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0시 정각. 똑, 똑, 똑. 단 세 번의 노크 소리와 함께 하루 업무가 끝난다. 전쟁에 낮과 밤이 어디 있겠는가. 무기로 만들어진 이들에게 평화는 사치고 그 무기를 통솔하고자 하는 이에게도 안온함은 사치였다. 세 번의 노크. 혼마루에 아무 일도 없다는 신호. 다행이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시작할 수 있겠어. 육중한 문을 열어젖히는 손을 생각하며 주인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야 어느 성인데. 몇 년의 세월을 갈아서 결계를 보강하고, 채우고, 단단하게 만든 성인데 쉬이 시간역행군의 침입을 허락할 일도 없거니와 이쪽으로 오는 괴이들도 물리칠 수 있게 만든 성인데. 그렇게 쉽게 뚫릴 리야 없지. 라는 생각을 하며 주인은 미소지었다.
코토리, 오늘 밤도 이상 없다. 걱정 없이 푹 자도록.
오늘 야경은 카시라 차례였구나. 믿고 맡길게요.
무슨 일 없도록 잘 지키마.
카시라, 라고 불린 남자는 그날의 보고를 간단히 마치고는 목례하고 자리를 떴다. 별채를 감싸고 있는 영력의 경계에 서서 밤을 지새우는 불침번이 그의 차례인 날. 후원의 연못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개굴개굴 울려퍼졌다. 시커멓게 먹색으로 물든 후원의 풀잎 하나하나마다 고요함이 자리하고, 별이 아름답게 흩뿌려진 하늘 아래 구름 한 점 없는 가을날이 부쩍 다가온 듯했다.
* * *
천고마비의 계절.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계절.
낮은 여전히 푹푹 찌듯 더워서 시간역행군조차 활동을 멈춘 이상한 가을이지만, 높이높이 날아가는 구름 한 점은 가을의 위용을 뽐내기 충분히 아름다웠다.
- 곧 있으면 5주년이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5년이었다. 인간의 육신을 갖고 주인을 위해 직접 검을 휘두르는 육체를 가진 지는 5년이니, 그 때부터 센다면 긴 시간일 것이고, 불과 철에서 태어난 몸이 형상을 갖춘 것은 까마득히 오래 전이니 그에 비하면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다. 그 5년을 유독 특별하게 만든 것은 주인의 태도였다. 해마다 그가 육신을 얻고 주인의 검으로서 충성을 맹세하게 된 12월 25일이 돌아올 때마다 주인은 특별한 시간을 준비해 주었고, 남자는 그로 인해 해마다 돌아오는 그 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다섯 번째 해가 되는 올해는 조금 더.
늘 작은 새 쪽에서 먼저 준비를 했다면 올해 한 번쯤은 나도 깜짝 놀라게 해 주어야지.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미리 주문한 내역을 떠올리며 흐뭇한 감상에 젖었다. 개굴개굴. 개구리는 여전히 울고 하늘에서 별은 반짝였다.
* * *
굳이 말해야 할까? 주인은 방 안에서 후다닥 닫았던 서랍을 열고 선물 케이스를 꺼냈다. 해마다 그에게 선사했던 특별한 시간.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전장에서의 만남. 고맙게도 주인이 원하던 대로 남자의 활약은 눈부셨고, 그에 준하는 포상도 매번 할 수 있어서 기쁜 참이었다.
그렇다면, 올해는 다섯 번째 해니까 조금 특별하게 보내야지.
소년의 장난기를 품은 은빛 눈에 케이스 안의 물건에서 반사된 것이 빛났다. 부토니에 핀. 언제 스러질지 모르는 생화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영원을 간직한 플래티넘으로 만든, 특별한 꽃 한 송이가 빛을 반사해 그 눈에 새겼다. 이번 여름이 지나면. 이번 가을이 지나면 꼭 ―할 거야. 어디서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큰 불행이 닥친다고 하지만 그런 미신 따위로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이미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 주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서랍을 잠갔다.
코토리, 아직 자지 않는 거니? 시간이 꽤 늦었단다.
응. 이제 잘 거예요, 카시라.
누가 타치더러 밤눈이 어둡다고 했는가? 적어도 주인에 대해서만큼은 저 도검남사를 속일 수는 없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주인으로서 안 잘 수는 없지. 주인은 기분 좋게 불을 끄고 별채 내부의 별실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이 선물을 받으면…. 기뻐하겠지?
* * *
가을은 나그네처럼 떠났다. 잠시 엉덩이나 붙이고 앉아 낙엽으로 장난 한 번 겨우 치고 밥도 한 끼 먹지 않고 떠났다. 밤이슬은 서리가 되어 내리고, 숨을 뱉으면 수증기가 되어 김이 서렸다. 남사들은 매복을 위해 얼음을 물고 출진하고, 단도들이 원거리 전투를 상정한 눈싸움을 과격하게 즐기는 계절이 돌아오고야 말았다.
여전히 주인의 금고에는 꽃핀이 어둠 속에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스웨터 한 장에 긴 치마를 걸친 주인이 툇마루에 내려와 앉으니 작은 남사들이 쪼로록 몰려들었다.
아루지! 아루지사마! 대장. 와글와글 모여든 단도들을 저마다 한 번씩 품에 꼭 안아주고 – 야겐한테는 안기는 모양새였지만 – 주인은 밭으로 건너갔다. 겨울에만 자라는 품종을 키우기 위해서 밭을 넓혀달라는 쿠와나 고우의 요청을 들어주었더니 몇몇 도검남사가 자발적으로 그를 도우러 갔다. 그 옆 포도밭에는 닛코 이치몬지가 산쵸모와 함께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껑충 뛰게 큰 그들의 키 때문에 포도밭이 아담하게 보였다. 정작 들어가면 그 포도나무들의 키가 꽤 컸는데도.
으음. 올해도 다들 다부지게 보내고 있구나. 좋았어.
주인은 별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내린 눈이 뽀드득 밟히는 소리가 사랑스러웠다. 이 눈밭을 그와 함께 걷게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 주인은 뜻모를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별채로 향했다.
똑, 똑, 똑.
12시 정각을 울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아무 일 없었던 모양이다.
응,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그러면 밤을 부탁해.
* * *
공기가 차가워질수록 남자의 마음도 초조해진다. 오죽했으면 달력을 개인실에다가 걸어놓고 하루하루 날짜를 세고 있을까. 그 아이의 눈은 분명히 나를 향하고 있다. 알고 있는데도. 알면서도. 그럼에도 혹시라도 한 혼마루를 이끄는 주인과 그를 보좌해야 할 신하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지는 않을까, 초조하게 얼굴을 그려볼 때마다 점점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편지로 전할까?
이렇게 중요한 것마저 부끄럽다는 이유로 편지로 전한다고?
실수하는 것보단 낫지 않나?
그 아이를 생각해선 절대 그럴 수 없다.
반짝이는 주인의 은빛 무지개 같은 눈을 떠올린다. 절대로 편지 따위의 투박한 것으로 전달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선물을 준비해 놓고 선물과 편지만 두고 나오는 것은 그의 성미에 차는 일도 아닐뿐더러, 자신과 주인 모두에게 충성을 다하는 그의 왼날개에게도 못할짓이 될 게 뻔했다. 그래, 대면하자. 마주하고 이야기하자. 결심을 굳히는 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정말 실행할 때가 왔다.
* * *
식신 전서구가 다섯 명의 방을 두드렸다. 올해도 올 것이 왔군. 으하하, 올해는…. 알아서 잘 입고 오라고? 거, 주인 아씨가 참 배려심이 깊구만. 우하하하! 산쵸모의 방까지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주인의 배려로 이치몬지 일가의 다섯 명 중 네 명의 방은 붙어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고케 카게미츠의 방에 좀더 가까이 있었다. 나름대로 껄끄러워 하는 그를 위한 배려였지만 이런 행사에는 얄짤없이 그를 부르는 것도 주인이기는 했다.
이 모임에 나는 끼지 않아도 괜찮은데 말이지이…. 이왕이면 나도 제대로 된 현계일에 불러줬으면 하는데.
불만 가득한 얼굴로 적당히 차려입은 히메츠루 이치몬지가 먼저 별채로 향했다. 오늘은 이치몬지 현 수장의 현계 기념일. 특별히 마련한 자리에서 다함께 만찬을 즐기고, 나름대로 컨셉을 맞춰서 기념사진을 찍는 게 전부였건만 올해는 전서구의 쪽지에 의상 컨셉이 적혀 있지 않았다.
「알아서 입고 와. 장소는 언제나의 파티 룸. 알죠?」
별채 뒤에 있는 후원에 꽤 넓은 파티룸을 증축한 지도 벌써 한참이라고 했다. 가끔 도파별로 모여서 식사를 하고, 혼마루에 대한 의견도 듣고, 주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용도로 지었다는데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열리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이치몬지 일가는 매년 수장 산쵸모의 현계일이 되면 그 곳에 모여서 특별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작년에는 파티, 재작년에는 정장. 올해에는 특별히 적힌 메모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알아서 입고 오라는 뜻인 모양이었다.
* * *
카시라는?
아직 오지 않으셨다. …내가 다녀오면 되겠나?
아니, 그럴 것까지는 없어.
우하하, 녀석도 호랑이긴 한 모양이구나. 저기 오지 않느냐.
별채에 가장 늦게 도달한 것은 의외의 산쵸모였다. 제각기 달리 입고 오긴 했지만 누가 이치몬지 아니랄까봐 가장 포멀한 흰 자켓을 입고, 와이셔츠로 자신의 색깔을 내는 것이 그들다웠다. 그리고 저 뒤로, 가장 특별한 날을 가장 평범하게 보낼 작정인지 갑주를 해제한 정복 차림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산쵸모가 있었다.
냐? 두목?
호오? 이건 또 새롭네에?
산쵸모의 귀에만 들어가지 않을 뿐 놀람이 여실히 보이는 표정으로 난센과 히메츠루가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름대로 당번을 설 때조차 금목걸이와 발가락찌를 잊지 않는 현 수장이 잔뜩 꾸민 공작새처럼 나타나도 모자랄 날 정복 차림으로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재간은 없었다.
…카시라?
기다리게 했다, 작은 새여.
아직 정시까지 조금 남은걸요? …5주년, 축하해요.
잠깐. 들어가기 전에 할 말이 있다.
숱하게 편지를 썼다 찢어버렸다.
숱하게 연습을 하다 잊어버렸다.
저 빛나는 눈에 모든 말이 다 녹아 사라져버렸다. 마치 수은에 담근 것처럼.
그,
그는 냅다 한쪽 무릎을 꿇고는 양 손을 내밀었다. 아주 작은 은빛 케이스에 고급스럽게 이치몬지의 문양이 아닌 주인의 인장이 박혀 있었다.
?
영문을 모르는 주인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부디 받아…주겠니?
어떤 말도 그보다 파괴력이 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말도 딸깍, 하는 작은 소리보다 크게 파문을 일지는 못했을 것이다.
딸깍, 하고 케이스가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안에서는 화려하게 반짝이는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어둠 속에서 처음 빛을 받고 화려하게 반짝이는 그 보석. 한 줄기 빛만 있어도 파이어를 내뿜는 브릴리언트 컷의 보석이 무지갯빛 광채를 내뿜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얼굴에 놀람이 물들었다.
어, 어, 어… 카시라? 이게? 무슨 말이에요?
한참을 놀란 표정으로 얼어있던 주인의 뺨에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거, 내가 생각하는, 아니 내가 아는 그거 맞죠?
주인의 눈에 샘이 고이듯 물방울이 반짝였다. 아마도, 오랫동안 나홀로 상상하고 생각해온 꿈이라도 이루어져 온 것마냥, 주인의 소리없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나도 조심스럽게 보였다.
응, 나도 좋아했어요. 아니, 좋아해요. 내일은 더 사랑할게요!
주인은 이치몬지 일가의 모두가 이쪽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것처럼 다가갔다. 그의 속눈썹 개수까지 셀 수 있을 만큼.
그, 그럼. 선물 교환해요 우리! 하, 하하하하! 얼른!
주인은 한 해를 치하하는 절차도 깜박하곤 후원의 파티 룸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아름답게 차려진 만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선물 교환식이 끝났다. 주인의 손에는 다이아몬드 링이, 산쵸모의 가슴에서는 은빛 다이아몬드 꽃이 빛나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식장부터 알아봐야겠구나, 껄껄껄! 히나야, 다른 건 내가 준비해 두마. 우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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