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아주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그 얼굴을 보지 않았었더라면 맺지 않았을지도.
한 올 한 올 씨실과 날실이 엮이듯 겹친 시간이 사람에게는 꽤 길어졌을 테다. 어떤 의미로는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물건에 깃든 그들에게 이번 대의 주인의 존재란 무엇인가? 묻는다면 단연코 사랑이라고 말할 것이다. 자신이 깃들 수 있게 해준 존재에 대한 사랑. 사랑이란 감정이 얼마나 넓고 깊은 줄 안다면, 단순한 애정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옷도 마찬가지다. 무늬 없이 단순하게 짜는 경우에도 한 필 너비에 꼬박 사흘 밤낮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옷에 깃든 나날은 꼬박 며칠일까? 글쎄. ‘너’를 생각하며 짜낸 날을 생각하면, 못해도 나흘의 어려운 발걸음을 떼었던 그때부터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그래. 세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으니 그만두는 것이 옳을지도.
어쨌든, 한 필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 옷 짓기였다. ‘너’를 위한 치맛단만 하더라도 이미 꼬박 열 필이 대수일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를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이후로 오직 여기에만 매달렸으니 이미 간 시간, 이미 들은 품은 어지간한 인간의 인내심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순백의 원단 위로 잔무늬를 수놓은 레이스를 얹어 본다. 이 레이스를 올릴지, 저 레이스를 올릴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명색이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날의 의상이거늘 뭐 하나 빠지고 싶지 않은 것이 그의 마음이었다.
고개를 젓는다.
또 다른 레이스 원단을 한 마씩 끊어 와서는 대어 본다.
다시 고개를 젓는다.
어떤 원단이 가장 어울릴까, 수없이 고민하고 요구사항을 원단 시장에 나간 다른 남사에게 전달한다.
시중에 만들어진 레이스란 레이스는 다 덧대어 보고 날 지경이 되어서야 하나를 골라낸다.
하얗게 드리운 드레스 자락 위로 조심스럽게 레이스를 덧대어 본다. 품위있고 묵직하게 떨어지는 모습이 이 본성을 호령하는 ‘너’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야 그는 바늘을 들었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청록빛의 눈동자가 꼼꼼하게 레이스를 덧대어 바느질한다.
조금의 질투도, 조금의 자만도 섞여서는 안 되는 바느질. 자칫 딴생각에 손이 흔들려서 손이라도 찌르면 핏방울이 남을 것이오, 자칫 딴생각에 손이 미끄러지면 바느질 땀을 다시 짜야 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특기임에도 어떤 상념도 섞지 않고 눈앞의 편물에만 온전히 집중했다. 자신의 손으로 피워낸 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한 땀이 열 땀이 되고, 열 땀이 백 땀이 되었다. 천의무봉이라고 했던가? 선녀가 만든 옷에는 꿰맨 자국도 없다지. 이 옷이 완전무결하여 흠이 없다―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만큼의 공력을 온전히 가져다 쏟아놓았다고 할 수는 있었다.
완성된 드레스는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올 정도였다. 드디어 하나를 맺었구나. 그는 조수를 불러 주인의 내방을 청했다. 한 시진 정도 지나서 작업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발걸음. 이 향기. 그리고 이 무게감. 본성의 주인이었다.
무슨 일이야, ―? 이 시간에 나를 다 부르고?
인생의 모든 고민을 날려버린 듯한 탁 트인 표정을 하고 ‘너’가 들어온다. 고민이 있으면 안 되지. 이렇게 사랑스러운,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의 주인공이 될 너인데. 그런 표정을 짓게 했더라면, 내가 제일 먼저 나서서 저 자를 용서하지 않았을 거였단다, 같은 말은 한 숨에 삼켜 버리곤 자신조차 들뜬 듯한,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한 번 입어보지 않겠니?
그는 자신의 몸으로 가리고 있던 의상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조수였던 코테기리 외에는 그 누구도 보여주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맑은 우윳빛의 부드러운 옷감 위로 한 치의 틀어짐도 없는 레이스가 촘촘하게 덮여 있었다. 짜내기 기법을 사용한 등 뒤의 모습도, ‘그’의 의상과 맞춘 붉은 안감도,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우아하고 단정했다.
정말 입어봐도 돼?
그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를 위한 의상인데, 입어봐야지?
고도의 집중을 쏟아내어 옷을 만들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그는 말했다.
옷시중은 제가 들게요.
아니, 내가 직접 드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바꾸어야 할 요소가 있을 지도 모르니.
그러면 분부대로.
코테기리 고우를 ‘그 자’와 함께 내보내놓고, 그는 옆방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는 데 자기가 보고 있으면 불편할 것이 걸려서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옷자락의 사락거리는 소리도 멎었다. 그리고, 주인이 그를 불렀다.
―. 이렇게 입는 거 맞지?
수줍게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우아한 걸음으로 나왔다. 그가 생각했던 모습 그대로의 신부를 보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지, 이것은 ‘그 자’조차도 가질 수 없는 온전한, 첫 검이기에 가질 수 있는 특권일 게 분명했다.
움직이는 데 불편함은 없니?
음…. 없는 것 같아.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새신부가 될 주인의 머리카락을 틀어올렸다. 그리고 등 부분의 끈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겨 매듭을 묶었다. 손길 하나하나, 섬세하지 않은 구석은 없었다.
그의 시선이 조심스레 어깨선을 훑었다. 어떻게 보면, 이 조그마한 어깨에 진 책임이 참으로 무겁게 느껴졌을 텐데.
― 상념은 거기까지 하지.
마음의 소리가 울렸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는 것은 금물이었다. 알고 있었다.
* * *
하객들의 박수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피로연이 시작되고, 신랑과 신부는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짧은 여행을 떠났다. 간만의 휴가, 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또다른 시작과도 같은 봄의 끝자락이었다.
5월의 신부.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인가. 그는 그보다 더 환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그 자’와 팔짱을 끼던 자신의 주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주인이 기념이라며 제작해준 명패를 보았다. ‘사니와 직무대행 겸 가장 명예로운 초기도’.
하하하, 이거야 원….
갑작스럽게 조회 시간에 결혼을 발표할 때만 하더라도 펄펄 뛰고 싶은 심정이었건만, 깔끔하게 모든 집무 환경까지 조성해 주고 여행을 떠나던 주인의 햇살 같은 미소를 생각하니 그것도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 차라리 그 얼굴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런 갈등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행복한 까닭은, 네 탓이겠지.
카센 카네사다는 집무실에 마련된 주인의 자리를 비워놓고 옆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도, 마지막에 돌아올 곳은 자신이라는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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