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인이 된 후 



눈이 세상을 겉돈다. 하늘은 며칠 내내 가득 찌푸리고 있더니 하얀 눈을 흩뿌려댔다. 초점을 잃은 것처럼 허공에 뜬 시선이 안타까웠다. , 큰 일 났다. 뒤통수가 뻐근했다. 이걸 어쩐다. 머리카락을 북북 헤치며 등을 덮는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왜 그랬지. 어디에다 두었더라. 오늘 꼭 가지고 가기로 했는데 이맛살을 찌푸리곤 볼을 부풀려가며 고장이 난 것처럼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모습은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유키메의 불안함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분명히, 가지고 나왔는데!

젠장, 빌어먹을, 이런 썩을. 평소엔 굳이 하지 않았던 욕들을 입에 담으며 유키메는 온 가방을 뒤집어 바닥에 흩뿌릴 기세로 가방을 뒤졌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함께 같은 디자인의 물건을 산 뒤로 씻을 때 말고는 단 한 번도 빼어놓지 않았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씻을 때에도 눈 닿는 곳이되 실수로 쳐서 떨어뜨리지 않을 곳에만 두었던 유키메는 눈 내리기 시작한 하늘 아래, 버스정류장에서 미칠 듯한 기분을 감상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데이트인데.

 

유키메의 머릿속에 약 한 달간의 프로젝트가 파노라마 영상처럼 흘러갔다. 그녀가 다녔던 크지 않은,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회사 부서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 여유 인력을 두지 않았던 유키메의 해당 부서는 결국 다른 부서로부터 인원을 다섯 명 가량 지원받았고, 그 인원이 더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보름 정도는 회사에서 숙식을 하곤 했다. 그런 마당이니 애인이 보고 싶다고 프로젝트 중간에 데이트라도 나갔다간 아주 미운털이 박힐 것이 자명했다.

 

결국 쿠로오와 유키메는 그나마도 집에 들를 수 있는 날 잠깐잠깐 얼굴을 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얼굴을 보더라도 이미 회사에서 반죽음 상태로 돌아온 유키메가 꼴딱 쓰러져 잠들어버리는 날이 많았다. 프로젝트 때문이기는 했지만 한 달 내내 유키메는 그 점을 마음에 걸려 했다. 연락도 점심시간, 저녁시간에나 짬짬이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탓했다. 그럴 때마다 쿠로오는 어쩔 수 없지, 자기야, 기운 내. 오늘도 쿠로오 씨 생각 많이 하고, 라며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그래서결국 그 프로젝트 다 끝냈는데아악, 젠장할!!!!!!

 

가방을 뒤집고, 코트 주머니를 한바탕 뒤적이곤 지갑에 파우치까지 먼지 한 톨까지 찾아내겠다는 기세로 탈탈 털어대던 유키메는 버스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찬바람에 짧은 치맛자락이 좀 팔락였지만 그따위 것은 이미 유키메의 의식 밖에 있었다. 그녀의 신경은 원래대로라면 얌전히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어야 할 조그만 은빛의 반지에 쏠려 있었다.

 

-. 유키메의 환장쇼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적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얼굴을 푹 숙이고 이걸 어쩌지, 발끝만 보다가 집에 다녀오겠다며 약속 시간을 늦출 용기도 나지 않은 유키메는 시끄러운 줄도 몰랐다. 몇 번 더 경적을 울리던 차는 버스정류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췄다. 검은 색의 세련된 자동차에서 내린 남자는 곧장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왔다.

 

자기.

나는 바보야이걸 어떡해.

자기야.


쿠로오는 연신 유키메를 불러댔지만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둔 양 손을 보며 패닉에 빠진 유키메는 전혀 듣지 못하는 듯 했다. 쿠로오는 저만치 위에서 허허, 웃고는 유키메의 앞에 확 쪼그려 앉았다.


아가씨. 쿠로오 상이 불렀습니다만.

으응, 쿠로오. ? 테츠?

오야, 이제야 이쪽을 봐 주시는 겁니까.

언제 온 거야?

조금 전에. 부르는 소리도 못 듣고, 전화도 안 보는 것 같아서 와 봤지.

, 그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쿠로오는 조용히 입가에 검지를 대고 쉿, 웃었다. 꿍꿍이 따위는 없이 순하게 웃는 표정은 언제나 유키메의 마음을 말랑말랑한 구운 마쉬멜로우처럼 녹여버리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끼고 있었으니까, 오늘 준비하다가 집에서 빠진 걸 거야. 돌아가면 있을 걸.

 

듣는 사람마저 편안해지는 낮은 목소리에 안심이 된 유키메는 그제야 방긋 웃었다. 무엇보다, 한 달 만의 데이트인데 이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쿠로오가 이끄는 방향을 따라 걸어 차에 도착했다. 조수석의 문을 열고, 들여보내주곤 안전벨트까지 꼭꼭 매어주던 쿠로오는 쪽, 소리 나게 뺨에 입을 맞추고는 차 문을 닫아주었다. -. 추위에 발갛게 물들어버린 손에 입김을 부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쿠로오는 사람 좋은 얼굴로 휘파람을 불며 운전석에 앉았다.

 

못 만났던 동안 하지 못했던 데이트 일정을 하나둘씩 해치우며 쿠로오와 유키메는 여느 때보다도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식사도, 이야기도, 프로젝트 동안 자기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매일 연락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얼굴을 보고 해야 살아나는 이야기를 하고, 그동안 엄청나게 보고 싶어서 죽을 뻔 했다는 둥. 이야기의 샘은 마르지 않았기에 노을이 지기 시작한 저녁이 되도록 쉬지 않고 말소리가 오고갔다.

 

쿠로오는 저녁도 먹고 가자며, 행선지도 알려주지 않고 차를 몰았다. 차는 척 보아도 엄청난 건물로 향했다.

 

테츠?

 

유키메는 놀란 목소리로 이야기했지만 쿠로오는 자신의 연인을 에스코트해 호텔로 향했다. 호텔 고층에 자리한 전망 좋은 식당은 더 이상 덧붙일 수식어도 없이 고급스러웠다. 노을이 지고, 도시에 불이 켜지고, 하늘에 별이 총총 뜰 때까지 두 사람은 담소의 끈을 전혀 놓지 않았다.

 

쿠로오는 반지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것 같은 유키메를 보며 웃었다.

 

자기야.

?

손 줘 봐.

유키메는 고개를 갸웃대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쿠로오는 씨익 웃으며 왼손을 달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면서 유키메는 손을 내밀었다.

 

눈 감아 봐, 자기야. 쿠로오 상이 마법 보여줄게.

그게 뭐야, 실없이 웃던 유키메는 곱게 눈을 감았다. 쿠로오는 참 착하지, 우리 자기- 라고 하며 아까 귀걸이에 걸려 있었던 유키메의 반지를 내민 손 왼쪽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

유키메는 자신의 손을 보며 부끄러움을 참지 못했다. 쿠로오는 그저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었다. 앞으로 장난 칠 건수가 하나 더 생겼다는 재미와 애인의 귀여움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

 

그런데 어디서 찾은 거야?

귀걸이에 걸려 있던데.

나 죽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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