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당번은 카네상이랑 호리가 맡아줄래요? 1부대는 출진 중이고, 2, 3, 4부대는 원정을 갔고-

 

사니와는 보일 듯 말 듯한 눈짓을 호리카와에게 건넸다. 갑주 없이 가벼운 옷을 입고 마굿간으로 향하는 두 사람에게 잘 다녀와, 라고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는 다음 지명을 기다리는 남사들을 바라보았다.

 

대련은 자유롭게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러면 오늘 밭 당번은-

 

휘이, 돌아보는 눈짓에 움찔하는 카슈와 눈을 반짝이는 몇몇 도검을 지나친 사니와의 눈이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어 있는 오오쿠리카라에게 가서 닿았다. 눈빛이 반짝, 하고 짧게 빛났다가 평소의 무표정함으로 돌아간 사니와의 얼굴을 본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는 어깨를 으쓱, 하며 제 방으로 돌아갔다. 옷을 갈아입으러 간 것이었다.

 

부탁할게요, 쿠리카라.

 

지명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그는 못 들은 척 작게 한숨을 쉬며 제게 배정되어 있던 방을 향해 갔다.

 

*

 

혼마루의 텃밭에는 여러 작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식료품의 양도 상당했지만 여러 종류의 채소들은 직접 길러 사용하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게 영글어 있는 과일도, 언제나처럼 싱싱하게 자라 있는 야채들도 그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옆구리에 낀 바구니에 이런저런 연장을 들고는 밭에 나온 쿠리카라를 반기는 것은 여느 때와 같이 착 달라붙는 운동복을 입은 미츠타다였다.

 

쓸데없는 짓을

미츠타다의 환영을 받으며 그는 사니와를 떠올렸다. 그가 당번일을 할 때면 언제 어디서든 미츠타다와 조를 이루게 하는, 그러면서 놀라운 영감과는 절대 한 조에 편성하지 않는 작은 배려. 그의 별 관심 없다는 태도에도 사니와는 한결같이 소소한 배려를 멈추지 않았다.

 

쇼쿠, 카라-

 

보통 내번 일을 맡긴 사니와는 제 업무를 끝내고, 근시와 함께 임무를 떠난 이들에게 건넬 간식을 만들곤 했다. 근시를 맡고 있으면 늘상 보는 모습이었다. 간혹 체력이 허락하는 때에나 겨우 세탁물을 정리한다거나 하던 모습을 보여주던 사니와, 키노우의 목소리가 들려올 줄 상상도 못했던 그는 아주 잠시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서류만 작성하는 데에도 체력이 달려 골골거리던 그녀였으니까.

 

무슨 일이지?

 

어디서 가져온 건지 평소의 드레스 대신 가벼운 운동복을 입고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등장한 사니와의 모습에 미츠타다마저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심지어 평소에는 잘 보이지도 않던 웃음까지 머금고 있었다. 내가 아는 키노우가 아닌 모양인데. 오오쿠리카라는 고개를 돌려서는 텃밭의 저쪽 구석으로 향했다. 귀까지 붉어진 느낌이 들었다. 알아챌 리 없는데도 저 쪽으로는 부러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 홀로 싸우다 홀로 죽으니, 홀로 일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었다.

 

텃밭 가에 작게 조성된 과수원에서는 사과도, 배도 달게 열려서는 제 색을 뽐내고 있었다. 발갛게 물든 사과와 노랗게 익은 단단한 배를 몇 개 바구니에 담은 사니와는 그새 자란 잡초를 섞어내는 미츠타다에게 다가가서는 이런저런 설명을 듣더니 밭의 다른 구석으로 향했다.

 

.

 

잡초를 뽑으려고 하면서 맨손으로 가는 녀석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제대로 하고 있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가 맨손으로 풀에 손을 솎아내려 쪼그려 앉은 사니와를 본 오오쿠리카라는 쓰게 혀를 차고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이.

 

한참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약간 움츠러든 사니와의 앞에서 그는 장갑을 벗어 건넸다.

 

써라.

 

맨손으로 일을 하게 된 오오쿠리카라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을 담뿍 담아 고마워요, 웃음 짓는 사니와가 오늘따라 유달리 어여뻐 보였다. 못 보던 모습을 오늘따라 많이 보이는데. 오오쿠리카라는 슬쩍 인상을 누그러뜨리며 가을날답게 높아진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

 짧습니다.

그것은 마치 태풍의 눈과도 같았다. 아니, 눈의 벽이라고 해야 옳을까. 눈이 시리도록 서슬 퍼런 푸른빛과 불길한 보랏빛을 내는 것들이 거점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는 분명 어떠어떠한 적이, 이렇게 나오던 곳이라고 들었는데, 당황한 사니와에게 콘노스케가 나타나 검비위사에 대해서 짧은 설명을 해주고는 사라졌다. 전투태세에 들어섰지만 상대방에게서는 일반의 역사수정주의자들과는 격이 다른 분위기가 일었다. 고요하되 맞부딪치면 커다란 폭풍이 불어닥칠 것 같은 긴장감에 사니와는 마른침을 삼켰다.

 

겁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함께 같은 병실을 썼던 적이 있는 다른 사니와와 함께 했던 시간에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날카롭게 찔러들어오는 공격은 심장을 꿰뚫어버릴 것과 같고, 춤을 추듯 휘둘러지는 그들의 너른 칼날은 당장에라도 팔을 떨어뜨릴 것 같다고, 첫 전투를 다녀와서 영력이 바닥날 정도로 도검남사들을 치료하고는 쓰러졌다가 한참 뒤 회복된 그녀가 말했었다.

 

색적에 성공했고, 어느 진형이 유리한지를 알면서도 사니와는 선뜻 누구를 어느 자리에 배치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초조해지는 것은 함께 길을 나온 도검남사들이었다. 빠른 발로 먼저 선수를 쳐 피해만 최소화할 수 있다면, 아니, 작전이 성공해서 이들 중 누구도 다치고 지나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사니와는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깨물며 배치를 끝냈다.

 

휘둘러 벤다, 상대방의 공격에 스치고, 베여버린다. 빠른 몸짓으로 급소를 노리고는 깊게 찔러들어가지만 수를 읽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조금의 여유를 가지고 피해버리고는 곧바로 이쪽을 향해 치고 들어온다. 용호상박이라고 했던가, 청룡과 백호가 한 합씩 주고받는 모양새가 꼭 저러했으리라. 자신이 실전에 휘말려 있기에 마냥 감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들었던 말 그대로였다. 심장을 뚫을 듯, 팔다리를 떨어뜨릴 듯 검비위사라는 존재들은 지치지 않고 아군을 물아붙였다.

 

피를 먼저 본 것은 아군이었다. 날개 한 쪽이 부러지듯 하늘빛의 옷자락이 흐드러져 날았다.

 

야스사다!”

 

굽이 달린 신발이 버거운 줄도 모르고, 발목이 삐끗한 것도 느끼지 못하며 사니와는 달려가 핏빛으로 물든 소년을 품에 안았다.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주저앉은 사니와의 눈앞에서 하나둘 눈에 띄게 상처가 늘어가고 있었다. 마치 그 때와도 같았다. 무력하게 떠나는 것을 보았어야만 했다. 눈물도 나오지 않고 귓가에서 멈춰버린 심장 박동을 알리는 삐- 하는 기계음만이 날카롭게 울렸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전장인지, 그가 있었던 병원인지, 사니와는 혼란 속에 품에 안았던 소년을 놓쳐버렸다.

 

사니와의 머리 위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둠 너머로 죽음을 뜻하는 보라색이 보였다. 아무래도 당신 곁으로 가려나봐. 흐릿해져가는 의식의 틈새로 느릿하고 낮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하나 둘 쌓인 현재는 곧 과거가 되고, 무수한 과거로 인해 또 시간은 흘러간다. 흘러가는 시간은 역사가 되지. 어린 아이야, 너는 네가 역사라는 물결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라고 오만하게 믿고 있는 게냐?”

그렇지 않아요, 나는 그저, 내가 바랐던 것은.”

어리고 나쁜 아이로구나. 어여삐 여겨 그 목숨만은 남겨 주려 했거늘-.”

 

검비위사는 혀를 차며 다른 도검남사들을 상처입혔던 검을 다시 높이 들어올렸다. , 저 검이 떨어질 곳은 내 심장이로구나. 이런 식으로 빨리 떠나버릴 줄은 몰랐는데. 눈을 감자 선명하게 다정한 이의 얼굴이 보이고 목소리가 들렸다.

별님도, 당신도 내가 살아가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끝나려나 봐요. 함께하지 못해 미안해요, 모두들-.’

피안으로의 길을 향하는지 몸이 자신도 모르게 편안해져 있었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을 인정했다.

 

진짜는, 지금부터다.”

 

온통 찢어져 반쯤 벗겨진 옷 너머로 보이는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처럼 매서운 기세로 소년은 검비위사의 심장, 으로 보이는 자리에 제 검을 밀어넣었다.

 

일기토라면,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냐?”

 

차갑게 일갈한 야마토노카미 야스사다의 예리한 일격은 이윽고 검비위사 부대장의 목을 떨어뜨렸다. 부대장이 스러진 것을 확인한 검비위사들은 저들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승리를 확신한 소년은 검에 검집을 씌우고는 전장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사니와를 내려다보았다.

 

돌아왔어요-. 잠들었어?”

 

소년은 기절한 채 움직이지 못하는 사니와의 몸을 제 하오리로 감싸곤 무릎 위에 뉘여 다른 남사들도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깨어나면, 나도 사랑해줄 거지?”


-*-

달달한 거 저도 쓰고싶다....

언제고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그는 오만하지도 않았으며 상냥하고 따뜻하기에 자꾸만 의지하게 되었다. 어느 밤인가부터 더욱 따스해진 태도에 얼어버린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그를 근시로 두고 한시도 곁에서 떨어뜨려놓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차피 일이 끝나면 나는 현세로 돌아갈 테고, 돌아간 뒤의 미래는 없을 테지만 조금은 마음이 돌아서고 있다면 웃을 것이다. 그는 신물(神物)이었으니까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이 옳았건만 기댈 곳 없이 흔들리다 보니 어느새 그 든든한 어깨를 보며 안심하고 있었다.

 

본성의 밤은 언제나 은은하게 반짝였다. 언제나처럼 장부를 정리하고, 출진 부대의 구성원들을 점검하고, 모두의 장비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피고 다친 이들에게 제 영력을 불어넣는 일이 끝나고 찾아온 휴식시간은 달콤했다. 별채에는 오늘도 나와 근시인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뿐이다. 낮의 일이 끝나면 그에게서 말을 배워 이제는 간단한 인사말과 감사 정도는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손을 잡거나, 하는 돌발행동 없이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좋은 일이었다. 어째서인지 그에게 고개 숙여 감사인사를 건넬 때는 표정이 미묘해 보였었지만.

 

몇 마디 말을 배우고 나면 그가 방으로 돌아간 사이 짙은 어둠 속에 빛나는 별을 보며 말을 건다. 당신을 잃고는 온 세상에 겁을 먹은 채로 울며 보내던 시간이 있었다. 닿을 수도, 들리지도, 부를 수도 없는 마음은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곤 했다. 툇마루의 기둥에 머리를 기대곤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늘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저 하늘의 별이 되어버린 당신에게 전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친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질 수 없는 상실감은 가시 돋친 꽃이 되어 가슴이라는 들에서 피고 또 지곤 했다.

 

오늘 아침은 무엇을 먹었고, 점심은 간단하게 챙겼어요. 가볍게 다른 사니와를 만날 일이 있었는데 그도 동행했어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당신처럼 늘 잘 해주고 상냥하게 대해주고, 먼저 챙겨주고 있어요. 잠자리까지도 손봐줘서 가끔은 좀 부끄럽지만. 날마다 주어지는 할 일은 다 끝냈어요. 요즘은 일이 끝나면 그에게서 간단한 말들을 배우고 있어요. 항상 감사하고 있는데 고맙다는 말을 몰라서 언제나 손을 잡고 마음으로만 전하는 게 조금 부끄러워서. 그런데 오늘 그 사람 표정이 조금 아쉬운 모양이었어요. 뭔가 실수했나, 싶어 물었는데 대답해주진 않았어요.


하늘에 있는 당신을 향해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조잘거리고 방으로 돌아가자 언제나 그랬듯이 그의 손길이 닿은 이부자리가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다. 평소와 다른 것이라면 언제나 자리를 비워주던 그가 이부자리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점이었다. 어딘가 초조한 표정으로 그는 나를 바라보며 정좌하고 있었다.

 

*

 

슬픔을 받아들이고 슬픔 속에 잠긴 표정임에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붉은 눈에 눈물이 맺히면 피눈물인 듯, 아닌 듯 하롱하롱거리는 것을 보면 가슴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어깨를 적시는 빗물이, 눈물에 젖어가는 뺨이 찌르는 것을 보는 내 가슴 속이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것을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언제나 모든 것을 놓아버린 것처럼 슬프게 웃고 있던 그녀의 눈빛이 조금 따스해져 가는 것을 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전 주인을 비롯하여 많은 수의 인간들을 보았던 나는 그 슬픈 눈빛이 조금은 생에 대한 갈망으로 변해가는 것이 기뻤다. 설령, 나나 다른 검들처럼 완전히 부서지지 않는 한 세월을 뛰어넘어가며 살 수는 없겠지만, 가뜩이나 짧은 인생을 더욱 이르게 끝내고자 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기 때문에.

 

검은 검이기 때문에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였다.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서는 악행을 함께할 수도, 좋은 일에 사용될 수도 있으며, 사람의 손에 의해 제 모양이 달라지거나 새로이 태어나게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철저하게 사물이기에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이미 오래 전이었다. 마음에 드는 주군을 찾는 것은 나 홀로 할 수 없는 일이었으되 누군가 필요한 것은 이미 오랜 세월 전부터 자명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너를 만난 순간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고마워,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가르쳐달라 부탁하는 주인에게 말을 가르쳐주고는 거기에 더해 약속이라는 단어를 가르쳐준 것은 무의식적인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툇마루로 향하는 주인을 보내고 가지런하게 이불을 폈다. 홀로 앉아 오롯이 그녀를 위해 보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본성에 온 뒤 나의 발자국은 얼마나 그녀를 좇았던 것일까. 작은 흔적이라도 남겨보고자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내 마음이 닿았을지는 알 수 없었다. 주인이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먼저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쇼쿠, 라고이름을 줄여 부르며 애칭이에요, 처음 웃어보이던 날을 떠올리면 통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는 베개가 놓인 자리 곁에 정좌했다. 하늘의 별을 보며 오늘 일과를 누군가에게 전하는 목소리가 이내 끊기고 발걸음이 가까워 왔다. 세 걸음, 두 걸음. 한 걸음, 그리고 멈춘 소리에 고개를 들었을 때, 하나뿐인 내 눈은 놀라 동그래진 붉은 빛과 마주쳤다. 답지 않게 초조하고 불안한 얼굴일 것이었다.

 

*

 

쇼쿠?

할 말이 있어. 아니, 약속하고 싶은 것이 있어.

 

그는 불쑥 약속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유비키리? 라며 되묻는 내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마음으로 전해지는 뒤뜰로 가자는 말에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 섬돌에 놓인 신발을 발에 꿰었다.

 

요즘도 꿈을 꾸고 있어?

조금요.

 

그는 내게 여전히 꿈을 꾸느냐 물었다. 앓아누운 날의 기억은 없다. 다만, 그 뒤로 그는 나를 더욱 안쓰러이 쳐다보았고 챙겨주었다. 그런 일의 연장선상에 놓인 질문이겠거니, 싶었다. 그와 나는 계속 걸었다. 그 사람이 살아있었을 때도 이렇게 밤산책을 하곤 했다. 이 사람은 알고 있을까, 나는 언제고 소중한 누군가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놓지 않는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주군.

 

그는 나를 불러세웠다. 하늘에 빛나는 별과 달을 증인으로 두고 나와 마주서서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간절한 눈빛에 나도 모르게 내 새끼손가락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우는 듯이 웃으며 내게 말했다.


쉬어가도 좋으니 부디 그 생을 너무 이르게 멈추지 말아 줘. 약속해.

헤매이며 길을 찾는 것이 삶이니까. 나는 주군이 살아가기를 원해.

 

마음을, 기억을 모조리 읽혀버린 기분이었다. 처음, 생을 놓고자 했을 때 그 역시 그리 말했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은 그 때의 그 사람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

오늘도 쇼쿠에게 미안합니다. 소재는 Mili의 Yubikiri-Genman 가사. 

또다시 밤 산책이었다. 곱게 펼쳐진 짙은 남색의 비단 위에 알알이 박힌 희고 노란 보석들은 제 빛을 뽐내고 있었다. 푸르게 보일 만큼 흰 달이 내려앉은 심신자의 정원에는 두 사람이 말없이 걷고 있었다. 들려오는 소리는 작은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잿빛 금발의 여인은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우아한 걸음으로 걸었다. 반걸음 쯤 뒤에서 그녀를 따르는 이는 멋스러이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검은색의 얇은 옷 사이로 보이는 가녀린 팔은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심신자는 연약했다. 자신의 옛 주인과 달리 검 하나 들지 못할 만큼 가녀린 몸에서 나오는 영력이 무엇이기에 스스로가 존재하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어 근시로서 그 곁을 지키게 된 건지. 연이은 싸움 속에서도 그는 오롯하게 떠오르는 간지러운 것을 정의하려 애썼다. 이것을 연심이라고 했던가.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밤공기는 차고 맑았다. 심신자의 뒤뜰에 자리한 연못에는 어떻게 피어난 것인지 연꽃 두어 송이가 달빛을 머금고 상냥하게 피어 있었다. 그 옆을 심신자가 걷고 있다. 지금과 분위기가 비슷한 어느 밤인가 심신자는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를 어떤 밤에 갑작스레 잃었다고. 지금 하는 일이 끝나면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살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고. 함께 걷고 있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자리가 편할 리 없었다. 딱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지도 않는 심신자이기에 정적은 배가 되었다.

 

그 얼굴이 나를 향해 돌아서서 웃어주었으면. 스스로를 조금 더 아껴주었으면.

 

정장을 멋스럽게 차려입은 그는 차마 손을 내밀지 못했다. 어깨를 끌어당겨 변치 않는다고, 나는 그리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갈 수 없는 말들만이 연못가를 떠돌며 그를 괴롭혔다. 멋스럽지 못하게 이게 무슨 짓이람. 마음으로 혀를 차는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의 시야에는 더 이상 풍경이 들어오지 않았다. 심신자의 잿빛 금발이 반짝이며 부서지는 빛이 환했다. 달빛이 반사되는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에 녹아내린 것처럼 은은한 빛을 따라 손을 움직이고 싶었다. 큰 부상을 입었을 때 수리실에서 사색이 되어 자신을 돌보던 손은 부드러웠다. 그 손의 온기가 그리웠다. 장갑을 벗고 당신의 손을 잡고 싶어. 사락사락 소리를 내는 현세의 옷-드레스라고 했었다-은 느리게 불어오는 바람에 나풀거리며 상사화의 꽃잎처럼 흔들렸다.

 

안타까운 나의 주인. 처절하고 처연하여 갈 곳 잃은 당신의 곁을 지키는 것이 나였다면.

 

상념에 젖어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지 못하던 그는 심신자가 멈춰선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 뒤에 부딪쳤다. 달큰한 향이 아래에서 훅 끼쳐왔다. 제자리에 선 심신자는 손등을 위로 한 채 팔을 뻗고 있었다.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는 이윽고 느낄 수 있었다. 영롱한 밤은 간 데 없고 구름이 덮어 새카만 밤, 연못가에 구별할 수 있는 실루엣은 심신자의 것뿐이었다.

 

물방울이 떨어져. 그런데도 좀 더 걷고 싶어요.

 

모르는 새 하나 둘 빗방울이 떨어지며 연못에 파문이 하나 둘 일기 시작했다.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기에 자신은 아무 문제가 없을 테지만 문제는 제 앞의 여인이었다. 날이 너무나도 맑았기에 우산은 준비하지 않고 있었다. 심신자가 비라도 맞으면 큰일이 날 터였다. 남들이라면 가볍게 지나갈 감기에도 열이 치솟아 앓아누워서는 수도 없이 이름 모를 누군가를 불러대던 심신자가 안쓰러워 손을 잡아주었더니 반쯤은 정신이 나간 채로 나예요, 당신의 에요. 나를 데리러 와줬어요? 묻는 것이 가슴이 시렸다. 또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재킷의 단추를 끌러 심신자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쇼쿠는?

나는 괜찮아, 머리야 다시 다듬으면 되니까.

고마워요. 세탁해서 돌려줄게요.

 

평소와는 조금 다른 말을 하며 그는 혼마루를 향해 돌아섰다. 안아들고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돌아가면 그만이었지만 그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는 여인을 안아들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툇마루에 돌아온 심신자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루에 앉아 있었다. 붉은 보석 같은 눈동자 아래로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이 굴러떨어져 가지런히 모여 있는 소매를 적셨다.

 

소나기가 칼날이 되어 가슴을 에는 밤이었다. 멋이 나지 않을 깊은 부상보다 흐르는 눈물이 아팠다.



-*-

전력 60분 주최님이 원하시는 소나기는 이런 소나기가 아니었을 텐데.......

병마가 찾아온 건 아주 오래 전이었다. 그러니까, 혼마루에 오기 한참 전부터라고 하면 이들은 알아들을 수 있을까. 시간이 크게 남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는 느낄 수 있다고 했었다. 잔인한 시간이었다. 그토록 만나기를 간원하고 기원하는 동안은 보이지 않던 그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두고 왔다는 것은 누군가 사람의 운명이라는 붉은 실을 가지고 장난이라도 치는 듯했다.

 

시리도록 푸른빛이 반사되는 얼음 색의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그는 조용한 몸가짐으로 사니와의 방으로 향했다. 자신에 비하면 몇 배의 시간을 혼마루에서 보내온 헤시키리 하세베는 방 앞에 선 코우세츠 사몬지에게 적대감 넘치는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명만 아니라면, 네놈 따위.”

불필요한 싸움은 원치 않습니다.”

 

코우세츠 사몬지는 잔잔하게 제 의사만 말하고 방문을 넘어섰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뒤에 선 헤시키리 하세베의 표정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모습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또 어떤 전투에

싸움은 싫다 말했건만 제 주군은 무리해가며 그날 정해놓은 일정을 소화하곤 했다. 몸이 좋지 않다고 했었던가, 함께 당번을 섰던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생각하며 코우세츠 사몬지는 자리에 누워 있는 자신의 주군에게 다가갔다.

 

조금 더 가까이 와주세요, 코우세츠.”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사니와는 자신에게 다가와 달라 말했다. 잦은 싸움에 썩 호감이 있었던 주군은 아니건만 코우세츠 사몬지는 가슴 어딘가에서 욱신거림을 느꼈다. 색이 반쯤 꺼진 눈동자를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을 향한 눈빛을 스스로 피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어요.”

 

왠지 오늘이 아니면 앞으로 영영 말하지 못할 것만 같아서. 천 번의 여름을 보내길 소망하며 붙은 이름이 무색하게도 이별의 계절이 너무도 빠르게 다가왔노라고, 라고 구구절절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당신은 싸움을 싫어한다고 했었죠.

 

혼마루의 여주인은 쓸쓸한 낯빛으로 우는 듯이 웃었다. 또렷하지만 바깥으로는 새어나가지 않을 목소리로 나츠는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싸움이 없는 세상을 당신과 함께 만들고 싶었어요. 그 때문에 당신의 손에 피를 묻히게 만들어버렸지만, 그것만이 내 소망이었어요.”

 

남자는 잠자코 앉아 그 이야기를 들었다.

돌이켜보면 여주인의 싸움은 딱 필요한 만큼만 이루어졌었다. 남자의 뒤통수에 망치를 후려맞은 것 같은 울림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시간이 모자라요. 내가 없이도, 당신은

당신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라요, 나의 코우세츠.”

토오하라 치나츠. 오직 당신에게만 불리고 싶었던 내 이름이에요.”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고, 소원이었다. 진심이었으며, 또 고백이기도 했다.

 

그것이 토오하라, 당신의 소원이라면. 당신의 명, 받들겠습니다.”

 

그 해, 그는 여름은 맞이하지도 못한 채 겨울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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