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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지널 드림주
언제나처럼 똑같은 하루다. 다른 사람보다 출근이 늦으니 그만큼 조금 늦게 일어나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뜻한 물로 녹인 뒤 잠이 덜 깬 눈으로 양치를 하고, 착실하게 옷을 꿰어 입는다. 무섭도록 추운 날씨에 기모 스타킹을 신고, 그 위로 바람이 덜 드는 긴 치마를 입고 블라우스를 챙겨 입는다. 카디건 위로 쨍한 분홍색의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 뒤 책상 위에 널브러진 MP3와 스마트폰을 집어든다. 가방 속에 들어있는 메모지와 다이어리, 필통, 지갑, 파우치를 확인하고 다녀오겠습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할머니에게 들리는 것 같지도 않은 인사를 하고 굽 있는 신발을 신는다. 아아, 오늘도 똑같은 하루야.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며 길을 나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선 버스정류장에 부는 바람이 싸늘했다.
네가 있는 곳에 나도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이루어질 리 없는 헛한 소원을 머릿속으로 되뇐다. 그럴 리 없다. 그럴 수 없다. 테츠로가 있는 세상을 꿈꾸지만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머리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열정이 가득한 그 세계에 함께 숨쉬고 싶다는 생각은 쉬이 꺼지지 않았다. 여행 중 친구들이 무심코 보여주었던 하이큐 애니메이션 속의 세계는 뜨겁게 내 머리를 강타했다. 그 와중에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제멋대로 뻗친 머리를 하고 있던 검은 머리의 테츠로였다. 켄마를 큰 소리로 부르던 장면을 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너에게 치였구나. 어쨌든, 그 뒤로 나는 끊었던 해외 직구도 시작하고 말았다. 악마의 인형부터 열쇠고리, 스트랩, 파일…말하자면 끝이 없었다. 어쨌든, 파김치가 된 몸으로 퇴근하고 나면 책상에 얌전히 앉아 나를 기다려준 테츠로 인형을 끌어안고, 뺨을 부비며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신이 나게 이야기하고는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꼬부랑 일어 원서를 읽으며 다음날을 기다리는 게 일과였다. 오늘 집에 가면 또 테츠가 나오는 부분을 읽을 거야. 핸드폰 고리에 달린 테츠로를 쏙 빼닮은 스트랩을 만지작거리며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버스에 올라탔다.
회사까지는 한 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였다. 좌석 깊숙이 몸을 말아넣고 한참 유행하는 휴대폰 게임의 쌓인 자원을 치워버렸다. 그러고도 한참이 남아 잠을 조금 더 잘까, 했지만 그마저도 내키지 않을 만큼 버스 운전사 아저씨는 무서울 정도로 난폭운전을 해 댔다. 이런 버스에서 한 번 무심코 졸았다가는 큰일이 날지도 몰랐다. 모자란 잠을 보충하려는 마음을 고쳐먹고 인터넷을 켜 테츠로의 이름을 검색했다. 정말이지, 어디 하나 못난 구석이 없는 얼굴을 보다 보니 눈이 피곤했는지 나도 모르게 감겼다.
의식이 깨어나는 것보다 통증을 느끼는 것이 빨랐다. 버스가 급커브를 돌았는지 우당탕, 끼익- 소리와 함께 머리가 어지러웠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반짝이며 테츠로의 얼굴이 보였다.
…나여.
…ㅆ어. 안 깨어나는 것 같은데.
…어나.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지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누나라고 부르는 거 같기도 하고, 눈을 한 번 두 번 깜박일 때마다 망막에 맺히는 화면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형광등이 환하게 밝힌 실내였다. 아까 분명히 버스였는데, 여긴 천국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두 번째로 보인 것은 울긋불긋한 옷들이었다. 버스에 그렇게 사람이 많았나? 그것도 이런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분명히 몇 명 없었는데. 끔벅끔벅 눈을 떴다가 감고, 아픈 것처럼 머리를 짚자 뒤통수에 커다란 손이 느껴졌다. 뭐지, 대체. 현실인지 꿈인지 인식하기도 전에 몸이 붕 들렸다.
“연습 계속하고 있어.”
연습? 계속하고? 있어? 단어들이 뭉개진 덩어리처럼 머릿속을 떠돌았다. 철제문이 거세게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따뜻한 바람이 훅 끼쳐 왔다. 따뜻한? 도대체 내가 어디에 있는 거니, 나는 기겁해선 머리를 쳐들고는 눈을 뜨고 두리번거렸다.
“여기….”
세상에. 착하게 호구처럼 살았던 걸 이제야 보답을 받나봅니다. 만화 속에서만 보았던 그 고등학교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알싸한 스프레이 파스 냄새와 갓 운동하다 나온 남고생의 체취가 물씬 풍겼다.
“네코마 고교야.”
“에?”
“네코마 고등학교라고.”
…? …?? …!????
말 그대로 엄청난 동공지진을 일으키는 나에게 그 고등학생은 굉장히 미심쩍고 수상한 눈치로 나를 훑었다. 대체 우리 체육관에 갑자기 나타나서는 제일 처음 보이는 반응이 이게 뭐냐고. 도대체가 현실로 믿기지 않아 나는 내가 어디에 들려있는 지도 깜박한 채 그의 머리 위로 삐죽삐죽 솟아난 내츄럴 세팅 닭벼슬 헤어스타일을 보고 말았다.
“저기 그러니까, …. 테츠로? 맞아요?”
“네, 맞습니다.”
“쿠로오 테츠로?”
“쿠로오 상 맞아요- 어떻게 알지. 아, 내가 좀 유명하긴 한가?”
테츠로는 모니터 너머에서 익히 보았던 표정을 지었다. 사냥감을 발견한 고양이마냥 하얀 이를 드러내가며 짓는 표정을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정신이 다 혼미해졌다. 나 다시 기절해 버릴래. 최애한테 보여주는 첫 번째 모습이 대체 이게 뭐야!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다녔다. 집에 안 돌아가고 여기에 눌러앉아 사는 건 상관없는데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아니지, 내가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뭐라 설명이라도 했다간 정신병자의 말이라며 병원에 갇히는 건 아닐까, 돌아가는 방법이 있기는 한가, 아니 여기 그냥 남아 있는 게 나을까… 정말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그러는 사이 테츠로는 힘들지도 않은지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학교 보건실로 날 데려가는 것이었다.
“계십니까.”
불행 중 다행인지 네코마의 보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들, 아까 전에 퇴근한다고 하셨었지. 테츠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의상의 인사를 마친 테츠로는 하얀 침대에 나를 앉혀놓고는 약품이 이것저것 늘어서 있는 찬장을 뒤졌다. 뭐가 좋은 건지 이 약통 저 약통을 뒤적였다. 아무래도 머리를 쥐면서 일어났으니까 두통약이 좋을까나? 찬장에 눈높이가 닿아 이것저것 뒤적이는 모습에 심장박동수가 자동으로 치솟았다. 그나저나, 얘는 내가 갑자기 자기네 체육관에 덩그러니 나타났는데 놀라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머리는 안 아파요? 얼굴이 아직 허여멀건한데.”
“아니, 그냥 놀란 것뿐이에요….”
괜스레 주눅이 들어 꼬물락거리는 나에게 테츠로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홱, 몸을 낮추더니 눈높이를 맞추고 빤히 쳐다본다. 저, 저기, 너는 모르겠지만 이쪽은 이미 너를 알고 있고, 충분히 너를 좋아하고 있는 중이란 말이지, 이렇게 얼굴을 들이밀면…!
나 혼자서도 민망해 죽느라 얼굴에 열이 확 몰리는 게 느껴지는데 테츠로는 내가 여태 화면에서 보아왔던 모습들보다 더한 능구렁이처럼 빤히 보다가 씨익, 웃어재꼈다. 이 자식이.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손발이 튀어나가서 얼굴을 눈 밖으로 치워버렸겠지만 테츠로에게는 어림없었다. 무장해제가 되어선 새빨개진 낯빛에 맹한 표정으로 테츠로를 보고 있자니 다시 한 번 반해버릴 것 같았다. 색채가 한정된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현실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당연하지, 최애가 살아 움직이는 것도 좋은데 이렇게 코앞에서 움직인다면 심장 안 떨어지나.
다행히도 심장은 제자리에서 콩콩 뛰고 있었다. 소리가 튀어나갈 만큼 세차게 뛰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겨우 목구멍 아래로 부여잡고 있는데 테츠로는 여전히 그 위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 손을 들어 얼굴을 다 덮어버릴 것 같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열이라도 나요? 큰일이네, 무심하게 읊조리곤 다시 약이 들어 있는 찬장으로 움직였다.
“받아.”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이쪽으로 테츠로가 무언가를 던졌다. 반사적으로 잡고 보니 씹어먹을 수 있게 만들어진 레몬 맛 비타민 사탕이었다. 나이스 캐치. 그거 먹고 잠 좀 자요. 이따가 연습 끝나고 데리러 올게, 말을 한 그는 바깥으로 사라져갔다.
하얀 침대 위에 누워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테츠로가, 말 그대로 입술 내밀면 닿을 거리에 테츠로가 있었다. 모니터 속에서 나를 다시금 반하게 했던 그 표정을 하고 눈을 빛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열기가 올라왔다. 빨리 친구들한테 자랑해야지, 미친년 소리를 들어도 이건 백 번 이백 번 자랑할 일이었다. 신이 나서는 핸드폰을 찾았다. 그리고 생각난 것은 핸드폰이 내 손에 들려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모니터를 넘어오기 전 내 휴대전화는 나와 함께 버스 안을 나뒹굴었다는 것도 그제야 생각이 났다. 맞다, 내 코트. 내 가방.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스프링이 튀어오르듯 일어나 보건실 문을 힘차게 열었다.
“아, 저기….”
“이거, 당신 거죠?”
문을 열자마자 맞닥뜨린 사람이 있었다. 애정이라는 필터링을 빼면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는 테츠로와는 전혀 다른 몸집을 가지고 있는 까만 상의의 소년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내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이름을 알고 있는 밝디밝은 갈색의 짧은 머리카락을 갖고 있는 야쿠. 야쿠의 손에는 내 코트와 가방과, 테츠로 스트랩이 달랑거리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딱히 케이스를 입히지 않은 내 핸드폰의 뒷면이 생각났다. 테츠로의 경기복 모양을 따서 커스터마이징한 것을 야쿠가 보았으니 테츠로도 모를 리 없었다. 오, 젠장. 시시각각 변하는 내 표정을 본 야쿠가 장난스럽게 웃고는 물건들을 내게 안겨주었다. 걱정 말라는 듯이.
다시 침대에 뒹굴면서 이런 상황은 비현실이라면서 상상도 하지 않고 열심히 덕질을 하던 나를 생각하며 허공에 발길질을 했다. 생각해보니 오늘 입고 나온 옷도 검은 스타킹에 빨간색 치마, 검은색 셔츠에 까만 코트 위로 빨간 색 목도리를 둘둘 두른 채였다.
“… 나 수상한 사람이라고 찍히지는 않으려나.”
하-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면서 휴대전화 전원을 켰다. 오늘따라 테츠로 테마로 커스터마이징해버린 과거의 내 자신이 너무나도 밉살스러웠다. 그것도 본인 앞에서 나 네 팬이야, 라고 말도 못하고 어버버, 어버버버… 하는 나는 얼마나 이상했을까. 보건실의 하얀 베개에 얼굴을 몇 번 처박았다. 멍청아, 등신아… 하며.
지잉, 하고 한 번 울던 휴대전화는 다시 꺼져버렸다. 설마 배터리가 없는 건가. 당황해서 가방을 열었더니 충전기도 없었다. 하긴 전혀 다른 세상에 – 모니터 속으로 들어온 주제에 원래 있던 곳과 연락이 된다고 하면 더 이상한 일이었다. 미련 없이 휴대전화를 가방 안에 넣었다. 여기에 얼마나 더 있어야 할까. 보건실 안에는 시계가 없었다. 자리에 누워있자니 자꾸만 테츠로의 얼굴은 생각나고, 아까의 심장 뱉을 것 같은 두근거림도 되살아났다. 빨리 시간이 가버렸으면 좋겠다. 아니,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멀쩡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또다시 네코마들을 볼 마음의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러게 평소에 관리 좀 잘 할 걸, 평소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둘 걸. 아니지,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애초에 없잖아. 마음속 깊이 두 개의 내가 언쟁을 높였다.
저녁밥을 먹을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연습이 끝났는지 체육관 쪽의 불이 하나둘 꺼졌다. 여태 누워 발악을 하던 침대를 정돈하고 계절감이 틀려버린 코트와 목도리를 팔에 들었다. 머리도 다시 정돈하고 일어나 구두 굽 소리를 울리며 복도로 나갔다, 만….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몇 년 만에 밟은 학교 복도라는 미로 안에서 두리번대다가 그냥 보건실로 들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체감 상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십 분이 지나고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테츠보다 조금 더 큰 이국적인 얼굴을 한 리예프가 조심스럽게 서 있었다. 누나, 많이 기다렸어여? 묻는 리예프 뒤로 여러 그림자가 보였다. 테츠들이었다. 간식이라도 같이 먹으러 가자고 손을 내밀어오는 그들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정말 어쩌다 보니 스스럼없이 녹아들었다. 붉은 져지 사이에 끼어 있는 검은색과 붉은색 조합의 옷을 입은 나는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책을 읽기도 힘들어했던 것과는 별개로 길거리에 보이는 간판들도, 네코마 아이들의 말소리도 또렷하게 이해되었다. 거기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들 역시 이상하지 않은 일본어였다. 배가 고픈 건 어쩔 수 없는지 길을 걷다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OVA에서 봤던, 벤치가 길게 배치된 의자였다.
각자 간단한 간식거리를 고르고 값을 치렀다. 일본 여행이라곤 와본 적 없는 내게도 다들 뭘 고르라고 난리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테츠로가 고른 것과 똑같은 것을 집어 계산했다. 가장 좋아하는 그 아이와 맛을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에. 만화 속의 세계나마 함께하는 것을 나누고 싶었으니까.
“아, 맞다. 누나, 누나. 누나 이름은 뭐에여?”
리예프의 물음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맞아, 내 이름 뭐였지. 당연하게 떨어져야 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색하게 웃음만 지었다. 편의점에 줄지어 앉아 간식거리를 까먹고 내일 보자며 다들 하나둘씩 헤어졌다. 어느 쪽을 따라가야 할까. 고민하는 나를 테츠로가 끌어당겼다.
“이 곳 사람 아니지?”
표를 끊는 귓가에 테츠로가 속삭여 물었다. 뜨끔했다.
“그런 휴대전화, 이 근처에는 없어. 당신 옷도….”
대충 동년배로 생각한 건지 켄마가 말을 받았다.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켄마는 내가 불편해한다고 생각한 건지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일단 무작정 켄마를 사이에 두고 걷기 시작했다. PSP를 만지며 능숙하게 장애물들을 피해 걷는 켄마의 모습은 실제로 보니 정말 신기에 가까웠다.
내일 봐. 켄마를 보내고 나니 어색하게 테츠로와 둘만 남았다. 지금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돌아갈 것이 아니라면 잘 곳도 뭣도 없었다. 이래저래 꼬여가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츠로는 그 큰 키로 성큼성큼 걸었다. 그리고 내게는 테츠로를 따라가는 것 말고는 해결책이라는 게 없었다.
대문을 연 테츠로를 따라 고맙습니다, 이야기하고 발을 들이밀었다. 딱히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진 않았다. 마침 부모님이 여행을 가셔서, 라고 말하며 테츠로는 제 방 옆의 문을 열어주었다. 청소는 매일 하니까 며칠 지낼 만은 할 거예요.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며 방에 들어와 짐을 내려놓자니 평소에도 손님이 가끔 들르는 방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하지, 또다시 현실적인 고민이 덮쳐 와 멍하니 있으려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해 보니까 갈아입을 것도 없겠다 싶어서.”
“고마워.”
척 봐도 제 어릴 적 옷(?)으로 보이는 것들을 몇 개 쥐어준 테츠로는 밖으로 나갔다. 귀를 기울이니 부스럭부스럭 주방 쪽에서 소리가 났다. 밥은 제대로 해먹는구나, 역시 내 완벽한 최애였다. 대강 갈아입고 나오니 소리가 났는지 이쪽을 향해 돌아보곤 찡긋 눈웃음을 짓는다. 야, 너 진짜…. 삐죽 솟은 머리카락 아래로 뻗은 몸은 아까 전 어렴풋이 보았던 것보다 훨씬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모니터 속으로만 보던 것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절로 군침이 넘어갔다. 거기다 테츠로 건너편에서 나는 허기를 달래줄 음식 냄새까지, 너무나도 완벽했다.
솜씨 좋게 하얀 밥을 그릇에 담고, 몇 가지 찬을 나누어 담은 테츠로는 내 앞에 젓가락을 놓아주었다. 내가 해도 되는데, 라고 말하고 엉거주춤 일어섰지만- 그는 어쨌든 내게 손님이라며 어깨를 꾹 눌렀다.
돌아가게 되면 눈물이 날 것 같다. 네가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줄 줄은 몰랐다. 너의 상냥함은 내가 살던 곳에서도 마주하기 힘든 종류였다. 기분이 좋아져 노곤거리는 얼굴로 보았다.
* * * * *
충분히 이상한 일이었다. 이 근방에서 본 적 없는 옷차림으로 – 그것도 한겨울의 옷차림을 하고 쓰러져 있었다. 대체 뭐야. 우리들은 누구라도 할 것 없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모여들었다. 손에 쥐어진 처음 보는 휴대전화에 대롱대롱 나를 닮은 자그마한 핸드폰 고리가 매달려 있었다. 배구 팬인가, 이 사람…. 어쨌든 머리도 아파하는 것 같고 정신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아 데리고 있는 것보다는 보건실로 보내는 것이 나을 듯싶어 연습을 계속하라고 일러둔 후 보건실로 향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할 말이 많아 보이긴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기는 할는지. 선생님이 계시지 않은 보건실의 약통을 하나하나 뒤지며 생각을 해 봤지만 머리만 아파질 뿐이었다. 그냥 되는 대로 몇 마디 말을 나누곤 눈높이를 맞추려 몸을 낮췄다. 갑작스레 눈동자가 커져선 새빨간 얼굴을 하는 게 꽤 귀여웠다. 고등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 탐색하듯 바라보다가 내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왠지 모르게 키스해버릴 것 같았거든.
몸을 일으켜선 찬장에 눈여겨봐 두었던 비타민 사탕을 꺼내 던졌다.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하면서도 자신에게 날아오는 물건을 잘 받아드는 그 여자가 꽤 귀엽다고 생각됐다. 그래도 귀 끝이 덥게 느껴지는 것은 계절 탓이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나이스 캐치. 그거 먹고 잠 좀 자요. 이따가 연습 끝나고 데리러 올게.”
체육관에 돌아오니 생각난 것이 있었다. 아까 몸만 데려다 주느라 코트라든지, 휴대전화라든지, 가방은 전혀 생각 밖에 있었다. 아, 맞다…. 아차하는 심정으로 보고 있는 나를 코트로 떠민 야쿠가 짐들을 들고 보건실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연습은 시작되었다.
연습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할 때쯤 체육관을 정리하고, 하나둘 씻고 돌아갈 준비를 했다. 보건실에 데리러 가기로 한 사람은 나인데 리예프는 겅중겅중 뛰어 나보다 앞서갔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거냐고 태클을 걸려다가 말았다.
편의점에서는 머뭇거리다 나와 같은 것을 집어들었다. 이름이 뭐냐고 묻는 리예프의 말에 그녀는 답을 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그는 여기에 살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했다. 부모님이 여행을 가셔서 당분간 내 집은 비어 있다. 손님용 방이 있으니 일단 거기서 재우고 방법을 생각해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일단 집에 데리고는 왔는데 갈아입을 옷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도 이제 모르겠다. 그냥 재작년 즈음 입었다가 정리하지 않은 내 옷을 내밀어 놓고는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와 요리를 시작했다. 이거야 뭐…. 반말과 존댓말이 계속 번갈아서 나가질 않나, 쓸데없이 신경이 쓰이질 않나. 귀찮지는 않지만 자꾸 신경이 쓰였다. 켄마를 보다 보니 이렇게 된 건가 – 라는 생각이 들 무렵에야 저녁 식사 준비가 끝이 났다. 잘 모르면서 돕겠다고 일어서는 걸 꾹 눌러 앉혀버렸더니 동그란 눈에 눈물을 글썽인다. 이봐, 거기서 울면 쿠로오 씨 놀랍니다.
어쨌든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부모님께 자세히는 얼굴을 뵈며 말씀드리기로 하고, 간단히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손님방을 며칠 써야 할 것 같다, 고 허락을 받았다. 몇 살이냐 물었더니 스물이 꽤 넘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몇 살 차이도 안 나는데 굳이 말을 하지 않았다.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자신이 원래 있었던 곳에 연재 중인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 중 하나라는 믿기 힘든 – 그냥 현실에 이 여자가 나타난 것부터가 되도 않는 소리지만 –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나를 닮은 인형들이나 휴대폰에 달린 고무 장식 같은 것도 꽤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다고 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안다는 것이 참 묘한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저 누님이 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기분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 * * * *
이쪽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은 없고, 돌아갈 방법도 모르기에 단기 아르바이트를 몇 개 구했다. 여행에서 테츠로의 부모님과도 어찌저찌 납득할 만큼 이야기를 나누었고, 여기 눌러앉아 있는 동안만큼의 밥값 정도는 할 수 있기를 바랐다. 테츠로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이 밥이나 축내는 식충이라든지, 쓸모없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는 것은 싫었다. 딱히 자격이 필요하지 않은 편의점에서 일을 했다. 일이 끝날 때쯤이면 네코마 배구부의 연습이 시작되는 때였다. 딱히 일이 끝나도 할 것이 없는 나는 틈나는 대로 테츠로의 연습을 보며 애니메이션을 통해 보았던 매니저들의 일을 도왔다. 딱히 매니저가 없는 네코마인지라 부원들이 나누어서 하던 기록들을 도와주니 그들도 기뻐하는 것 같았다. 즐거웠다.
두어 주쯤을 그렇게 보내니 그들과의 거리가 훨씬 좁혀져 있었다. 매일 귀가를 함께 하는 테츠로와도 물론이고 켄마도 이쪽이 그리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켄마가 하고 있는 게임의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절반 즈음은 친구를 통해서 알음알음 아는 것들이라 더 친근하게 느껴져서 자꾸만 말을 건 것도 있었다. 야쿠와 리예프와도, 카이와도, 후쿠나가와도, 이누오카와 시바야마와도…. 편의점에 가면 이제는 스스럼없이 고를 수 있을 만큼 적응하고 있었다. 돌아가야 할 집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함께 아침을 먹고 거리에 나서서 테츠로는 학교로,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다.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이변이 없으면 체육관에서 그는 연습을 하고, 나는 매니저처럼 그들을 돕는다. 함께 집에 돌아오고, 저녁을 먹고 잘 자라고 인사한다. 가장 좋아하는 이와 함께하는 하루는 더없이 행복했다.
돌아가는 것보다 이대로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오늘도 잘 있었지?”
“당연히. 누나는 어땠어. 누가 치근덕거리진 않아?”
“누가 그런다고 그래. 그럴 사람 없어.”
“과연.”
켄마와 헤어지고 나서 테츠로는 언제나처럼 내 안부를 물었다. 누가 이상한 짓을 하려 들지는 않았냐는 둥. 오늘 일은 어땠냐는 둥. 오늘 도시락은 뭘 먹었고(다 아는 이야기였지만) 켄마가 오늘도 간단하게 먹으려고 해서 잡아다가 먹었다는 둥. 화면 너머에서는 결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행복했다. 테츠로는 내게 물었다. 다음 번 주말에 괜찮다면 잠시 어디 나가지 않겠냐고. 당연히 괜찮다고 했다. 그와 무언가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내겐 축복이었다. 다른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다른 약속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선약을 취소해 가며 테츠로와의 약속을 나갔을 것이다.
또 한 주가 그렇게 흘러갔다. 고등학교를 제대로 다녀 본 적이 없기에 테츠로의 이야기는 신선하기만 했다. 즐겁기만 했다. 매일이 같은 일상이지만 테츠로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생활은 한껏 달라져 있었다. 모니터 바깥에서 보앗던 테츠로와는 이런저런 모습들이 달랐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울 따름이었다.
약속의 날이 되어서도 특별히 꾸밀 것이 없었다. 어느 정도 생활비도 내고, 내가 필요한 것을 산다 하더라도 전에 살았던 곳에서처럼 옷도 화장품도, 신발도, 취미생활에 돈을 전부 쓸 수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라고 바깥에서 말하는 테츠로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거울 앞에서 몇 번을 고민했다. 이 옷을 입는 게 더 어울릴까, 이쪽이 더 어울릴까. 어느 쪽도 테츠로가 알고 있는 옷이었지만, 처음 하는 외출이니까 좀 더 예쁜 모습을 보이고 싶다고 한다면 욕심은 아닐지도 몰랐다.
“…뭐 해?”
그렇다고 문을 열고 들어올 건 없잖아. 고민하면서 이 옷 저 옷 대보는 내 귀를 의심한 것은 벌컥, 문 여는 소리였다. 일 초가 하루처럼 느껴졌다. 당장 나가! 도 아니고 더듬더듬 테츠로, 나가야지…? 묻는 나를 보며 테츠로도 당황한 것 같았다.
“미안.”
“아냐….”
어색하게 방문 하나를 두고 돌아왔다. 죽고 싶었다. 다이어트 제대로 할 걸… 하는 후회가 들며 조금 전 테츠로가 입고 있었던 검은 색 티셔츠와 비슷한 색의 반팔을 걸쳤다. 혹시라도 이상한 곳이 없는지 거울 앞에서 다시 한 번 내 옷차림을 확인하곤 방문을 열었다. 방문 옆에 대충 기대 선 테츠로의 귀 끝이 빨갰다. 내가 미안한 짓을 해 버렸구나, 싶어 괜찮다고 몇 번을 반복해서 말했다.
“그만 해도 돼.”
테츠로는 나를 미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괜스레 내 얼굴도 붉어졌다.
데이트라면 데이트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인지도 몰랐다. 같이 사는 주제에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냐고 물어도 백 번 데이트라고 대답할 것이다. 현실에서는 설레기는커녕 시간조차 내고 싶지 않았던 행동들이 단지 함께하는 사람이 테츠로인 것 때문에 의미가 살아나고 있었다.
걸려 있는 영화들이 뭐가 뭔 줄도 모르고 일단 테츠로가 보고 싶다는 영화를 무작정 따라 보았다. 스릴러였다. …토하는 줄 알고 고개를 돌리는데 테츠로가 눈을 가려주었다.
테츠로는 얼굴이 새하얘진 내게서 가방을 빼앗아들고는 공원으로 데려가 등을 토닥여주면서 연신 사과했다. 설마하니 그런 내용이 등장하는 스릴러였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며.
영화가 너무 사실적이어서 헛구역질이 나는 바람에 우리는 저녁까지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저 가게에 옷 예쁘네, 이 운동화 테츠로한테 잘 어울리겠다, 누나 이 귀걸이는 어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서로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하나씩 했다. 나는 테츠에게 내 지갑이 허락하는 한에서 가장 좋은 향수를 선물했다. 혹여나 내가 더 이상 여기에 있지 못하고 내가 왔던 곳으로 떠난다 하더라도 나를 언제나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테츠가 고른 선물은 빨간색의 작은 보석이 반짝이는 예쁜 머리핀이었다. 이것저것 고르며 시간을 보내고, 속이 괜찮아지자 테츠로는 내 팔을 잡아끌고 망설임 없이 식당으로 들어갔다.
원래 살던 곳에서는 이런저런 기념일에 비싸고 좋은 레스토랑을 굳이 찾아가곤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아 내가 나쁜 걸까, 수없이 생각했었다. 하지만 테츠로와 찾아간 스시 가게는 그렇게까지 번지르르하게 겉모습에 공을 들이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단지 그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수없이 나를 설레게 했다. 테이블에 마주앉은 눈에 들어오는 모습은 평소와 굉장히 다르게 느껴졌다. 얼마 전, 모니터를 넘어오기 전까지는 청불조라고 이름을 붙여 가며 부르긴 했지만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에 양심이 콕콕 찔리곤 했다. 여기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보다 삼십오 센티미터 위에 자리한 눈높이 때문에 긴장하게 되기는 하지만 어쨌든 고등학생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다만, 지금만큼은. 약속 장소에 나와 함께 마주하고 앉아있는 순간만큼은 다르게 보였다. 몇 살 나는 나이 차이 따위는 아무렇지 않았다. 한참 먼저 성인의 문턱을 넘어선 나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쪽을 보고 별 꿍꿍이 없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테츠로의 모습이 그저 좋을 뿐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두 손을 모아 음식에 대한 감사를 전한 우리들은 먹기 시작했다. 담백하고 맛있었다. 이전에 거리에서 사먹어 보았던 음식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깔끔한 맛에 한 번, 속도를 맞추며 맛있게 먹는 테츠로에 두 번 반해버리고 말았다. 아까 계산하고 내 머리에 예쁘게 꽂아 준 머리핀의 무게에 자꾸 신경이 곤두섰다. 이러다가 나, 테츠로도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해버릴까 두려워. 지금도 이곳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올까봐 두려운데 착각을 하고 나면 더욱 더 아플 것 같아 두려워….
“웃어.”
웃는 게 더 좋아. 두근거리는 심장에 오해할 만한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테츠로의 심정이 궁금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도 제 손으로 끝낸 테츠는 내가 지갑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데이트는 내가 신청했는데 여기서 누나가 지갑을 꺼내면 내가 뭐가 되냐고. 해는 뉘엿뉘엿 져 가고 있었고,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을 놓치면 내가 오늘 뭐라도 해주는 게 없을 것 같아 입가심을 하자고 테츠로를 끌고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캔커피 하나, 요구르트 하나에 일하며 눈여겨보았던 작은 초콜릿을 하나 더 샀다. 그러곤 테츠로의 손에 쥐어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지하철은 북적였다.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고는 사람들과 내 사이에 벽을 드리운 테츠로가 그렇게 듬직할 수 없었다. 등 뒤로는 벽이 닿았고, 나와 사람들 사이에 버티어 서 허튼 짓을 하는 사람이 시도도 못하게 막아주는 그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코앞에 다가서 있는 테츠로의 옷 속에서 희미하게 아까 골랐던 향수의 냄새가 났다. 코끝을 스치는 향기는 매장에서 맡았던 것보다 짙고, 테츠로에게 잘 어울렸다. 선로 위를 따라 달리던 열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테츠로가 멀어지다가 다가오다 또 멀어졌다. 몇 분 정도 지나 사람들이 빠지자 테츠로는 내 옆으로 와서 섰다. 정수리 위로 우뚝 솟은 어깨에 안정감이 느껴졌다.
“누나.”
“응?”
“들어가기 전에 잠깐 공원 좀 들를까.”
“그러자.”
몇 개의 역을 더 지나쳐 지하철에서 내렸다. 역과 집의 중간에 있는 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테츠로는 내가 그 발걸음을 따라가려면 한참을 뛰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자리에 멈췄다. 나이는 먹으면서 키는 왜 안 컸어, 놀리는 테츠로에게 차마 새벽까지 안 자느라, 라고 말하기 민망했다. 뭘 하면서 안 잤냐고 묻는다면 (만화)책을 읽고 노래를 찾아 듣느라, 가끔은 게임하느라… 그랬다고 답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말을 하면 테츠로는 배로 놀릴 게 뻔했다.
무슨 일일까, 테츠로가 굳이 공원까지 가서 하자는 말이라면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들을 이것저것 밀고 당겨 보아도 짐작이 가는 것이 없어 답답했다. 사생활 같은 것들을 지켜 주시는 분들이지만 부모님의 귀에 어쨌든 들어가고 싶지 않아할 만한, 따로 공원으로 불러내서 할 만한 이야기가 무엇이 있을까. 선택지를 줄여 보려 갖은 애를 쓰지만 생각나는 것이 딱히 없었다.
학교라면 어떨까. 학교에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인적 드문 곳에서 할 만한 이야기. 전학을 간다는 이야기일까. 하지만 굳이 이사를 갈 것 같지는 않았다. 짐을 싸지도 않았고, 멀리 갈 이유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테츠로는 가장 빛나는, 고등학교 3학년을 보내고 있었다. 전학을 갈 리 만무했다. 학교, 공부, 고민… 모든 것들을 다 조합해 보았지만 딱히 짚이는 바가 없는지라 안개 속에서 헤매며 테츠로의 뒤를 따랐다.
공원은 의외로 넓은 편이었다. 작은 호수와 그 둘레를 따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산책로를 따라 우리는 걸었다. 테츠로가 한 발짝 앞에서 아까보다 느린 걸음으로 앞서갔다. 밤의 공기는 맑았다. 계절의 향기가 코끝에서 맡아졌다. 공기는 선선했다. 그 아이와 함께이기에 심장이 뛰었다.
단지 모니터 속의 캐릭터로서의 네가 아니라 현실을 살고 있는 네가 좋았다.
숨을 쉬면 숨을 쉴 때마다 소리가 튀어나오는 것처럼 네가 좋았다.
다만 내가 두려운 것은 내가 언제 이곳에서 떠나야 할지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때맞춰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옅은 향기가 끼쳐왔다.
테츠로가 있는 방향에서, 내가 있는 방향으로.
타인의 향기는 그토록 향긋했다.
‘네가 좋아.’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앞에 걸어나가는 테츠로의 등이 너무나도 든든해 보였다. 그래, 어떤 경위로 내가 이곳에 떨어졌든, 다시는 내가 원래 살았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 만큼 테츠로가 마음을 가득 채워버렸다. 그가, 내 앞에 선 그가 사냥감을 노리는 검은 고양이라면 나는 기꺼이 조그만 쥐가 되어도 좋았다. 그가 영원히 타오르는 태양이라면 나는 무모하게도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이카로스일 것이다.
하나, 둘, 셋.
아찔하게 잠겨드는 심장의 두근거림에 눈을 감고 셋을 세었다. 하나씩 숫자를 셀 때마다 후각을 자극하는 향기가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묵직하게 감겨드는 발소리가 멈췄다. 한껏 민감해진 감각들이 눈을 뜨면 코앞에 테츠로가 또 있을 것이라고 소리를 높여 외치고 있었다. 더없이 길게 느껴지는 정적 끝에 눈을 뜨고 싶었다.
“뜨지 마.”
테츠로의 목소리는 아주 지근거리에서 들렸다. 숨결 하나, 말을 꺼내기 위해 움직이는 입술 한 끝 한 끝이 전부 느껴졌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꺼내놓는 명령조의 말에 나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이마 위로 보드라운 것이 내려앉았다 사라졌다. 따뜻하고, 무엇보다 보드라운 것. …따뜻하고 보드라운 것? 놀라서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뜨자 역시나 위쪽에서 뜨겁기까지 한 숨과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뜨지 말라니까.”
“…?”
“하여간, 누가 고양이 아니랄까봐 말을 안 들어요.”
“뭐?”
“그렇게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으면.”
맞닿을 것처럼 가까이 그의 얼굴이 있었다.
“키스하고 싶어진다고.”
귀를 의심하는 말들만 줄줄 늘어놓는 테츠로 탓에 사고 회로가 하나둘씩 삐걱대기 시작했다. 언제인지 모르게 테츠로는 내 어깨를 그 커다란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뜨겁고 단단했다. 눈높이를 맞춰 주려 굽힌 상냥함에 감사했다. 어쩌면 내가 여태 해 왔던 고민들을 테츠로도 해왔던 것은 아닐까 하는 작은 희망이 들었다. 언제 돌아가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마음만 죽이고 있던 나와는 다르게 한 걸음을 내딛은 테츠로가 오늘따라 더 크게 보였다.
입 속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그저 두근거리는 심장이 튀어나가지 않도록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 보건실에서 눈빛이 마주쳤던 그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순간, 테츠로의 노란 색 도는 눈동자만큼은 더없이 진지했다. 장난을 치는 것 같은 능글맞은 표정도 없었다. 그저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는, 꿰뚫을 듯 바라보는 시선에 목이 타는 것 같았다.
“네가 좋아.”
군더더기라고는 없는 깔끔한 고백이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머리가 외쳤지만 몸과 마음이 먼저 반응했다. 더 이상 굴러가지 않고 고장이 난 머리는 아무것도 제어할 수 없었다.
“테츠!”
“오야오야, 무리해서 빨리 온 건 아니지?”
“다 끝내고 천천히 왔어. 걱정하지 마.”
“넘어지면 쿠로오 씨 맘 상할 거야.”
“걱정하지 마. 테츠는 다친 데 없지?”
일이 끝나고 전처럼 네코마의 체육관으로 향했다. 내가 온 것을 확인하자마자 테츠는 벙긋벙긋 웃으며 팔을 벌렸다. 공원에서의 그 시간 뒤, 테츠는 집으로 돌아오며 말했다.
알고 있었다고. 처음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자신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던 게 자꾸만 신경이 쓰여 견딜 수 없었다고. 보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자꾸만 눈에 들어와서 볼 수밖에 없었다고 마음을 전했다.
돌아갈 때 돌아가서 헤어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때 가서 후회하고 싶진 않았다는 말을 했다. 테츠의 마음이 언제 열린 것인 줄은 모르지만 함께할 수 있는 만큼은 함께하기로 했다.
* * * * *
몇 달이 흘렀다. 테츠가 대회에 나서는 것도 지켜보았다. 매번 관중석에서 응원하는 것이 다이지만 마치 경기장에 함께 서 있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한 점 한 점, 착실하게 이으며 쌓아나가는 점수들이 모일 때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몇 년 만의 졸업식인지 몰랐다. 귀찮음을 핑계로 대학교 졸업식도 가지 않았던 내게 이 졸업식은 더욱 특별했다. 이곳에 온 내게 가장 든든한 어깨를 내어준 테츠에게 누구보다 고마움을 가득 전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졸업장을 받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여느 때만큼이나 즐거워 보였다.
“테츠!”
이름을 부르자마자 이쪽을 돌아보곤 양 팔을 벌린다. 예전과 같은 높은 구두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테츠에게 달려간다. 커다란 꽃다발 채로 안길 수 있는 너른 품에서는 예전에 선물했던 향수와 체취가 섞여 행복함이 감돌았다. 예쁜 꽃들로 단장한 꽃다발을 네게 선물하고, 테츠는 내게 교복의 두 번째 단추를 떼어 주었다. 무슨 의미냐고 갸웃거리는 내게 테츠는 그저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 모습마저도 더없이 사랑스러워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돌아갈 순간 따위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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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인데 여기에 일이 하나가 더 늘었다보니 연성할 짬도, 연성할 체력도 되지 않네요 ... 허허허. 합작 남은 거랑 리퀘는 조만간 상태가 좋아지는 대로 잡아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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