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있나요. 잊히던가요. 그저 웃게 되던가요. 혹은 그저 울게 되던가요.

 

그 순간의 절망감을, 그 나날들의 공허감을 자신 혼자만이 아는 것이라는 자만은 하지 않음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무기력감이 온 몸을 덮친다는 것. 세상은 하얗게도 보이다가, 그저 검다가, 색채 빠진 밋밋한 회색이 되어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알 것이다. 그 경험은 무엇보다 지독하다. 그 무엇보다도 농도 짙은 늪이며, 떨쳐낼 수 없는 무게추가 되는 것이다.

 

경험이 없는 이들만이 쉬이 말한다. 시간이 약이라고. 지금의 아픔은 잠시일 뿐이니 너는 네 인생을 즐기라고. 그마저도 알고 있었다. 뼈저리게 알고 있다. 느끼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물을 마시려다 컵을 놓쳐 깨었다. 흩어진 조각들을 보다 주저앉는다. 쓸린 몸에서, 이곳저곳에서 피가 배어나오지만 통각은 이미 잠들었다. 맨손으로 유리조각을 담는다. 갈증조차 느껴지지 않아 주저앉았다. 오늘은 또 며칠이나 갈까.

 

겨울이 지나면 해가 바뀐다. 돌아가야 했다. 마치지 않은 것이 왔다. 어차피 똑같을 것을. 돌아가거들랑 새로운 반, 새로운 사람들, 변하지 않는 자신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되었는지, 세지 않아 몰랐다. 자신은 그대로였다. 자그마치 5년을, 6년을 바라보는 감정의 톱니바퀴는 언제쯤 멈출까. 시간은 느리게 흐린다. 아니, 점차 느려져 간다. 아무리 몰입해도 한 시간이 지나지 않는다. 앞을 보다가 떠오르는 것은 단순히도 그의 미소뿐이었다.

 

그와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생겨나지 않았을까요.

 

혼란스럽다. 애정한다. 후회한다. 좋아한다. 그리워한다. 원망한다. 슬프다. 만나고 싶다. 만나러 갈까. 나빴다. 아니, 내가 나쁘다. 당신은 그저 가만히 있는데 이런 마음을 먹는 내가 나쁘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행복하길 바란다. 나는 이렇게 살아가지만, 당신은 그곳에서나마.

 

수도 없이 쏟아지는 감정들은 소용돌이여서 뇌를 쥐고 흔든다. 벗어나고자 하지도 않는다. 의미 없는 몸부림이었다. 그렇게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달도 별도 잠든 시간에 단 하나 바라는 구원이라고는 당신과 만나는 삶. 무겁게 가라앉은 잉크를 찍어 매일 마지막 편지를 쓰듯 깨어 있었다.

 

옆집의 불은 매일같이 켜져 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때로 이른 새벽까지.

 

커다란 창문을 나란히 맞댄 건너편의 집에는 누군가가 살았다.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둔 이가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웃에 별 관심이 없다가도 쿠로오는 저 방에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고민했다. 언제나 두꺼운 커튼으로 방 안을 가리고 있는 집이었다. 커튼 사이로 비쳐 나오는 불빛만이 반짝였다. 어린 켄마의 손을 잡고 나가 배구를 하고 돌아올 때도 하얀 불빛만이 바깥으로 새어나왔다. 흔한 그림자 하나도 지지 않는 창을 보며 누굴까, 쿠로오는 제멋대로 상상했다 지워냈다. 무례라면 이만한 무례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열 살 즈음부터 보았던 불빛은 고등학교 삼학년이 될 겨울에도 여전했다. 연습이 끝나고, 켄마를 들여보내고 집에 오는 길, 희끄무레한 옅은 불빛만이 흘러나오는 커튼 안에 그림자가 비쳤다. 쨍그랑. 이내 물건 깨지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꺼져. 꺼지라고, 그어버릴 거야, 다가오지 마. 악에 받친 소프라노 톤의 절규가 두꺼운 천 사이로 새어나왔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직감에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옆집 초인종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짜증 섞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

누구시냐니까요?
죄송합니다. 집을 착각했습니다.

 

그걸로 충분했다. 뭔지 몰라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방학이 끝나고 잠들었던 봄꽃들도 하나둘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올해는 해내고 싶은 것을 해내자, 라는 마음으로 나서는 등굣길엔 잠들지 않은 별들이 말간 하늘에 떠 있었다. 지난 밤 귀곡성과 같은 울음소리를 들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차게 식은 공기는 들이마시기 좋았다.

 

오야?

 

쿠로오는 어떤 광경을 보고 발을 멈췄다. 딱히 그의 생활 반경 내에 본 적 없는 여학생 하나가 제 학교의 교복을 입고 앞서가고 있었다. 학교에서는커녕 동네에서도 본 적 없는 뒷모습은 왜소했다. 말만 걸어도 입김에 날려 쓰러질 것 같은 형상을 하고는 온 몸이 그림자에 녹아든 것처럼 걷고 있었다. 등 뒤로 맨 가방이 지나치게 무거워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에는 별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바람이 불면 사라질 것 같은 모양으로 걸었다. 위태로운 느낌에 쿠로오는 옆에 선 켄마를 챙기면서도 앞의 여학생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우연과 우연이 겹치고, 또 다시 우연으로 만들어진,

결말이 빤히 보이는 것을 삼류 소설이라고 한다면

자신 역시 삼류 소설의 속의 인물일 따름이었다.

 

등골이 바짝 서는 느낌에 쿠로오는 두어 발짝 앞서 가는 여학생의 어깨를 세게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토록 힘이 없이, 나무토막처럼 끌려오는 몸은 차가웠다. 그리고 눈앞으로 쌩하니 오토바이가 한 대 지나갔다.

 

삶이 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행동임에도 여학생은 덜컥 짜증을 냈다는 점이었다. 차갑게 식은 종잇장 같은 손으로 힘도 없으면서 제 손을 덜컥 쳐내고 도망치듯 가는 것을 쿠로오는 지켜볼 뿐이었다.

 

지하철의 같은 칸에 타고도 불편함은 계속되었다. 켄마를 2학년 교실에 우선 데려다 놓고, 제 짐을 책상 위에 던져놓고 쿠로오는 부실로 향했다. 부 홍보도 홍보지만 연습이 우선이었다.

 

땀을 흘리고, 샤워를 마치고 돌아오니 책상 위에 작은 카드가 놓여 있었다.

 

[ごめんなさい。]

 

약하게 이어지는, 미묘하게 떨리는 글씨체에는 단 한 마디밖에 없었다. 딱히 누구에게 사과받을 일을 당했던가? 쿠로오의 머릿속에는 아침의 그 여학생 말고는 따로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종이 치고, 조례 시간에 담임은 웬 여학생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아까의 그 여학생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피한, 제멋대로 자란 검은 머리의 여학생. 손이라도 닿으면 그대로 부서질 것 같은, 가냘픈 인형 같은 여학생이었다.

 

(-). 잘 부탁해.


몸을 책상에 파묻고 잠시 쉬던 쿠로오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어버릴 거야.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 초인종을 눌러보곤 잊어버렸던 겨울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교실 맨 뒷자리, 비어 있는 책상 한 개. 쿠로오의 옆 라인이었다.

 

일단 저기 앉고, 불편하면 이야기해 주겠니? 앞자리로 옮길 수 있도록 할게.

괜찮습니다.

그래. 잘 부탁한다.


담임교사의 말에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조용히 움직인 여학생은 너무나도 고요하게 자리에 앉았다. 마치 눈을 돌렸다가 다시 바라보면 투명하게 사라져 있을 요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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