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적 사니와 설정 있음.

 

해가 저물어 가는 때면 혼마루에는 검은 옷이 유행한다. 아직 해가 아주 넘어가기에는 두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았지만 이 혼마루가 만들어졌을 때부터의 전통 비스무리한 것이라고 했다. 유월 초순에 한 번, 시월 말에 한 번. 검은 옷의 물결이 온 혼마루를 헤치는 시기.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시기이다. 한 도파의 장으로서의 행실이 몸에 밴 그로서도 어김없이 옷장에 묵혀 둔 검은 옷을 꺼내는 시기였다.

 

혼마루의 주인. 모두가 남성형의 육체를 가지고 깨어나는 이곳에서 유일한 홍일점이자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주인은 올해에도 작년에 입었던 검은색의 발목까지 오는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이면 제가 태어나 자란 곳의 전통복을 꺼내입는 날이 절대적으로 많은 그녀는 단정한 검은 드레스를 꺼내 옷자락을 펼쳤다.

 

올해도 그때가 왔구나. 그는 어깨에 흰 깃털 무늬가 아름답게 수놓인 기모노를 걸친 채 주인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부드러운 광택의 검은 드레스는 수수하고도 품격 있는 모양새였다. 그것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본 주인은 그에게 말을 건넸다.

 

밖에서 조금만 기다려줄래요?

코토리의 말이라면.

 

그는 근시의 지정석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이내 작은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창호에 거대하다고 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주인은 조심스레 옷의 등 지퍼를 열어 한 발 한 발을 옷 속에 넣고 양팔에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그 시절에도 이런 기분이었지, 주인은 낮게 읊조렸다. 십 년은 되어가는 이야기. 십 년은 족히 채우고도 남을, 새드 엔딩으로 끝나버린 한 편의 드라마 같던 이야기. 그 속의 비련의 여주인공. 마지막 포옹. 모든 것이 꿈 같은 이야기였다.

휘하의 남사들이 이 기간이 되면 유독 검은 옷을 많이 입는다는 것이 자신의 영향임도 알고 있었다. 십 년이 되어가는 낡은 이야기를 기억하는 자는 하나일 때보단 둘일 때, 둘보다는 넷일 때 더욱 좋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차마 내놓을 수 없는 어려운 상대도 있었다.

 

당신이 들으면 뭐라고 할까. 과거에 사로잡힌 망령과 같으니 그만 잊고 새 연인인 자신에게 충실하라고 할까, 아니면 다른 남사들이 말하는 그대로, 너를 만나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할까. 첫눈에 반해버렸다는 이야기를 나지막이 하면서도 가슴 속에 여전히 가지고 있는 바깥 세계에서의 이야기를 그는 달갑게 들어줄 수 있을까, 바깥에서 다시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상대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안은 그녀는 조심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와도 돼요.

 

방에 들어온 남자의 시선에 끝이 치렁치렁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 내의가 보였다. 그는 일말의 동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다가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지퍼를 끝까지 채워주었다.

 

코토리는 이 시기만 되면 항상 이 옷차림이군. 이유라도 있을까?

하하, 할로윈이잖아요. 기분 좀 내는 거죠, .

악령의 장난을 피하기 위한 옷차림 치고는 수수하지 않니?

뭐어혼마루에 악령 같은 게 나오겠어요? 나왔다간 베일 텐데.

 

는 수수께끼를 풀고 싶었고, ‘그녀는 들키고 싶지 않아 때아닌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그나마 이 남사가 할로윈까지만 알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멕시코에서 사흘간 기념하는 망자의 날을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그는 꼬치꼬치 캐물었을 게 분명했다.

 

’. 산쵸모는 석연찮음을 느끼고 있었다. 유월은, 특히나 유월 초는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한 달이었다. 주인, 아니 연인의 부임일이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남사들은 검은 옷을 챙겨입고 주인과 함께 어딘가를 훌쩍 다녀오곤 했다. 그 행렬에 자신은 결코 지명되지 않아왔다. 아니, 이치몬지 도파 대부분은 그 행렬에 끼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주로 취임일 축하연의 준비가 맡겨졌고, 한두 해 정도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월과 시월의 이 이상한 풍습은 이 혼마루에만 있는 광경이었고, 다른 혼마루의 동일 개체를 만났던 그는 의문을 품어왔다.

 

코토리.

?

진지하게 들어줬으면 하는구나. 지금 농담하는 게 아니란다.

 

짐짓 엄한 표정으로 늘 착용하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새빨간 맹금류의 눈이 타고 있었다. 일가의 장만이 갖는 각인에도 붉은빛이 일렁였다. 주인의 은빛 눈이 도로록 구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되는구나.

기분 탓이에요. 그냥 이 옷이 입고 싶을 때가 있는 거래도.

변명은 그쯤 하렴.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실렸다. 보통 이쯤 되면 사실대로 이야기할 법도 한데 이렇게까지 숨기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 트릭 오어 트릿! 진짜 할로윈이라니까요.

코토리.

 

이제는 정말 인내심이 끓어올랐다. 산쵸모는 주인, 아니 연인의 허리를 한 팔로 끌어당겼다. 저 공단 옷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서라도 비밀을 파헤치고 싶었다. 마지막 배려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야 알아줄까, 아주 잠깐 고민한 그는 다른 손을 뻗어 작은 새의 뒷목에 있는 지퍼를 내리곤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 ! 아파요! 뭐 하는 거야.

 

침상에서의 스킨십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도 코토리는 밀어내려고 힘을 썼다. 체구가 두 배는 차이가 나니 어떤 소용도 없는 걸 알면서도 벗어나려 애썼다.

 

이 정도는 늘 하는 스킨십이잖니. 이유를 말해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마.

말할 것 없대도.

아니, 분명히 코토리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어.

 

이야기 속의 뱀파이어 백작처럼 그는 다시 이를 세우고 목덜미에 잇자국을 남겼다. 붉은 울혈이 지는데도 코토리는 이렇다저렇다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 그러니?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이거 놔요. 놓고 얘기해요.

말하기 전까진 놓아줄 생각이 없단다.

그럼 어디 마음대로 해 봐요! 나는 말할 것 없다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

 

눈을 마주치고 낮게 속삭이는 그의 동공이 바짝 졸아들었다. 코토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에게만큼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 공포의 수위가 무섭도록 차올랐다.

* 독자적인 설정이 있습니다. 열람 주의.

 

오늘도 작은 아이는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소원을 이루어주었을 뿐인데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남자는 문신을 갸우뚱 흔들며 손도 대지 않은 쟁반을 거두었다. 쟁반 위의 그릇은 무엇 하나 차게 식지 않은 것이 없다. 뽀얀 우윳빛의 쟁반덮개 위로 먼지가 몇 알 내려앉은 것을 후, 불며 그는 답이 없을 노크를 했다. 고요했다.

 

작은 아이는 살아있다. 그야 당연하다. 그가 그렇게 느끼고 있기에 작은 아이는 몇 날 며칠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서도 멀쩡히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작은 아이를 데리고 온 곳은 특수한 곳이었으니까. 삶을 느낄 수도 있고 죽음을 감지할 수도 있었다. 다만 작은 아이는 무슨 짓을 하든 결코 죽을 수 없다 그것이 그의 세계의 규칙이었기 때문에.

 

그는 손수 양송이 크림 수프를 내다버렸다. 물에 향을 온통 빼앗긴 찻잎도 미련 없이 털어버렸다. 온기를 주변에 모두 빼앗기고 남은 액체 역시 미련없이 흘려버렸다. 저 작은 아이는 이곳에 온 이후로 단 한 번의 끼니도 먹지 않았다. 그가 바라던 모든 것을 손에 쥐어주자 맥없이 그의 손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그는 그 아이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아니, 그럴 방법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원하던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것, 그것이 그의 신분으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코토리.

 

나지막한 음성이 부드럽고 달콤하게 작은 아이를 불렀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살포시 문을 열어 볼까? 그는 코토리를 저택으로 데려온 뒤 처음으로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이 문을 열고, 작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뺨을 맞대고, 손을 부드럽게 그러잡고 싶었다. 영원할 것만 같은 모래사장을 한 바퀴 돌고 온 시간이 다시 제자리에 설 동안 그는 작은 아이와 떨어져 있었다. 이렇게 떨어져 있었던 것이 얼마만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육신을 갖고 작은 아이를 만난 뒤로 그는 작은 아이와 언제나 한 몸이었던 가지처럼 붙어 지냈기 때문이다.

 

집이 갖고 싶어.

 

작은 아이의 입버릇이었다. 여기가 네 집이잖니. 넓은 툇마루를 가리키며 그는 다정히 지저귀곤 했다.

 

여기 말고, 온전히 내 소유의 집.

 

그렇구나. 너에게는 이곳에서 너만을 따르는 이 모두가 네 소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구나. 그는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을 골똘히 생각했다. 작은 아이의 소원은 곧 자신의 소원이었다. 온전한 나의 소유를 갖는 것. 그래서 그 작은 아이를 제 소유로 더했다. 과정은 지난하지만은 않았다. 그저 약간의 눈속임으로 충분했다. 작은 아이는 손쉽게 그가 쳐놓은 새장에 제발로 들어왔다.

 

소리없이 문이 그 입을 벌렸다. 조금의 틈새로 큰 발을 들여놓은 그는 조용히 작은 아이의 방 안을 바라보았다. 작은 아이의 앞으로는 사람의 머리 형상을 한 것이 여럿 놓여 있었다. 주먹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머리들은 형상이 다양했다. 몇 개는 눈을 부드러이 감고 있고, 몇 개는 한쪽 눈을 살포시 감은 채 웃는 상을 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전설 속에 나오는 요정처럼 뾰족한 귀를 하고 있었고, 어떤 것은 양쪽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머리 뚜껑이 열린 것들은 그 형상이 뒤집힌 채 작은 아이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림잡아 수백 개는 될 법한 머리! 작은 아이가 눈여겨보았던 형상들은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진열해놓은 그 자리에 작은 아이는 없었다.

 

작은 아이는 그 모두를 뒤로하고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는 의아함을 표하지 않으려 애쓰며 침상 옆의 조그만 의자에 걸터앉았다.

 

코토리.

 

부드럽고 낮은 음성이 다시 작은 아이를 불렀다. 꿈의 틀에라도 끼인 것인지 작은 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음성이 작은 아이를 불렀다. 여전히 작은 아이는 꿈틀하지 않았다.

 

일어나렴.

 

그는 귓가에 숨을 후, 불어넣었다. 작은 아이가 눈을 떴다. 은빛의 눈동자에 졸음이 가득 묻어 있었다. 저택에 와서 눈을 뜬 것이 몇 번째인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던 작은 아이는 미간을 찡그렸다. 여기는 내가 원하던 곳이 아니야. 작은 아이는 고개를 젓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

 

그의 인내심은 동났다. 얼굴에 새겨진 문신은 이미 붉게 탄 지 오래였다. 뺨에 느껴지는 은은한 작열감이 그의 고양되었음을 아까부터 알리고 있었다. 기껍고도 사납게 타는 불꽃은 그의 손을 타고 흘렀다. 그는 이불을 걷었다. 붉은 공단 이불이 사라락 소리를 내며 걷히고 순수하디 순수한 우윳빛을 띤 잠옷이 드러났다.

 

한때 꿈을 꾸듯 선명하게 빛나던 은색 생명력은 사그라든 채였다. 눈을 떴지만 여전히 잠에 들어 있는 것만 같은 빛을 띤 회색빛에 그의 얼굴이 가득히 반사되었다. 조그마한 색 바랜 입술에 그가 머물렀다 떨어졌다. 회색 눈에서 물기가 또르륵 굴러내렸다. 스스로도 영문을 모르는 이슬이었다.

 

코토리, 네가 원하는 것을 모두 준비해 주었잖니.

 

코토리라고 불린 작은 아이는 빛이 꺼진 눈으로 방을 휘 둘러보았다. 붉은빛의 고급스러운 벨벳이 내린 벽이 그 눈에 들어갔을까. 코토리는 자그마한 발로 바닥을 짚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을 만큼 푹신한 카펫이 그 발에 감겨들었다. 코토리는 그가 준비해놓은 작업대에 올라앉았다. 그러나 붓을 잡지는 않았다. 그가 준비해놓은 수많은 조각들에도 무심한 눈길을 줄 뿐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작은 아이에게 다가갔다. 작업대 앞에 앉아 무심히, 공허하게 허공에 뜬 시선을 가슴에 안았다. 가슴에 가만히 귀를 가져다댔다. 작은 아이에게 어울리는 작은 심장이 콩, , , 느릿하게 뛰었다. 작은 아이의 몸은 따뜻했지만 차가웠다. 가녀린 팔이 작동하듯 그를 마주안았다.

 

그래. 그거면 된단다.

 

그는 작은 아이와 뺨을 맞대고, 손을 부드럽게 그러잡았다. 철저하게 하나처럼 뛰는 고동이 낯설었다. 잿빛 눈에 다시 그가 비쳤다. 초점이 붕 뜬 눈조차 자신이 비치는 것이 그토록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수많은 안구 없는 눈 사이로 그림자는 하나로 겹쳤다.

 

 

* 독자적인 혼마루 설정이 있습니다.

* 코류 카게미츠 x 사니와

* 타 장르 언급이 있습니다.

 

눈을 뜨니 낯선 공간이다. 내 혼마루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는 의문도 잠시, 같이 있는 커다란 짐승 같은 몸집의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저놈이 기어이 일을 저질렀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놀라서 펄쩍 일어났다.

 

일어났어?

, , 무슨 짓이야.

대뜸 무슨 소리야?

 

녀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묻는다. 금발의 머리카락이 챠르륵 흔들린다. 저 영롱한 보라색 눈에도 의문이 가득한 걸 보니 일단 날 속이고 있는 건 아니다. 무슨 영문인지 나만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싶었다.

 

잠깐 졸았다 싶었는데 이런 데 와 있으면 당연히 의심부터 하지 않겠어?

, 나 그렇게 신뢰도가 떨어진 상태야?

 

근시는 그렇게 물었다. 아니, 신뢰도가 떨어졌다기 보다는 이런 방면에서는 신을 믿을 수 없다던가, 하는 소리를 주절거리며 나는 방문으로 향했다. 아니, 방문으로 보이는 것을 찾아야만 했다.

 

뭐야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야?

나도 몰라.

너가 모르면 난 어떡해?

날 믿어주는 건 좋은데 같이 낮잠 잔 뒤로 눈을 뜨니 여기였다는 기억뿐이야. 나도.

 

좀 믿어달라는 식으로 녀석의 눈이 가늘어진다. 어쩌겠는가. 나갈 방법을 찾아야 혼마루에 돌아가서 남사들에게 영력도 불어넣고 신입을 단련시킬 텐데 이건 나갈 방법이 보이질 않는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나갈 문이란 건 보이지 않고 네모난 벽과 널려 있는 가구들 뿐이었다. 이러다 하얗게 머리가 미쳐버릴 것 같은데 공기는 어디서 들어왔다. 덜렁 누워 천장을 보니 조명도 없었다. 그럼 어디서 빛이 공급되고 있다는 뜻인데 이 말도 안 되는 공간을 부수고 나갈 방법은 없을까?

 

그거 이미 해 봤어. 안 부서져.

너 내 속에 들어갔다 나왔니?

나 자기 표정만 보면 이제 무슨 말 할지도 알거든.

하긴 그렇긴 하다.

 

몇 년간을 인간과 사귀고 있었는데 인간적인 표정 몇 개를 못 읽으면 말이 안 되지. 나는 생각을 읽는 용 한 마리와 함께 벽을 두드리기도 하고, 천장도 두드려 보았다.

 

자기, 살 쪘어? 요즘 빵 좀 먹더니.

시끄러워.

좀 무거워진 것 같은데. 한 근 정도?

나가서 확인해보자 그래. 아니기만 해봐.

 

천장을 확인하는데 갑자기 좀 무서워졌단 소리를 한다. 그야 최근에 좀 많이 먹긴 했다. 그렇지만 직언을 이렇게 퍼부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확 무릎으로 목을 꾹 눌러버릴까 하다가 신인 녀석에게는 소용도 없다 싶어 그만두었다.

그렇게 실없는 말도 몇 마디였다. 두어 마디 더 나누다 말고 이거 못 나가면 어떡하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났다. 신인 녀석이야 상관없다지만 인간인 나는? 화장실이 가고 싶다거나, 씻어야 한다. 시간이 되면 밥도 공급해 줘야 한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졌다.

 

소룡아, 여기 못 나가면 어떡하지?

그런 소리 하지 마. 내가 부서지더라도 데리고 나갈 거니까.

그게 더 무서워.

그러니까 일단 침착하자.

 

방을 탐색하던 나는 심호흡부터 했다. 패닉에 빠져봐야 남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요전번 다른 방에 갇혔을 때 뼈저리게 배웠기 때문이다. 이런 함정 같은 방이 왜 혼마루에 만들어지는지 정말 괴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한 번씩 잊을 만하면 이런 방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뭘까?

 

자기.

.

왜 갇혔는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우리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기야 하지.

 

하얀 방에 널려 있는 가구가 누구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방에서 나가려면 당연히도 저 가구까지 뒤져서 뭐라도 찾아내서 나가야만 했다. 일단 오늘 켄신도 껴서 만방에 나가기로 했는데 이대로라면 오늘이 아니라 오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도록 못 나갈 게 뻔했다.

 

그렇게 방을 뒤지기 시작한 우리는 가구를 옮기네 가구 서랍을 뒤지네 온갖 쇼를 했다. 방은 깨끗하게! 정말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제 남은 거라곤 덮고 있던 이불뿐이었다. 어쩌겠는가. 저것도 탈탈 털어봐야지.

 

하나.

.

.

 

펄럭펄럭 이불을 흔들자 바스락 소리와 함께 종이가 하나 떨어졌다. 처음 보는 꼬부랑 글씨체로 쓰여 있는 말은 하나였다.

제일 좋아하는 모습 말하기

…….

우리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어제만 해도 밤늦게까지 음악 감상하느라 소홀했던 벌을 이렇게 받는구나 싶었다. 상대방의 제일 좋아하는 모습이라니 일단 코류의 입부터 막아야 했다. 저 폭탄 같은 입술 속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웠다.

 

잠깐만, 소룡아. 몸 좀 낮춰 봐.

?

네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워.

자기 제일 좋아하는 모습이야, 좋아하는 걸 한껏 좋아하고 있을 때의 모습인데.

철컥.

뭔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는 모습에 턱 빠지는 줄 알았다. ? 당장 어제만 하더라도 굉장히 부루퉁해 있던 녀석이 맞단 말인가?

 

*

사건은 그제부터 시작이었다. 좋아하는 쇼 레스토랑 싱어들의 네 번째 정규 앨범이 발매되었다. 혼마루까지의 배송은 정부의 검열을 거치고 해야 해서 한 일 주일쯤 걸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외로 검열이 빨리 끝났다. 골든위크에 안 걸렸다. 당연히 내 입꼬리는 귀에 걸리고 코류는 샐쭉해졌다.

 

그렇게 걔들이 좋아요?

 

샐쭉해질 때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존댓말을 써가면서 말하는 우리집 소룡이는 올해에도 그렇게 부루퉁해했다.

도대체 거기가 뭐 하는 곳이길래 현세에 갈 때마다 들리냐고 하도 궁금해하길래 한 번 데려갔었더니 그 뒤로 경계심만 더욱 높아져서 팬의 마음이 맞냐는 둥 무대 위에서 그렇게 근육을 드러낸 모습이 맘에 든다면 나도 배까지 드러냈어, 라고 얘기할 정도로 좋아하는 걸 썩 내켜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 곳에서 네 번째 앨범이 배송이 왔다니, 그것도 풀 패키지로. 소룡이가 싫어할 만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패키지를 열고, 리핑하고, 한 곡 한 곡 감상평을 남겨 다이어리에 적는 모습을 썩 기분좋지 못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니 놀랠 노 자였다.

*

 

그런데 뭐? 내가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모습이 맘에 든다고?

그 건은 예외고. 지금 그런 표정도 좋아해.

 

입을 막아야 할 폭탄 발언보다 이게 더 위험했다.

 

켈록켈록, 너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지?

신은 밥 안 먹어도 돼요. 탈도 안 나요.

그건 부러운데, 여하간 뭐라고?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자기 모습이 좋다고.

 

철컥.

아무리 생각해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거짓말은 아닌 모양인데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너 내가 앨범 오고 신나할 땐 불퉁했잖아.

외간 남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 때까지 뾰로통해하지 않으면 내가 연인이라고 불릴 수 있겠어?

그야, 그렇지만.

얼른 자기도 내가 좋은 이유 하나만 말해줘. 안 그러면.

 

코류는 귀에 가까이 다가와 바람을 훅 불었다.

 

내보내줄 때까지 장난칠 거야.

, 알았어! 솔직하게 얘기할게. 자유분방한 네 심성이 좋아.

 

찰칵-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벽 하나가 슥 미끄러지며 열렸다. 바깥에는 콘노스케가 기다리고 있다 뛰어들어왔다. 유부를 꽤나 많이 먹였더니 처음 혼마루에 왔을 때보다 윤기도 나고 부드럽고 묵직해진 게 이 녀석도 자라는가보았다.

 

우왓! 알겠어! 진정해!

 

가끔 이럴 땐 콘노스케가 강아지 같아서 마구 쓰다듬었다.

 

*

남사들의 환영과 함께 집무실로 돌아왔다. 몇 시간 동안 원정과 역행군 사냥을 마친 이들의 전과 보고를 듣기 위해서다. 코류도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집무실의 작업용 BGM을 깔았다. 문제의 그 앨범 중 열다섯 번째 트랙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곡이 음원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또 그 곡이야?

 

아까의 멜로눈을 하고 네가 좋아하는 걸 좋아할 때가 좋다던 작은 용은 새초롬한 눈으로 이쪽을 귀엽게 흘겨보았다. 단단히 미쳤지. 저 모습이 귀엽다니.

 

그렇게 귀엽다고 쳐다봐도 말야.

 

코류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곤 내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노래를 듣는 건 좋은데 업무는 똑바로 해줘. 사인을 할 곳이 그 쪽이 아니잖아요.

 

그리고는 만년필을 쥔 손을 겹쳐잡곤 사인할 곳을 가리켰다. 향이 훅 끼쳐들어오면서 코끝이 아찔했다.

.

뮤직 플레이어가 멈췄다. 어느새 사인이 된 서류더미 위로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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