않았는지 갈라진 목소리가 남자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이 자리에 멀쩡히 살아 있어야 환생을 보든 말든 할 것 아니냐. 아이고, 이 답답한 놈아!

어르?

신위로 돌아간다. 새롭게 불린다. 그렇게 불린 네 녀석이 그 아이를 제대로 찾을 수 있을 성싶더냐?

 

뺨을 맞은 것도 아닌데 뺨 맞은 표정을 한 남자는 쏟아져 내리는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작은 새의 기억을 온전히 기억하는 것은 지금의 자신이다. 이렇게 부러져 코토리를 따라가려고 한다고 할지언정 사신이 같은 곳으로 보내줄 리는 만무하다. 어쨌든 칼의 신, 어쨌든 살생의 물건에 깃든 혼. 작은 새가 간 곳으로 자신이 갈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면 차라리 환생을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사랑은 삼생의 업이라고 했다. 전생과 이 생과 후생을 모두 엮어야 짝으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짝 없이 날아오를 수 없는 비익조건만, 짝을 잃고 시름시름 앓다 죽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는 생각이 발끝에서부터 차올랐다. 존재를 지켜야만 다시 올 작은 새의 영혼도 반길 수 있지 않겠는가.

 

야마토리게라고 한다. 잘 부탁하지.

 

남자는 새 주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관리를 받지 못해 낡은 검은 직접 혼마루의 도공에게 수리를 맡겼다. 마치 새것처럼 돌아오는 육신, 깊게 자리한 흉터 같은 사랑이 그를 채웠다. 작은 새, 작은 새의 소원이 그랬다면 마지막 소원을, 마지막 명령을 들어주어야겠지. 다만, 작은 새도 해줄 일이 있단다.

 

다시 태어난다면, 꼭 내게 돌아오너라.

 

 

이번에는 장수했군.

감상은 그뿐인 것이냐.

달리 어떤 감상이 있겠습니까, 어르신. 여전합니다.

그으래유언은 잘 지키고 있는 것이고?

나름대로 잘 지키고 있지만, 하나는 어렵군요.

 

행복 말입니다. 작은 새가 다시 태어난다면, 분명히 이 가슴이 알 텐데요.

 

오늘도 그는, 어딘가에서 자신을 찾아올 작은 새만을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한 번은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한 번뿐이었을까?

두 번, 세 번, 아니 두 손으로는 꼽아볼 수 없을 만큼 상상해 봤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

손발이 다 부르트도록 전장에서 뛰는 날이 있었어도 생각해 마지않았던 것이 있었는데.

눈앞에서 현실이 되었다.

 

축하해, 대장.”

, 주인, 이제 과자 많이 줄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숨이 차오르듯 달려왔다. 어쩌면 주인이 물러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식장에 오르기 전까지, 저쪽에서 편의를 보아준 식장의 문이 열리기 전까지 한 번쯤은 주인이 다시금 생각해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버틸 수 있었다.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날보다도 예쁘구만.”

 

씁쓸하게 내뱉는다. 연륜 있는 오랜 수장의 뇌가 애써 얼굴 근육을 환한 웃음으로 바꾸어 낸다. 고작 인간 하나일 뿐이다. 인간의 아이 하나일 뿐이다. 인간의 자식 하나가 축하받을 일을 겪는 일은 천 년의 길을 걸으면서 숱하게 봐오지 않았던가. 아무런 것도 아니다. 스스로를 다잡는다. 여기서 말 그대로 일을 벌일 수는 없다. 당연하게도 일을 치러선 안 된다.

 

고마워.”

 

너는 환하게 웃는다. 아이가 저 하늘에 뜬 태양보다 더 환하게, 아름다운 여름날처럼 웃는다. 언젠가 나에게도 그런 웃음을 보였던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언젠가 나에게 손을 먼저 내밀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아니, 처음을 단정짓는 것이 지금의 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의 나는 그저 저 아이를 축하해야만 하는 굴레를 뒤집어쓴 한 도파의 한낱 은거한 노인일 뿐인 것을.

 

, 신랑은 들어오면 안 되지.”

돌아가요, 돌아가세요~.”

신부가 아무리 보고 싶어도 지금은 안 돼, 나리.”

 

문간이 떠들썩하다. 아마도 그 녀석이 들어오려다가 눈치 빠른 녀석들에게 제지당하는 소리일 것이다. 수완 좋은 녀석 같으니라고.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들어오면서는 울 것 같은 웃음이 들었다면 이제는 실소가 터져 나올 것만 같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녀석의 체면을 위해선 식장에 들어가야겠지. 적어도 식장을 나올 때까지는 이 평정한 얼굴,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얼굴로 모든 격정을 참아내야만 했다. 적어도, 갑자기 신부를 들쳐업고 뛰쳐나간다거나 하는 미친 짓거리는 벌여서는 안 된다. 침착해야 한다.

 

알고는 있었다. 알고말고. 천 년 연륜이 괜히 쌓인 줄 아느냐?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녀석과 주인 사이에 어떤 기류가 오고갔는지 이미 감사를 목적으로 나올 때부터 눈치채고 있지 않았던가? 알아서 할 일이지, 하고 심드렁하게 주인과 녀석 사이를 굳이 파려고 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이 도검남사이다. 감사관이다. 그렇기에 이런 상념 따위 없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슬슬 시간이 되어가는군 그래?”

 

어떤 심정이냐고는 묻지 않는다. 결혼을 앞둔 신부가 신랑과의 영원을 약속하는 순간인데 기쁨과 설렘 말고 다른 감정의 끝자락이라도 보일 거라면 이 결혼을 시작부터 반대했을 것이다. 그래, 감사관으로서 어떤 수단으로든 이 결혼을 훼방 놓고, 둘을 갈라놓으려고 애썼을 것이다. 꼬맹이 녀석. 분명히 주인을 행복하게 해줄 만한 능력은 있다고 자부한다. 내가 그렇게 키웠으니까. 그런데 역시 속이 탄다. 신부 측에 앉아야 할지, 신랑 측에 앉아야 할지, 계산을 끝내놓고도 막상 직접 신부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 잠깐 이쪽으로 좀 와 줄래?”

주인 아씨께서는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는 겐가?”

특별하게 할 말이 있어서.”

 

특별하게. 특별하게. 특별하게. 저 특별하게, 라는 말이 귓가에서 요동친다. 그래,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들어주지 못할 것이 뭐 있겠느냐. 시간정부의 명예를 걸고, 아니, 이제는 아니지. ‘명예를 걸고 이뤄주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마는.

 

결국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간다. 단 한 번도 이토록 가까워져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당장에라도 그 입을 맞출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간다.

 

―――.

 

언제고 웃음기를 빼지 못했던 얼굴이 제멋대로 요동친다. 가만가만 속삭이듯 들려주는 단 세 마디의 말이 이렇게 달콤하고, 이렇게 악독할 수 있었던 것인지 그대로 몸이 굳고 만다. 하긴, 그 녀석만 휘어잡은 게 아니니 말이다. 너는 알지 모르겠지만.

 

으하하하하, 무엇이 그리 고마운 게냐? 그으래, ,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인다고 하진 않는다. 물건에서 태어난 말석의 신인 도검남사로서 일신의 주인이 가질 행복을 질투해 봐야 남는 것은 창조신께서 내릴 불벼락뿐이다. 하지만, 하지만. 적어도, 내가 먼저 만났더라면, 지금 이 말은 그 녀석이 듣고 있을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 마련이다. 인간의 소원을 들어줄 힘을 갖고 있지만 인간의 사랑을 먹어야만 존재를 확정할 수 있는 불완전한 것이 신. 그런 신의 소원을 내치지 않는 한 명의 아이. 너는 행복해질 것이다. 행복할 것이다. 행복해야만 한다. 온갖 상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이봐, 나리. 언제까지 거기서 그러고 있을 거야? 다른 손들에게도 시간을 달라고.”

, 벌써 시간이 그리된 게야? , 인정머리 한번 없구만, 그래?”

곧 결혼할 신부한테 헛소리 늘어놓은 건 아니지?”

헛소리는 무슨, 떼잉. 내가 그리 할 일 없는 뒷방 늙은이로 보이느냐?”

그럼 영감님은 다음 손님에게 자리를 내어주세요~”

 

축객 아닌 축객을 당하고 하객석으로 간다. 그래도 전 수장의 위치가 있으니 신랑 쪽으로 가서 앉는다, . 신부석에 이미 와서 앉아 있는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속이 부쩍 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말의 질투심일지도 몰랐다. 아름답게 깔려 있는 주단 위로 녀석을 지우고 나를, 나를 세워 본다. 베일 속의 그 아름다운 얼굴을, 환한 얼굴을, 행복에 겨운 얼굴을 독점할 자가 나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부질없는 상상이다.

 

주례는그렇군. 두지 않는 것인가.’

 

히나 녀석이 초청한 악단의 연주와 함께 식이 시작된다. 신부 측과 신랑 측에 고르게 앉아 있는 도검남사들을 차례로 훑어본다. 어지간히도 울었나 보군, 헤시키리 하세베. , 실컷 울 수 있는 편이 속은 편하겠군. 그러면 첫 검이었던 카센 카네사다는.

 

함께 등을 맞대고 싸워보기도 한 동료들도, 함께 싸워보지 못한 동료들도 어쨌든 주인의 한 자루들이라는 자부심에 가득찬 검들이 여러 얼굴을 하고 주단의 끝을 바라본다. 흰 베일로 겹겹이 싼 얼굴은 아마도 태양보다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얼굴로 웃고 있겠지. 히나 녀석도 별반 다를 바 없이 수줍은 얼굴 가득하게 기쁨이 차오른 채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오른다.

 

신랑과 신부의 행진 뒤로 고코타이가 드레스의 끝자락을 잡고 꽃에 폭 싸여서 들어온다. 그래, 화동은 처음 쳐낸 검이 하는 것이 맞겠지. 보기 좋구나.

 

인간의 아이와 신이 맺어지는 광경은 또렷하게 새겨진다.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위해 읊는 맹세도, 연약도 전부 기억한다.

 

이 이상은 가까이 가선 안 된다.

이 이상은 장난을 빙자해 가까움을 추구해선 안 된다.

이 이상은 하면 안 될 일이 너무나도 많구나.

 

아아, 참으로 슬프고 아름다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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