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적 사니와 설정 있음.

 

해가 저물어 가는 때면 혼마루에는 검은 옷이 유행한다. 아직 해가 아주 넘어가기에는 두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았지만 이 혼마루가 만들어졌을 때부터의 전통 비스무리한 것이라고 했다. 유월 초순에 한 번, 시월 말에 한 번. 검은 옷의 물결이 온 혼마루를 헤치는 시기.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시기이다. 한 도파의 장으로서의 행실이 몸에 밴 그로서도 어김없이 옷장에 묵혀 둔 검은 옷을 꺼내는 시기였다.

 

혼마루의 주인. 모두가 남성형의 육체를 가지고 깨어나는 이곳에서 유일한 홍일점이자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주인은 올해에도 작년에 입었던 검은색의 발목까지 오는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이면 제가 태어나 자란 곳의 전통복을 꺼내입는 날이 절대적으로 많은 그녀는 단정한 검은 드레스를 꺼내 옷자락을 펼쳤다.

 

올해도 그때가 왔구나. 그는 어깨에 흰 깃털 무늬가 아름답게 수놓인 기모노를 걸친 채 주인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부드러운 광택의 검은 드레스는 수수하고도 품격 있는 모양새였다. 그것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본 주인은 그에게 말을 건넸다.

 

밖에서 조금만 기다려줄래요?

코토리의 말이라면.

 

그는 근시의 지정석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이내 작은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창호에 거대하다고 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주인은 조심스레 옷의 등 지퍼를 열어 한 발 한 발을 옷 속에 넣고 양팔에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그 시절에도 이런 기분이었지, 주인은 낮게 읊조렸다. 십 년은 되어가는 이야기. 십 년은 족히 채우고도 남을, 새드 엔딩으로 끝나버린 한 편의 드라마 같던 이야기. 그 속의 비련의 여주인공. 마지막 포옹. 모든 것이 꿈 같은 이야기였다.

휘하의 남사들이 이 기간이 되면 유독 검은 옷을 많이 입는다는 것이 자신의 영향임도 알고 있었다. 십 년이 되어가는 낡은 이야기를 기억하는 자는 하나일 때보단 둘일 때, 둘보다는 넷일 때 더욱 좋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차마 내놓을 수 없는 어려운 상대도 있었다.

 

당신이 들으면 뭐라고 할까. 과거에 사로잡힌 망령과 같으니 그만 잊고 새 연인인 자신에게 충실하라고 할까, 아니면 다른 남사들이 말하는 그대로, 너를 만나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할까. 첫눈에 반해버렸다는 이야기를 나지막이 하면서도 가슴 속에 여전히 가지고 있는 바깥 세계에서의 이야기를 그는 달갑게 들어줄 수 있을까, 바깥에서 다시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상대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안은 그녀는 조심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와도 돼요.

 

방에 들어온 남자의 시선에 끝이 치렁치렁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 내의가 보였다. 그는 일말의 동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다가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지퍼를 끝까지 채워주었다.

 

코토리는 이 시기만 되면 항상 이 옷차림이군. 이유라도 있을까?

하하, 할로윈이잖아요. 기분 좀 내는 거죠, .

악령의 장난을 피하기 위한 옷차림 치고는 수수하지 않니?

뭐어혼마루에 악령 같은 게 나오겠어요? 나왔다간 베일 텐데.

 

는 수수께끼를 풀고 싶었고, ‘그녀는 들키고 싶지 않아 때아닌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그나마 이 남사가 할로윈까지만 알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멕시코에서 사흘간 기념하는 망자의 날을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그는 꼬치꼬치 캐물었을 게 분명했다.

 

’. 산쵸모는 석연찮음을 느끼고 있었다. 유월은, 특히나 유월 초는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한 달이었다. 주인, 아니 연인의 부임일이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남사들은 검은 옷을 챙겨입고 주인과 함께 어딘가를 훌쩍 다녀오곤 했다. 그 행렬에 자신은 결코 지명되지 않아왔다. 아니, 이치몬지 도파 대부분은 그 행렬에 끼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주로 취임일 축하연의 준비가 맡겨졌고, 한두 해 정도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월과 시월의 이 이상한 풍습은 이 혼마루에만 있는 광경이었고, 다른 혼마루의 동일 개체를 만났던 그는 의문을 품어왔다.

 

코토리.

?

진지하게 들어줬으면 하는구나. 지금 농담하는 게 아니란다.

 

짐짓 엄한 표정으로 늘 착용하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새빨간 맹금류의 눈이 타고 있었다. 일가의 장만이 갖는 각인에도 붉은빛이 일렁였다. 주인의 은빛 눈이 도로록 구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되는구나.

기분 탓이에요. 그냥 이 옷이 입고 싶을 때가 있는 거래도.

변명은 그쯤 하렴.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실렸다. 보통 이쯤 되면 사실대로 이야기할 법도 한데 이렇게까지 숨기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 트릭 오어 트릿! 진짜 할로윈이라니까요.

코토리.

 

이제는 정말 인내심이 끓어올랐다. 산쵸모는 주인, 아니 연인의 허리를 한 팔로 끌어당겼다. 저 공단 옷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서라도 비밀을 파헤치고 싶었다. 마지막 배려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야 알아줄까, 아주 잠깐 고민한 그는 다른 손을 뻗어 작은 새의 뒷목에 있는 지퍼를 내리곤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 ! 아파요! 뭐 하는 거야.

 

침상에서의 스킨십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도 코토리는 밀어내려고 힘을 썼다. 체구가 두 배는 차이가 나니 어떤 소용도 없는 걸 알면서도 벗어나려 애썼다.

 

이 정도는 늘 하는 스킨십이잖니. 이유를 말해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마.

말할 것 없대도.

아니, 분명히 코토리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어.

 

이야기 속의 뱀파이어 백작처럼 그는 다시 이를 세우고 목덜미에 잇자국을 남겼다. 붉은 울혈이 지는데도 코토리는 이렇다저렇다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 그러니?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이거 놔요. 놓고 얘기해요.

말하기 전까진 놓아줄 생각이 없단다.

그럼 어디 마음대로 해 봐요! 나는 말할 것 없다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

 

눈을 마주치고 낮게 속삭이는 그의 동공이 바짝 졸아들었다. 코토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에게만큼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 공포의 수위가 무섭도록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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